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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n 30. 2024

예술과 인생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아홉 번째 이야기 -

 “예술은 인생과 같은 거리, 하지만 다른 번지에 산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예술과 인생은 애증(愛憎)의 관계라고 표현하고 싶다. 예술과 인생은 서로 사랑하지만 또한 서로 미워한다. 서로 필요하지만 방해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마치 남녀 간의 사랑과도 같다. 남녀의 사랑이 깊어지면 그 속에서 미움이 생겨난다. 미워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된다.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상태를 맞이한다. 나는 이런 미움까지 품을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인생을 떠나서는 예술이 될 수 없다. 인생은 현실의 수많은 고난을 견디고 버텨야 한다. 인생은 현실의 숙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생은 예술가가 온전히 예술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고난과 역경이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예술가의 삶이 평탄치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평탄치 않기에 더욱 드라마틱한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에는 예술가의 인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과 인생은 서로를 미워하며 또한 사랑할 수밖에 없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결국 페소아의 책을 구매했다. 작년 말 처음으로 그의 책을 만났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의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8편의 독후감을 남겼다. 내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이후로 가장 많은 독후감을 쓴 책이 되었다. 그의 책은 후폭풍이 컸다. 그 이후로 한 동안 다른 책을 읽어도 그때의 감흥을 넘어서는 기분과 감탄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그의 책은 나의 인생 책 중 하나가 되었다.


다른 책을 읽다가도 한 번씩 그의 책 속에서 봤던 구절들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다시 찾아보려 해도 볼 수가 없었다. 구독 시스템은 기간이 지나면 다시 읽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의 책을 소장하기 위해 구매했다. 이제 그때 그때 다시 꺼내볼 수 있다. 오늘 공원을 산책을 하며 다시 그의 책을 읽었다. 그때 곳곳에 쳐놓은 밑줄과 수많은 메모들이 보였다. 다시 읽으니 그 감흥은 더 배가 되는 것 같다.


그의 글이 또 예술에 대한 상념을 던졌다. 9번째 독후감을 쓰려한다.




어랏! 이른 아침 맥도널드, 또 다시 만난 두 남녀, 드디어 두 노년이 대화가 시작됐다. 할아버지가 먼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노년의 러브스토리가 시작되려나 보다. [쓰는 남자와 읽는 여자 in 맥날] 단편 소설의 제목의 떠오른다 이젠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지만 난 그 대화를 만들 수 있다. 허구는 상상이지만 언제나 현실에서 가져온다. 하지만 오늘은 소설이 아닌 쓰다만 독후감을 먼저 써야겠다.

An old man who is writing and an old woman who is reading in Mcdonald

세 가지 예술


글쓰기를 예술의 한 분야로 볼 수 있을까? 물론 글쓰기의 종류가 너무 다양하기에 모든 글을 예술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문학은 예술의 한 분야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글로 표현되는 문학은 다른 예술과는 다른 점이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술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문학(글)과 시각화된 예술(회화, 조각, 사진, 영상 등) 그리고 음악(소리)으로.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예술은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놓여있다. 나는 확신한다. 문학은 나머지 두 가지 종류의 예술과 접촉하고 연결되면서 예술로 나아간다고. 글이 시각화 청각화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문학이라는 예술로 나아가는 것이다. 문학은 묘사와 대화를 포함한다. 인물을 묘사하고 인물간 대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글의 시각화 청각화 과정이다.


그래서 한 가지의 예술 방식(글)으로 표현하되 다른 예술(미술, 음악등)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예술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뭐라 그 예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 다만 내가 글예술(문학)에 대해서는 한 가지 확신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건 글 예술(문학)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이성(理性, Reason)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The artist who express with literature and art and music

이성에서 벗어나는 방법


당신은 언제 감성에 심취하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성을 놓고 싶을 때 술을 마신다. 술에 취하면 이성에게 붙잡혀 있던 감성이 족쇄를 풀고 감정의 형태(분노, 슬픔등)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감성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있어, 통제가 어렵다. 이 감성이 즐겁고 유쾌하며 긍정적인 감정이면 상관없겠지만 감성이 슬프고 괴롭고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문제가 된다.


왜냐 이성의 통제를 벗어났기에 사회적으로 통용되거나 용납되기 힘든 형태의 언행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은 항상 적당히가 중요하다. 문제는 한국인은 이걸 잘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기독교(개신교)만 유일하게 금주를 강권하고 음주문화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이다. 오랜 옛날 조선인의 음주문화를 경험했던 선교사들이 내린 처방이었다. 술은 자신이 절제하고 통제할 수만 있다면 딱딱한 이성만 지배하는 인간관계에 감성을 곁들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취중진담(醉中眞談) 아니 취중진문(文)?!


♩♬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 나

불안해할지도 몰라

하지만 꼭 오늘밤엔 해야 할 말이 있어♪ ♫


- 김동률 [취중진담] 중에서 - 

김동률 [취중진담]

과거 20대 청년시절, 술에 잔뜩 취해 노래방에 가면 항상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노래 가사가 왜 그리 내맘 같던지... 노래방을 나와서 전봇대를 붙들고 속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술이 불러낸 용기라 생각했다. 그렇게 진심을 고백했다. 뭐 예상했다시피 결과는 참담했다. 진심은 용기보다 진실이 우선이다. 진실은 이성과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진심으로 전달되는 법이다. 진실은 진심 없이 진실될 수 없다. 이성을 잃고 감성, 아니 감정에 취한 용기는 객기(客氣)였다.


예전에 술에 취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 감성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이 주체할 수 없는 감성을 어디로 쏟아내야 할지 몰랐다. 늦은 시간 마땅히 전화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노트북을 켜고 그것을 하얀 워드 화면에 갈겨쓰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 듯이 써내려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써놓은 글들을 다시 봤을 때 깨달았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글은 글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 앞뒤도 맞지 않고 스토리도 맥락이 없으며 문법도 맞춤법도 뒤죽박죽 도대체 글에 집중을 할 수가 없더라. 내가 초고를 쓸 때도 물론 문법이나 맞춤법을 틀리기도 한다. 이건 이성이 통제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이성이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이 맞춤법이 틀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맞춤법과 문법의 수정은 나중에 퇴고 때 하면 될 일이다. 맥락과 스토리 라인이 있는 뼈대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감성만 충만한 상태에서는 뼈대가 없다. 아니 뼈대가 너무 많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작가 자신이 쓴 글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글을 독자가 이해할 리 만무하다.

the aritist who is painting in drunken alcohol

하지만 우리는 간혹 술에 혹은 약에 취해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루고 하는 예술가를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들에게 보이지 않을 순 있다. 하지만 그들이 때론 폭발한 감성을 캠버스와 건반 위에서 표현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고 본다. 그들은 그들이 그리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소리 내는지 모르는 채 뭔가에 홀린 듯 그리고 소리 내고 한다. 그것들은 설명할 순 없지만 휘몰아치는 감정을 품고 있는 예술로 탄생한다. 그들이 그렇게 만든 작품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무의식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서 표현된 것을 언어라는 이성적인 도구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쨌든 글이 아닌 시각과 청각을 이용한 예술은 이성을 벗어나서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도 술에 취해 글을 써보려 했고 또 해봤지만 이성의 통제가 느슨해지고 벗어난 상태에서는 글을 제대로 써내려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건 문학은 완전히 감성적일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이성적일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Between Thinking and Feeling

최근에 내가 MBTI 테스트를 해봤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F(Feeling, 감성) 형이긴 하지만 T(Thinking, 이성사고)가 상당히 많이 차지하는 F형이었다. 그리고 내 삶은 항상 이 둘의 싸움이었다. 그것이 글을 쓸 때도 항상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문학과 비문학을 번갈아 가면서 쓰고 있는 나 자신의 정체성에 항상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마음은 항상 문학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요즘은 특히 소설을 많이 쓰면서 F가 좀 더 충만해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문학을 쓸 때에도 이성이 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감성은 문학이 될 수 없다. 그건 그냥 감정의 배설물을 토해놓은 일기에 지나지 않다. 자신도 알아볼 수 없는. 하지만 문학을 쓸 때는 감성(7:3 혹은 8:2 정도가 아닐까)이 더 크게 작용함은 분명하다. 나도 소설을 쓸 때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비소설을 쓸 때는 냉철해진다.


“도라도레스 거리의 사무실이 나에게 인생을 의미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살고 있는 도라도레스 거리의 3층은 예술을 의미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의 글은 감성이 70%라면 이성이 30% 정도인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문장은 감성으로 휩쓸리는 것 같다가도 그 속에서 삶의 진리 같은 이성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그런 형태의 문장들이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성과 이성을 오고 가게 만들면서 이상 세계에만 머물 수도 그렇다고 현실 세계에만 머물 수도 없도록 한다. 하지만 페소아는 분명 이상세계로 좀 더 치우쳐 있다. 이상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감성이 이성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역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글은 신비하고 또 매혹적이며 또한 감동과 깨달음을 함께 준다.


“예술은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지만, 예술 덕분에 인생을 살기가 더 쉬워지는 건 아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그는 평생을 글을 쓰며 살았다. 지독한 글쟁이였다. 그가 그렇게 평생 글을 쓰고 살았는지 그가 살아생전에 알았던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는 그것이 알려지길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인생이 예술로 이끌고 예술이 자신의 인생에 서로 영향은 미치되 서로가 서로를 잠식하고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마치 남녀가 서로 사랑하며 미워하고 또한 의지하며 구속하는 것처럼…


나는 그걸 이제 배워나가는 중인 것 같다.


예술(문학)과 인생 사이에서...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in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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