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열네 번째 이야기 -
“내가 가진 극히 부족한 감동의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놀랍게도 대개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지, 나와 유사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은 절대 아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우리는 보통 나와 너무 다른 이들에게선 거부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같이 있으면 왠지 불편하다. 이질감을 즐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비슷한 이들과 어울리며 그 속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찾는다. 하지만 그건 또한 당신이 유연함을 잃고 딱딱해져 가는 과정이다. 익숙함에 오래 머문 자는 외부 세계와 차단된 껍질 속에 갇힌 자가 되어버린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껍질 속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길 바란다. 껍질은 갈수록 단단하고 딱딱해져 가는데 어찌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딱딱해져서 껍질 밖의 세계는 잘못되고 틀린 세계로 인식하게 되어 버렸다. 문제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이 무엇인지 모른 체…
페소아의 글은 나의 상상의 원천이 되어가고 있다. 여태껏 나에게 이처럼 많은 영감(Inspiraton)을 불러내는 작가는 없었다. 몇몇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지만 지금은 단연코 페소아가 일 순위로 등극했다. 물론 앞으로 또 어떤 작가를 만날지 모르지만 지금까진 그렇다. 곧 삶의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변화는 언제나 불안을 불러온다.
며칠 전 [Inside & out 2]를 봤다. 1편을 너무도 흥미롭고 감명 깊게 봤던 애니메이션이었다. 2편의 주제는 불안이었다. 주인공 라일리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환경과 상황 속에서 생겨난 불안이라는 감정이 삶을 통제불가능한 곳으로 몰아간다. 불안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만 불확실한 미래는 언제나 우리를 현재에 온전히 놔두질 않는다.
요즘 나 또한 이 불안이 조금씩 나를 잠식해 가는 것 같다. 그건 또다시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다가오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이 삶의 새로운 변화들은 언제나 불안을 불러들인다.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그 불안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서 페소아의 책[불안의 서]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일까. 그의 글을 읽다 또다시 밀려든 상념을 적어본다.
"부조리와 모순을 추구하는 것은 슬픔에 잠긴 자들의 동물적인 기쁨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왜 책을 읽고 글을 쓰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세상에는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한다. 난 아직도 이 너무 다양한 세상에 무엇이 진정으로 옳고 그름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은 겉으로는 그것들을 혐오하는 척 하지만 다들 그 부조리와 모순에 적응하며 그것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살아가는 이가 대부분이다. 슬픔에 잠겨 있는데도 그 속에서 기뻐한다.
나는 항상 모든 상황과 현상을 열린 생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문제는 이것이 나에게 가치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머리는 자주 혼란스럽다. 그것을 정리하는 유일한 방법이 읽고 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과 상황을 대변하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지 옳고 그름을 따져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옳고 그름이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은 모호한 개념이 되어간다. 뭐가 옳은지는 뭐가 나를 대변하느냐이다.
내가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나마 사리분별이 나보다는 나은 자들의 생각을 참고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나 스스로 정리하기 위함이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읽고 쓰는 사람만 추려낸다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물어봤다.
100년 간의 고유 작가 수=100만 ×100년=1억 명 (중복출판을 고려, ChatGPT 참조)
한 사람을 기준으로 대략 100년 산다는 전제를 깔고 현재 세계 인구 79억 명을 기준으로 나눠보면 대략 전체 인구의 1.26%가 출간 작가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중에 모든 책이 양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 1%도 채 안 되는 책이 양서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양서를 쓴 작가들은 다름과 그름의 차이를 어느 정도 깨달은 자들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어쩌면 진리에 남들보다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한 자들이 아닐까.
내가 양서만 만나고 읽을 수는 없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양서로 다가갈 가능성은 커지고 양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다름와 그름에 대한 기준은 점차 좁혀지게 된다. 그 기준이 완전히 명확해지기 힘든 건 시간은 너무 제한적이고 나는 읽고 쓰는데만 모든 시간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은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 다만 읽고 쓰는 시간이 길어지면 조금씩 명확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성장과 변화이다. 안타까운 점은 우리는 올바른 변화와 성장보다는 잘못된 변형과 퇴화 속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변화(or 변형)의 두 가지 방식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 이건 인간의 본성이다. 누구나 같다. 하지만 이 상황을 즐길 순 없지만 이 상황을 자주 마주하다 보면 자신이 변화됨을 감지한다. 이건 두 종류의 상황으로 설명된다.
첫째는 당신이 힘과 권위가 없어 누군가의 말과 지시를 일방적으로 수긍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건 당신이 누군가에게 금전적 혹은 물질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혹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나와 다른)의 말과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건 단순히 노동만을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아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느끼고 생각한다. 이해되지 않고 공감할 수 없는데 수긍해야만 하는 것이 반복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해가게 된다.
힘에 의한 현상 변화이다. 다만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이후에 자신이 그자와 같은 힘과 지위를 가지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똑같이 반복하게 된다. 이게 가스라이팅(노예화)과 되물림의 연속이다. 물론 이 과정이 자신의 좋지 않은 습관을 바꾸고 훈련하는 개선과 발전의 과정일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는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당신과 동등한 입장의 상대와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다.
이 때는 서로가 다름이 불편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적인 방식 (논리와 합리 같은 이성과 연민과 동정 같은 감성)으로 상대방에게 호소하게 된다. 둘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졌다면 이건 합의점이나 결론을 낼 순 없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당신은 상대의 존재, 즉 세상에 나와 완전히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만약 그런 자와 함께 생활해야 하거나 일상의 시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든 공존의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그 과정이 바로 당신이 변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지속되면 당신은 불편함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우물 안에 개구리끼린 변화란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사람과 부딪치면서 내 안에 가려져 있던 혹은 딱딱해진 껍질을 부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지만 그것을 굳이 피해 다니거나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과거 관계는 항상 권위와 힘이 있는 자 와의 종속적인 관계였다. 왜냐 나는 항상 그들에게 의존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내가 머리가 굵어지면서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조금씩 명확해지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과 말하는 것들이 나의 생각과 상충하면서 생겨나는 괴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나였다면 그냥 먹고살기 위해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회화이고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에의 의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사회가 극심한 이기주의와 빈부격차, 불신만연, 고독사, 비혼, 비출산, 은둔, 남녀혐오, 세대갈등, 여야갈등, 기후변화 같은 현상들이 더욱 심해져 왔더라.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동안 사회가 지향하고 과거 어른들이 지켜오고 보여줬던 과정들이 지금의 결과를 만든 것이다.
나는 이것이 권위와 힘에 토 달지 않고 복종만 해온 시간이 만든 결과였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위와 권위가 없이 누군가와 동등하게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버린 듯하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돈과 지위에 집착하는지는 바로 이 권력 때문이다. 권력이 발언권을 가지고 권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돈을 벌거나 그게 아니면 죽어라 공부(학벌과 학위를 위한)만 했다. 부모들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권위와 권력에 짓밟힌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그렇게도 자녀 교육에 혈안이 된 것이리라. 자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을 가지질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다름과 그름의 차이를 먼저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생산(물질과 부)과 지식 습득에만 열중한 탓이다. 다름과 그름을 알아가는 과정은 교양을 쌓고 인간을 이해하는 공부(인문, 철학)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따위 돈 안되고 쓸데없는 것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단 돈이 있고 지위가 있으면 내 말이 철학이 된다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틀리지 않다. 우리는 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나처럼 돈도 없고 지위 없는 자가 아무리 글을 쓰고 말을 해봐야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뿐더러, 설령 내가 옳은 글을 쓰고 옳은 말을 한다고 해도 오히려 반감만 가질 뿐이다. 나 보다 부와 권력이 없는 하찮은 자가 나에게 옳은 소리를 하면 기분 나쁜 이유이다. 그건 자신이 쌓아 올린 부와 권력이 짓밟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인가? 당신은 입으론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런 자들 앞에선 자신을 낮추고 있지 않은가? 그건 자신은 옳고 그름 보다 그 자로부터 덕을 볼 생각부터 하기 때문일 것이다. 권위와 권력에 굴복한다는 것과 존중과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품고 있지만 같은 행위로 비치기 마련이다. 덕 볼 생각은 존중과 경의의 태도로 나타났을 때에만 그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뜻과 생각이 달라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는 모순의 상황을 견디는데 익숙해진다. 덕을 보고 자신도 그 권력과 권위를 조금이라도 얻고 싶다.
이런 생각이 만연한 사회는 점점 위험해진다. 교양과 철학(인간에 대한 이해)이 없는 자들이 부와 권력을 가지면 벌어지는 현상이다.
나는 이제 얘기할 수 있다. 다름과 그름은 분명 다른 것이지만 그름은 때론 다름으로 위장해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세상을 더욱 비인간적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만약 자신이 어떤 집단과 관계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이기적이고 부정적이며 불신과 불안이 커져간다면, 즉 비인간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면 그 집단과 관계를 한 번 의심해 봐야 한다. 그건 자신이 남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르기 때문일 것이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었던 경험들 모두를 배제한 채로 읽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것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전 세계 1%도 되지 않는 자들이 남긴 것들을 계속 읽고 써야만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계속 읽고 쓰는 이유이다.
당신은 동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