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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14. 2024

삶은 관 속에 누운 채 장례식을 기다린다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열두 번째 이야기 -

“죽어 있는 사람을 볼 때, 나는 여행을 떠난 자가 떠오른다. 시체는 나에게 벗어놓은 옷가지와도 같다. 누군가 길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한 때 입고 있었던 단 한 벌 뿐인 옷을,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곱게 화장한 여자가 옅은 미소를 띤 채 기다란 나무 상자에 누워있었다. 그녀만 홀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나무 상자 앞으로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슬픈 표정들이다.


생전에 고인은 보라색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녀도 호주의 봄을 물들이는 자카란다(Jacaranda)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한국의 봄이 하얀색이라면 호주의 봄은 보라색이다. 파랑과 빨강이 섞이면 보라가 된다. 삶은 서로 섞이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보라색을 좋아하리라.

호주의 봄

사람들은 각자 보라색 꽃송이를 하나씩 들고 영혼이 떠나간 고인의 옷가지(시신)를 보며 오열하고 눈물 흘렸다. 그녀는 오랜 병마와의 싸움을 끝내고 영면에 들었다. 이건 어쩌면 당사자에겐 기쁜 일일 것이다. 더욱이 그가 하나님을 믿는 자였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죽음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자만 빼고 모두 슬픔에 잠겨버렸다. 죽음은 어쩌면 죽은 자에게만 기쁜 일인지도… 죽음을 바라보는 자는 공포와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죽는 자는 그것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호주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기독교식 장례절차에 따라 고인의 시신을 바라보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방식의 장례는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수없이 장례식장을 돌아다녔지만 죽은 자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장례에서 죽은 사람을 본 건 할머니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할머니도 곱게 단장하고 관 속에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각종 호스와 전자기기들의 선들로 연결되어 고통받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관 속에 누워있는 모습이 너무도 평화로워 보였다.


어쩌면 죽음은 슬픔 속에 유일한 기쁨일지도...

장례식장에서

“나는 나비로 탈바꿈하는 애벌레였던 거야. 진액을 흘리며 끈적끈적한 몸으로 거친 숨을 내쉬면서 바닥을 기어가는 더러운 애벌레, 죽음이 나를 번데기에서 꺼내 해방해 줬던 거지”


-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중에서 -


며칠 전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을 위한 연극에 참여했다. 연극의 주제는 ‘성 정체성’에 관한 연극 었는데, 보잘것 없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다른 멋있는 곤충들과 비교해서 보여주는 연극이었다.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또다시 개미 역할을 맡았는데… 갈수록 연기력이 늘어 이제 교회에서 아이들 사이에 개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난 사실 이 연극의 주제가 성 정체성보다는 죽음과 연관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 연출을 맡은 사람은 각각의 곤충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다른 곤충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는 애벌레는 현재의 육신을 벗고 완전히 새로운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이건 과거 예수가 육신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천적들 속에서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살아가는 시간은 위험과 고난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인고의 시간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과정이었다.

연극 중에

다른 곤충들은 애벌레를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나비로 부활한 모습을 보고 모두 놀라 경이로워하는 모습은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것과 비슷한지 않은가? 만약 내가 연출을 했다면 그렇게 스토리를 만들지 않았을까. 뭐 같은 현상을 봐도 그 속에서 찾아내는 의미는 각자가 다르다. 뭐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흔히들 죽음은 실패이고 출생은 승리라고 생각하지. 죽음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과 연결 짓고 출생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정반대야. 죽음은 우리를 모든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해 주는 거니까.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 되는 거지. 가벼워지는 거야. 반대로, 곰곰이 따져 보면 태어나는 게 그리 좋은 건 아니야.”


-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중에서 –


죽은 자를 보면 알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 같은 어두운 기운이 엄습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죽음이 어떤 건지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말이다. 우리는 경험할 수도 느낄 수도 없기에 죽음을 어떤 일에 비유할 수도 없을 뿐 더러 설명할 수도 없다.


우리는 태어난 아기를 보면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한다. 하지만 아기에겐 그것이 과연 기뻐할 일일까? 생명의 탄생의 경이롭고 신비롭지만 그것을 느끼는 건 그걸 바라보는 자들이지 그 당사자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입으로 인생이 고통이라 말하면서도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모순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죽음이 인간이 초월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현실의 수많은 굴레에 사로잡혀 삶 속에서는 도저히 초월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모두가 이상적인 사회와 세상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것과는 반대로 가는 것처럼. 현대 사회의 수많은 역할과 책임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쫓고 그것을 채워가는 숨 가쁜 삶이 삶을 초월로 밀어 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소음과 방해가 너무 많다.


“젊어서는 지혜가 있다면 늙어서는 힘이 있다면…”


이 말에 공감하지 않는가… 아마 인생이 노년에 다가가신 분들은 공감하시리라. 우리는 젊어서는 지혜를 얻지 못하고 늙어서는 지혜가 생겼어도 이제 더 이상 그 지혜를 활용할 몸(하드웨어)이 따라 주지 않는다. 젊어서는 모두가 자신이 지혜로운 척하며 살아갈 뿐이다. 인생이 그렇다. 삶 속에서 지혜를 배워가지만 그것을 깨달을 즈음이면 이미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깨닫고 회한(悔恨)의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직 지혜롭지 않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그 지혜로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조금은 알 듯하다. 이것을 깨닫는데 적잖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무엇에 홀린 듯 이리저리 휩쓸리며 무언가를 쫓고 쫓기며 살아온 듯하다. 그 분주함 속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다 위 파도에 이리저리 표류하며 어딘가를 향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수피 철학에서는 죽음이 황홀경에 가까운 극적인 순간이며, 이 경험 자체를 최대한 지각하기 위해서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중에서 -


건강하게 죽는 자들이 없어 그것을 느낄 자들이 얼마나 될지, 나는 다행히도 어린 시절 증조할머니의 자연사를 지켜봤다. 그 어린 나이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게 신기하다. 다신 볼 수 없을 기억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때 대가족과 주변 이웃사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새벽닭이 울면서 잠을 자듯 숨을 거둔 증조할머니의 모습은 너무 평온해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으로 병원에서 혹은 정신적 고통으로 스스로 혹은 고독하게 홀로 죽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이제 이런 자연사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아마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이 죽음의 황홀경을 경험하고 죽는 자들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만약 그것을 경험한다 해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잠은 깨어나지만 죽음은 깨어남이 없기에…


죽음 같은 환상


그래서 죽음은 경험과 느낌의 영역이 아니다. 경험도 느낌도 없지만 상상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상상은 경험과 느낌을 즉 기억을 배제한 상상이다. 상상도 기억에 의존하지만 죽었던 기억이 없기에 이 상상은 환상에 가깝다.


소설을 쓰는 자들 중에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를 그리는 작가들이 있다. 판타지 소설가들이다. 그들의 상상이 아마도 환상에 가까운 상상이 아닐까? 현실의 한계와 굴레를 벗어나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세상을 구축한다. 그렇다고 그 소설이 인간의 삶과 본성을 떠나 있진 않는다.


문학도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만 판타지 문학은 그 배경과 인물과 설정이 현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에서 펼쳐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만큼 작가의 상상력에 더 많이 의존한다. 그 상상은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지만 기억이 가장 많이 변형된 형태의 상상이 아닐까. 삶(현실)과 죽음(환상) 사이에 있는 그런 상상?!


이건 나도 소설을 쓰면서 몸소 체험했다. 처음에 소설을 썼을 땐 기억에 많이 의존했다. 과거 현실의 기억이 변형을 통해 이야기를 재창조된다. 이건 이야기의 시작이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소설을 계속 쓰다 보면 이야기는 기억에서 점점 멀어진다. 현실에서 상상이 더해져 이제 현실보다 상상이 더 커져버린다. 환상으로 나아가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모든 이야기는 현실에서 그 영감을 얻어서 시작되었지만 그 과정은 상상이 더해지고 이상이 더해지며 환상으로 나아간다. 나는 판타지 소설이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판타지라는 꿈

판타지를 꿈꾸는 사람들…


웹 소설 시장에 판타지 소설이 넘쳐나는 이유는 현실에선 더 이상 희망할 것들이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 옛날에는 드라마도 현실의 삶을 그린 것들이 주류였지만 지금의 영화와 드라마 시장은 이런 판타지 세계가 더 각광을 받는다. 과거엔 문학이 현실을 리얼하게 그리는 방식이었다면 요즘 문학은 현실을 떠나서 완전히 다른 현실을 통해 현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아마도 현실이 이제 너무 비인간적으로 변해버렸기 때문 아닐까. 이젠 현실에서 인간적인 것을 기대할 수 없어 환상 속에서 그것을 찾아 현실에 알려주려는 듯하다.


판타지 소설을 쓰다 보면 꿈을 꾸는 것 같다. 현실에선 진정한 웃음과 슬픔과 기쁨을 느끼기 힘들지만 그 속에선 느낄 수 있다.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끈을 잡고 헤엄치고 오는 기분이랄까. 잠을 자며 꾸는 꿈은 의식이 없지만 쓰면서 꾸는 꿈은 다시 또 기억할 수 있다. 오래도록 기억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그 꿈을 보여줄 수 있다. 다만 쓰면서 꾸는 꿈은 다시 돌아가야 할 의식 세계의 시간이 다가옴을 안타까워한다. 자면서 꾸는 꿈은 그 다가오는 안타까움을 인지하지 못한채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리고 죽음은 그런 안타까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히 꿈꾼다.


“현실의 삶은 단지 죽음이다. 삶은 관 속에 누운 채 장례식을 기다린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우리는 모두 영원히 꿈꾸는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누구나 언젠간 꾸게 될 꿈이다.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꾸는 꿈은 당신이 살아있었을 때 겪었던 모든 기억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불안의 서] with sweet dounut early in the 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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