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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28. 2024

사랑과 이해는 거짓이다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열여섯 번째 이야기 -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거짓말은 우리가 나누는 입맞춤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사랑하는 자에겐 진실되어야 한다. 누구나 동의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 중에 과연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사실 사랑에 빠지면 진실(사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사랑에 빠지면 서로에게 진실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과정은 둘만의 거짓을 만들어 가는 과정과 같다. 둘 만의 거짓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둘 만의 판타지를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보면 우스꽝스럽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이해되고 공감되며 그것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며 서로만 아는 진실(거짓)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이다. 사랑은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이다.


진실된다는 건 둘만 아는 거짓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서로 거짓을 만들며 사랑을 키워간다. 사랑이 깨지고 나면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 거짓을 진실로 믿어주는 단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그래서 거짓이 되어버린다. 떠나간 사랑을 부정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둘 만의 거짓 속에 머물던 때가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면 우리가 진실보다는 거짓을 더 믿고 싶어 함이리라. 사랑을 진실되게 혹은 거짓되게 하는 것은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믿음이 거짓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너야”

“난 평생 너 하나만을 사랑할 거야, 우리 평생 함께하자”


사랑할 때 우리가 연인에게 하는 달콤한 말은 진실보다는 거짓에 가깝다. 왜냐 이건 확률적으로 따져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일은 알 수 없고 변수도 너무 많다. 감정과 느낌은 계속 변하고 당신이 눈을 떴을 때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을 먼저 떠올리거나 목이 타 물을 찾는 날이 연인의 얼굴이 먼저 떠오릴 날보다 더 많을 수밖에 없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말에 감동받고 그 말에 상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키워간다. 웃기지 않은가? 뻔한 거짓말을 듣고도 사랑의 감정이 생겨난다.


“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너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낼게”

“난 평생 너를 사랑할지 확신할 수 없지만 너와 함께 있는 시간엔 꼭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게”


나는 위에 지킬 수 없는 전자의 거짓말보다는 차라리 현실적으로 표면적으로 참과 거짓이 확실히 구분되는 후자를 선호한다. 그래서 나는 이성 앞에서 장담하는 듯한 혹은 세상을 다 가져다 줄 듯한 로맨틱한 말들을 잘하지 못한다. 당장의 상대의 기분과 감정을 위해 이후에 내가 지키지 못했을 아니 지킬 수 없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지만 우리는 전자의 경우를 지키지 않았다고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진 않는다. 왜일까?


“거짓말은 순수하게 영혼의 이상적인 언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우리는 거짓말을 통해서만 진실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랑이 판타지인 이유이다.

사랑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 속에 존재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현실의 일들을 잊어버리고 딴 세상에 머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이상 속에 머무는 기분과 그 느낌이 너무 좋기 때문에 계속 이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다.

라붐 [Reality] 중에서

사랑에 빠진 건 거짓 속에 갇힌 것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서로가 꾸며낸 거짓말 속에 서로를 가둬두는 것과 같다. 그럼 이건 더 이상 거짓이 아닌 둘 만의 진실이 된다. 우리가 사랑에 빠진 연인의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북해한다면 우리가 이런 사랑에 익숙하지 않음이고 이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으며 그래서 공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와 생각들로 가득 찬 사람은 이런 판타지가 숨 쉴 공간이 없는 자이다.


“거봐! 내가 말했지, 상처받을 거라고, 그건 사랑이 아니야 거짓이야”


누구나 사랑이 깨어지면 그것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결과가 아니다. 사랑은 과정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랑(이상)과 결혼(현실)을 반드시 연결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건 사랑은 결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던가.


인간(성인)은 이상과 현실을 연결시켜서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면 이건 판타지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랑을 결혼이라는 제도로 연결시켜서 사회를 유지한다. 가정이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 개념이 가정이 아닌 개인으로 바뀌어가고 있을 뿐이다. 고전적인 사람들을 이런 현상을 안타까워한다. 지금 많은 젊은이들은 이런 제도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랑의 믿음을 제도와 규범에 구속시켜는 방식으로 유지시키는 것에 대해. 물론 이건 인간이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도 하다. 그래서 이 사랑이라는 가치를 현실 사회에서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에 연결시킨다. 이성적인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사랑에 빠지면 이런 의무와 책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상대(타인)에게 헌신이라는 형태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사랑이 현실 속에서 지속되기가 어렵다.


사랑은 우정으로 지속된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우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판타지에서 깨어나면 고통의 현실이 기다린다. 판타지는 현실에서 생명을 잃는다. 우리가 판타지 드라마와 영화에 빠져드는 것은 더 이상 현실에선 판타지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 아니던가. 판타지를 추억하는 것이다.

장작불과 숯불

사랑을 현실에서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을 우정처럼 대해야 한다. 둘 다 믿음에 근거하지만 존재하는 곳이 다르다. 하나는 이상 속에 또 다른 하나는 현실 속 존재한다. 사랑은 이상 속에서 생겨난 믿음이 현실에서 변형된 형태로 지속 유지되는 것이다. 이건 마치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이 이젠 숯불이 되어 그 열기를 계속 품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다. 숯불은 알다시피 바람을 불어주면 또다시 붉게 열기를 올리며 불이 붙는다. 이건 장작이 활활 타올랐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활활 타오르지 않았다면 이런 뜨거운 열기를 품은 숯불이 될 수 없다.


거짓은 진실로 둔갑한다.


둘이 사랑에 빠져 있을 땐 누가 뭐라 해도 상대가 말한 모든 거짓은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야만 그 사랑이 커져가기 때문이다. 이 실현될 수 없는 거짓들이 모여서 둘 만의 이상세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 거짓이 서로에게 알 수 없는 믿음을 가져다준다. 만약 이 진실 혹은 거짓이 사회적으로 혹은 대다수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 즉 도덕적 혹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행위라면 둘의 사랑은 위험해진다. 하지만 그 둘은 그들만의 판타지에 빠져 있기에 그것을 인지할 수 없다. 둘에게 옳은 것이 대다수에게 옳지 않은 경우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건전한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선한 양심을 바로 잡아줄 공동체(타인)가 필요하다.  

여느 부부의 일상

“여보, 나 왔어요”

“오늘은 늦으셨네요? 저녁 드셔야죠”

“어 그래 아이들은?”

“먼저 먹었어요,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여느 부부의 일상적인 대화처럼 보이지 않은가? 아니다 이건 두 꼬마 아이의 대화이다. 정확히는 작은 남녀 꼬마아이가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거짓이다. 아이들은 부부도 아니고 결혼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거짓말을 하며 논다고 꾸짖지 않는다. 이건 아이들이 세상을 배워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배워간다. 우리는 이걸 흉내 혹은 모방 혹은 더욱 긍정적인 상상이라는 단어로 달리 표현한다. 모든 배움과 학습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하늘을 나는 사람이 될 거예요”

“나는 별나라에서 가서 살 거예요”

“나는 인형에게 마음이 생기게 할 거예요”


아주 어린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이런 거짓말들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거짓이 아니다. 왜냐 그들에게 꿈이란 현실을 배제한 세상을 뜻하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이 말은 진실이고 현실에선 거짓이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되고 머리가 굵어지면 이제 더 이상 꿈과 현실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마음을 넣는 아이와 우주를 나는 아이

“나는 F16 전투기를 조종하는 파일럿이 될 거예요”

“나는 안드로메다 성운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가 될 거예요”

“나는 로봇에 AI 알고리즘을 적용해 휴머노이드(humanoid) 만들 거예요”


현실에 존재하는 직업으로 바꾸어서 대답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꿈을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에 가둬 버린다. 이때부턴 동화책이나 소설같이 거짓(허구) 가득 찬 책에서 손을 떼고 현실의 지식과 사실과 정보로 가득한 기술서적과 논문들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현실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사회 구성원이 되어간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진실되고 사실적인 정보들로 자신의 가치와 실력을 인정받는다. 거짓과 허구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사회화가 되어가는 정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진실되고 사실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도록 유도한다. 웃긴 사실은 국가와 사회는 허구로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그 허구가 실존하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이성과 논리와 진실과 사실을 가르친다.


“우리는 거짓말과 허구를 수단으로 하여 우리들 간의 이해를 구축하는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순 속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인간은 성취와 성공을 위해 거짓과 허구를 이용해야 한다. 각종 지식과 기술서적을 통해 얻은 자격과 권위가 만들어낸 허구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통해 현실의 것(물질)을 채워간다. 이것을 남들보다 좀 더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한 자들은 거짓을 이용해 진실을 만들어 낸다. 정확히는 거짓(허구)에 믿음을 불어넣어 진실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크리에이티브 아니던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최초의 무언가를 만들고  되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나는 지금 세상을 이해한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을 진실로 믿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The Book of Disqu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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