[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열 번째 이야기 -
“문학, 사유로 채색된 회화, 현실의 결함을 배제하고 재현된 현실인 문학은 나에게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도달할 만한 목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결함이 배제된 현실 속으로 빠져든다. 가사도 없고 제목도 모르는 잔잔한 뉴에이지의 음악 선율을 들으며 이성의 끈을 배 위에 묶어놓은 채 감성의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이성이 물 밖의 세계(현실)라면 감성은 물속의 세계(비현실)이다. 공기 속과 물속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인간은 공기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물속에서 태어났다.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뱃속, 즉 자궁 속에 가득 찬 양수 안에서 나왔다. 자궁 속에서 생겨난 생명은 세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지만 그건 분명 독립된 생명체이다. 우리는 그때 그 9개월간의 그 아늑함과 자유함을 무의식 속에 기억하는 것이리라.
이건 내가 물속에서 헤엄칠 때 가장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물속에서 유영을 하더라도 공기는 필수적이다. 숨을 쉬지 않으면 계속 헤엄을 칠 수 없다. 어머니의 자궁에서는 태반과 탯줄을 통해서 산소를 공급받지만 공기 중으로 나오면 이제 더 이상 연결된 호스가 없다. 내가 직접 호흡해야만 한다. 계속 공기 중으로 나와야 한다. 결국 현실의 세상과 완전히 차단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물속에서는 핸드폰의 울림과 떨림도 공기 중의 시끄러운 소리도 그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온전히 홀로 자유롭다. 이때 물과 육체의 저항이 평형을 이루면 상상이 스며든다. 상상(이야기)의 바닷속을 헤엄친다. 나는 소설(문학) 속으로 들어간다.
얼마 전 집에 택배가 도착했다. (정면) 스노클을 다시 구매했다. 예전에 쓰던 스노클이 망가졌다. 그래서 다시 구매했다. 테무(Temu)에서 아주 값싸게 주문했다. 물 건너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정면 스노클은 호흡할 때 좌우로 고개를 돌릴 때 생기는 물의 저항을 줄이고 몸의 좌우 평형을 유지시켜 속도를 올려준다. 무엇보다도 내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 필요가 없어진다. 이건 물리적으로 물 밖과의 접촉을 차단한다. 그럼 나는 물 밖과 완전히 차단되어 온전히 물 안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럼 좀 더 깊은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다. 물론 이건 내가 스노클로 호흡하는데 익숙해져야만 한다.
처음에 스노클을 썼을 때는 호흡이 어려워 오히려 생각을 더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계속 훈련하면서 스노클을 끼고 퀵턴까지 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자 나는 물고기가 되어 버렸다. 거의 30분 동안을 물속에서 고개를 쳐 박은채 물고기처럼 수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예전에 필리핀에서 스킨 스쿠버를 할 때의 느낌이다. 물론 그렇게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게 아쉽다. 공기를 들고 들어가는 것과 빨대를 물 위에 연결하는 것은 둘 다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지만 와이파이로 접속한 것과 유선케이블로 접속한 것이라 표현하면 비슷할까. 둘 다 가상현실(인터넷)에 들어가면 현실을 잊어버리는 건 매 한 가지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접속 가능한 것과 지정된 장소(수영장)에서만 접속 가능한 것은 기분이 다르다.
서론이 길었다.
“움직인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말속에 스며든다는 것은 월등하게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로 묘사되는 삶이라고 하여 현실성이 희박하지는 않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른 아침 페소아의 문장을 들을 듣고 읽으며 떠오른 상념이 문장을 만들어 간다. 문학과 비문학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이미지화의 여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비문학(칼럼, 논평, 인문과학등)은 글을 통해 깨달음의 각성 효과를 주지만 이미지를 만드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물론 비문학도 묘사와 서사 기법을 쓰긴 하지만 아무래도 문학처럼 디테일하고 섬세하며 리얼한 표현법까지는 쓰지 않는다. 글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작가, 특히 문학을 다루는 작가는 이런 비주얼리제이션에 특화된 자들이다. 그들은 글로 그림과 영상을 그리는 사람들이다. 비현실을 현실화시키는 자들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비현실을 현실과 헷갈릴 정도로 리얼하게 재현해 주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많이 접한 사람들이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건 바로 글을 이미지화시키는 능력이 발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읽고 들으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중인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많은 움직임(활동)과 많은 말(커뮤니케이션, 연설, 대화, 토론등)을 하는 자들은 현실에서 영향력이 크고 현실의 삶에 충실한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아주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사람들은 현실에 많은 조건들을 충족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바쁘게 움직이고 말을 많이 해야 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다.
“들판에 그것이 언어(글)로 묘사될 때, 실제보다 더욱 녹색을 띤다. 꽃을 문장으로 표현할 때 그 문장은 상상의 영역에서 꽃을 정의하는 것이며, 이때 꽃의 색채는 원래 식물세포가 결코 이룰 수 없는 항구성이란 특징으로 치장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요즘 영상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신기하다.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것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젠 영상은 나를 가만히 잡아두지 못한다. 영상을 보다가도 영상을 멈추고 글을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좀 멈추려고 영상을 틀었지만 그 영상이 다시 글을 쓰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다. 영상을 스틸컷(사진 이미지)으로 찍고 그것을 보며 글을 써내려 간다. 영상 속 장면이 문장을 만들어 간다.
작가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글로 바꾸어 버리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 글은 또 다른 이미징의 원천이 된다. 다른 이들이 이 글을 보며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영상과 사진(이미지) 기술은 날로 발전에 이제는 우리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은 아주 디테일하고 아름다운 영상과 이미지를 구현해 준다. 이제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보는 자연과 풍경이 더 아름다울 정도이다. 하지만 이제 이것보다 더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 밖에 없다. 글을 통해 스스로가 상상해 내는 색채와 색감 그리고 명암이 더욱 생생하다면 말이다. 당신이 고화소와 고화질의 LED 패널을 통해서만 그 리얼함을 느낀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당신은 실제로 구현하는 매개체가 없이는 그 리얼하고 아름다움 장면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널에서 구현된 것이 그냥 당신의 전전두엽에 찍히는 단순한 Copy and Paste 작업만 하면 된다. 풍요가 준 편리함이다. 그 편리함은 매개체(도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글이라는 아주 원시적이고 추상적인 매개체는 당신의 뇌가 아주 복잡하고 고도화된 이미징 센싱 작업을 요구한다. 글을 이미지화시키는 것이 뇌가 가장 활성화된 상태이다. 자극적인 영상에 오래 노출된 뇌가 망가지는 이유는 이런 기능의 훈련과 반복이 없어지면서 뇌기능이 저하된 까닭이다.
“우리 모두는 작가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쓴다. 본다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포괄할 만큼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세상을 보는 것과 영상을 보는 것과 글을 읽는 것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의 차이를 아는가? 이것을 구분한다면 당신은 네 가지의 세상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4D 현실 영상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기 전까지 당신의 눈으로 본 모든 것을 기억하는가? 이건 실로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이다. 이걸 만약 음성이 포함된 영상으로 메모리 반도체에 저장을 한다면 엄청난 용량이 될 것이다. 인간이 80년 정도를 산다고 가정하고 우리의 눈과 귀로 들어온 모든 화면과 음성(FHD 해상도, 30 fps, 44.1kHz 16-bit 스테레오 오디오)을 영상으로 메모리 반도체에 저장하면 약 20,601,830.4 GB(≒19.65 PB)의 용량이 된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512GB SSD가 약 4만 개 이상이 필요하다. (ChatGPT참조)
만약 냄새와 촉각이라는 또 다른 감각까지 4D로 저장한다면 아마 더 큰 용량이 될 것이다. 실로 엄청나다. 우리의 뇌는 당시에 이것을 다 기억(기록)했지만 다 기억해 낼 순 없다. 왜냐 대부분이 의미 없는 영상이다. 이건 녹화되지 않은 카메라 앵글에 스쳐 지나가는 영상과 같다.
2D 영상
우리가 각종 스크린을 통해 보는 영상(영화, 드라마, 유튜브등)은 의도된 영상이다. 누군가가 제작하고 의도를 담아서 세상의 일부를 보여준다. 이건 당신의 상상이 개입되지 않은 타인이 구현한 혹은 짜깁기(편집) 한 상상을 당신에게 주입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생각 없이 영상을 소비한다. 감정(울고 웃고)을 소비하거나 혹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한다. 여기에 당신이 상상이 개입될 여유가 없다. 빠르게 영상을 쫓아야만 감정을 소비하는 쾌락과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상 콘텐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바야흐로 영상의 홍수이다. 물론 우리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영상을 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볼 때 뿐 아니던가. 영상은 시청 중에 그 의미와 가치를 되새길 수 없다. 다 본 후에 밀려든다. 하지만 다 보고 나면 당신은 현실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영상이 끝나면 씻고 밥도 먹고 다시 일도 해야 한다. 일시적인 감동일 뿐이다. 당신의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1.5D 수동 영상
뭔 소린가 할 것이다. 이건 나의 상상이 만든 개념이다. 글자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0차원(점)과 1차원(선)이 2차원(면)에 구현된 모습이다. 우리는 2차원으로 보지만 실제 보이는 것은 점과 선이다. 그 점과 선의 조합이 2차원의 화면을 눈 밖이 아닌 눈 뒤의 뇌(전두엽)에서 구현하는 것이 글을 읽는 것이다. 이건 타인(작가)이 당신이 그 영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것이다. 당신이 작가가 쓴 글을 보고 하는 상상은 당신 만의 이미지이지만 그 이미지의 가이드 라인은 작가의 글이다. 작가가 만든 프레임(줄거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맨발에 반바지만 입은 어린아이들이 헐벗은 몸으로 손에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나를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바구니에는 허접한 부채들이 있었고 아이들은 그걸 나에게 흔들어 보이며 돈을 요구했다. 며칠을 굶었는지… 갈비뼈의 개수를 다 샐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한 몸이었다.]
- 자작 소설[발리에서 생긴 일] 중에서 발췌 -
작가가 쓴 글을 따라 읽었다. 위에 글을 읽으면서 당신이 깨끗하고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와인과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릴 순 없는 것이다. 애처롭고 불쌍한 장면이라는 제한된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애처롭고 불쌍한 모습의 디테일은 독자마다 다르다. 만약 작가가 더 디테일하게 묘사하면 당신은 그 묘사를 따라 좀 더 디테일한 상상을 할 것이다. 이렇게 독자는 글을 이미지화하면서 장면 장면을 이어간다. 자신만의 영상이미지를 구현해 가는 것이다. 가이드라인이 있는 상상이다.
1.5D 능동 영상
반대로 당신이 위에 소설 속 장면을 직접 쓰면서 상상을 했다면 이건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상이다. 이건 아주 리얼한 영상이 될 수 있다. 왜냐 이렇게 장면을 떠올리며 묘사와 서사를 하려면 그 원천(소스)이 있어야 하는데, 이 소스는 당신의 기억에 의존한다. 이 기억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무의식의 기억들의 재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상상은 읽는 상상보다도 훨씬 리얼하게 재생된다.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큰 상상력을 낳는 것이다. 읽는 것은 상상을 유도하는 것이고 쓰는 것은 상상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과정이 많이 축적될수록 후자의 과정이 순조롭게 이뤄짐은 다들 아시리라. 훈련과 연습 없이 실전에서 성과를 내는 자는 없다. 읽기 없이 쓰기가 불가능한 이유이다.
이렇게 쓰면서 하는 상상은 또 다른 나만의 현실 세계를 구축한다. 문학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나의 세계를 한 개 두 개씩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자신이 처한 현실 세계의 모든 결함과 제약을 벗어난 세계이다.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를 연결한다. 작가는 분리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머리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역할이자 존재의 이유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행위는,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 행위는 비생산적이고 때론 무익해 보이지만 이 노력이 아주 인간적이라면 인간으로서 가장 해 볼만한 일이 아닐까...
문학은 현실(결함의 세상)과 이상(완전한 세상)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