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가에게도 인간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수동적인 저항을 유지했다. 국가는 나를 오직 행동하는 개체로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행동하지 않는 이상, 국가는 나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요즘 헷갈린다. 국가와 사회(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국민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가와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런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다가 든 생각이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르는 것이지 그것이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것과는 다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을 움직이는 것은 권력과 돈 그리고 명예 같은 것이 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잠깐 뜨끔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워도 이후에 올 돈과 권력과 명예가 보장된다면 그 길을 선택한다.
내가 만약 이 글을 완성하고 업로딩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하게 된다면 국가와 사회를 움직이는 누군가에겐 불편하고 또한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국가의 공권력과 사회의 공적 시스템을 이용해 나를 차단하고 가릴 수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국민 개개인은 국가와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물론 개개인의 생각과 의견을 모두 고려하며 국가와 사회를 운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개개인이 뭉치고 하나의 소리를 내며 그 숫자가 늘어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과거 한국은 그런 일을 경험했다.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한 번 당하는 걸 본 사람도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싸움은 모든 것을 뚫을 듯한 창과 모든 것을 막을 듯한 방패의 싸움처럼 승자를 가릴 수 없다. 피곤하고 지루하다. 그 사이 사람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만 간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져나간다'는 말이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겠다.
페소아도 때론 그런 심정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페르난두 페소아 (1888~1935)
글은 안에서 밖으로
나는 나를 드려다 보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글을 오래도록 쓰다 보면 자신(내면)을 드려다 보던 글이 세상(외부)을 향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를 통해 타인을 알아가는 것이 글쓰기이다. 자신을 많이 알면 알수록 세상에 대한 관심 또한 증가한다.
페소아의 글이 그렇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글처럼 보이지만 그의 글은 외부세계를 냉철하게 비판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세상의 시스템 속에 섞여있으면서도 세상을 관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비록 세상에 섞여 살아갔지만 섞이지는 않았다. 섞인 것처럼 보였을 뿐. 그는 맨손으로 저항하지 않으며 저항하는 무저항 운동을 하고 있었다. 문학이라는 허구로.
표현의 자유(문화예술)의 탄압
과거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은 모두 그러했다. 자신을 돌아보고 무언가를 깨닫고 그들이 했던 행동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깨달은 바를 알리고 전하고자 했다. 누군가는 앞장서서 누군가는 뒤에서 누군가는 숨어서. 이건 비단 정치적인 행위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각종 문화예술 활동을 포함한다.
한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예술은 그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런 문화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말과 글과 작품들을 보며 세상 뒤에 숨겨진 진실들을 하나둘씩 깨닫게 된다. 눈에 띄는 대중매체와 사회 시스템에 휩쓸려 다니면 그것을 알 수 없다. 만약 이런 문화 예술 활동을 차단하고 통제한다면 그건 분명 숨은 의도가 있음이다.
우리 대부분은 깊은 물속의 변화를 들여다보질 못하고 수면 위에서 이리저리 표류할 뿐이다. 그러다 물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진동과 폭발이 수면에 닿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렇게 표류하던 대중과 민중은 영문도 모른 체 물살에 휩쓸리고 최후를 맞이한다.
N포 세대, 탕핑(躺平), 사토리(サトリ)
청년이 행동하지 않는 이유
각종 언론과 대중매체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청년들을 바라보며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낸다. [일안하는 청년 40만]그들은 사회의 통계에 잡히고 싶지 않아 보인다. 국가총생산(GDP)을 낮추고 1인당 국민 소득을 낮추는 존재이고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존재이며, 아무런 부가가치도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의 주체가 되었다. 그 자리는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이 빠르게 대체해 나가고 있다. 이건 대한민국이 이제 다민족 이민국가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건 막을 수 없는 세계화의 흐름이다. 이미 여러 유럽의 선진 국가들이 겪어온 과정이다. 그것 때문에 많은 사회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는 인간이라는 노동력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제 최저시급은 후진국에서 유입된 노동력을 위한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최저시급은 외국인과 내국인을 차별할 수 없다. 인간은 신 앞에 모두 평등하다. 그걸 따라서 인간은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기본법을 내세운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그걸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믿지만 받아들일 순 없다. 왜냐 그들은 그들보다 비싼 기회비용(양육,교육)을 치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생각한다.
이곳 호주에도 이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백호주의(백인우월주의)가 존재한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이 땅을 가장 먼저 침략했고 점령했으며 그 소유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주권자가 되었다. 주권자들이 이민자들에게 밀려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민자는 죽기 살기로 살아간다. 주권자보다 더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국가가 역동적이고 다이내믹하다. 국가의 역동성이 거기서 창출되기 때문이다. 땅의 소유자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로 자산을 불려 간다. 땅과 집(부동산)의 가치가 상승하는 이유이다.
예수 (Jesus)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손에 무엇이라 가진 자는 더욱 받게 될 것이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조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 [도마복음] 41장 -
도마복음을 비롯해 공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모두 이런 말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결국 늦게 태어난 자 그리고 날 때부터 가진 게 없이 태어난 자는 결국 가진 자들의 자산만 불려주는 노동자의 존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성경 속 진리를 깨달은 모양이다. 그걸 깨달은 자는 내가 가진 게 없다면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건 불행이라는 것은 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부모들이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모두 자녀에게 쏟아붓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게 아이를 낳은 부모는 죄인이 되지만 그것이 죄인지 모를 뿐이다.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의미가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세상이 점점 인간의 존재를 부인해 가는 세상에 인간의 탄생이 인간에게 고통만을 가중시키는 행위가 죄을 영속시키는 것은 아닐까. 부모는 비록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지만 그들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죽고 나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갈수록 각박하고 고통스러워진다. 부모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아이를 탄생시켰지만 아이는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짊어질 수 있다. 이건 아이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복된다. 죄가 반복된다. 신은 인간을 이런 죄의 굴레에 가둬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난한 아이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면 언제나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들 아이를 보며 미소 짓는 것과는 다르다. 이건 기쁨의 미소 라기보다 연민의 미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와 어른들이 나와 같이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자신들이 하는 생각과 행동에 조금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진정으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자녀가 잘 먹고 잘 입고 성공하기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갈 세상이 좀 더 인간다워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민의 차단 이유
한국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 미국과 호주 캐나다등의 다민족 이민 국가가 거쳐온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지금 경험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제조업과 건설업 중심으로 발전한 국가의 특성상 이 현상을 절대 피해 갈 수 없다. 제조업은 언제나 값싼 노동력이 기업 경쟁력의 기반이고 기업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이 과거부터 왜 임금 인상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지는 이와 연관이 크다. 한국의 과거 단골 뉴스는 언제나 회사와 노조와의 대립이었다. 이것이 보수와 진보의 시작이다.
이 끝나지 않은 줄다리기는 국가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은 저가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선민의식을 탑재한 선진국의 자녀들은 그런 노동력이 되길 거부한다. 하지만 업무의 자동화는 AI를 이용해 고임금의 질 좋은 일자리까지 위협하고 있다. 가운데 끼어있는 국적인구(Citizenship Population)의 청년들은 갈 곳이 없다. 최저 시급을 받으며 해외 이주 노동자와 같은 등급으로 전락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질 좋은 일자리를 얻기는 하늘에 별따기가 되어버렸다. 그런 청년들이 해외로 떠나간다. 하지만 이제 해외 다른 선진국들도 모두 자신의 국경을 닫아버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민자(저가 노동력)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국경 넘는 불법 이민자 (생존이 우선인가? 준법이 우선인가?)
계산을 때려보니 그들이 국가에 가져다 줄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 이제 AI기술이 보이는 형체를 가지기 시작하며 머지않은 시점에 육체노동(피지컬 노동)도 이 AI 자동화를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단순 노동력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노동은 이제 임금이 없는 (AI) 로봇 노동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말이다. 비용이 거의 없는(물론 전기요금과 로봇 유지보수 비용은 필요) 노동력이 탄생한다.
그러므로 인권을 가진 노동력의 유입은 앞으로 그들이 늙어서 치러야 할 국가적 비용(보호와 케어 서비스)이 더 크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나긴 노후를 책임져야 할 국가의 요양의료의 서비스 비용이 더 크다는 말이다. 이제 앞으로 다른 선진 국가로의 이민은 고부가 가치의 인력과 아주 큰돈을 짊어지고 들어올 투자 이민만 받아들이지 않을까?
부익부 빈익빈
이민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갈 수밖에 없다. 국가와 사회는 냉정하다. 겉으로는 인권과 인간의 존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와 사회는 그것을 구성하는 인간을 단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으로 여긴다. 그것이 국가와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그런 기분을 최대한 느끼지 못하도록 하면서 국가와 사회의 부와 경쟁력을 제고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국제사회의 불안과 강대강의 구조는 일단 내 것부터 챙겨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세계는 이제 국수주의(國粹主義, nationalism)로 나아가고 한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마태복음] 24장 12절 -
세상에 사랑이 사라져 가는 이유이고 사랑이 식으면 그 자리는 언제나 미움으로 채워지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이지만 실재하는 인간은 그 국가와 사회에 의해 그 존재를 부인받는 모순에 빠져든다.
생명의 탄생은 기쁨인가 슬픔인가
원죄의 의미
이제는 가진 게 없다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왜 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지를 너무도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탄식만 쏟아지는 이유이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똑똑하고 우월하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산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서 인간을 통치한다. 그리고 그들은 갖은 위선과 가식으로 무지한 인간들을 선동하고 현혹하며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에만 급급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계속 그런 무지 속에 머물도록 계속 바쁘게 움직이고 눈에 보이는 세계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아가도록 한다.
“국가는 단 한 번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마도 운명의 도우심이었으리라”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는 그나마 행복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현대 사회는 생각만으로 누군가를 처벌하진 않는다. 물론 알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페소아는 그것에 만족했는지도. 오랜 옛날에는 생각(사상, 교리등)만 달라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만으로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순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차단하고 부적절한 생각으로 몰아갈 순 있다. 모든 활동과 생각이 온라인상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세상은 그렇게 생각과 행동을 감시받고 통제받을 수밖에 없다. 페소아는 다행히도 그런 시대를 살진 않았다.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자는 모든 것을 온라인 속으로 집어넣으려 할 것이다. 그것만이 세상(인간)을 통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것은 작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다...(중략) 작가가 저항하는 것은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의 운명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도 작가가 된 모양이다. 이렇게 저항하는 글을 쓰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행동하진 않는다. 무저항의 저항이다. 최소한의 저항이다. 할 수 있는게 이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페소아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나는 이제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행동(부가가치를 생산하는)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읽고 쓰며 생각만 하는 행위는 국가와 사회의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이건 국가와 사회가 나에게서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처럼 이런 사람이 늘어난다면 지금 국가와 사회는 문제가 있음이리라. 단지 국가와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문제로 여길 뿐이다. 문제의 본질을 모르는 자들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