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Aug 11. 2024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스무 번째 이야기 -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누군가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이미지를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상, 즉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사랑한다는 것은 행위인가 아니면 생각인가? 아니면 생각이 행위가 된 것인가? 사랑을 실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상대와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생의 동반자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예전에 연애를 할 때처럼 상대를 상상하며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을 함께 하는 동반자는 매일 마주치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뇌는 더 이상 그 대상을 머릿속에 떠올려서 이미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현실 속 일상의 사물처럼 익숙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상대를 상상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런 상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 정신적 사랑의 대상을 육체적 사랑의 대상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닐까.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면 이전의 정신적인 쾌락과 느낌을 섹스라는 육체적 행위를 통해 사랑과 관련된 호르몬 분비(도파민, 옥시토신, 엔도르핀 등)를 더 증가시켜 서로의 사랑과 친밀감을 확인하려 한다.


 물론 이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육체적인 사랑이 관련 호르몬 분비를 더 증가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이다. 서로의 정신적 끌림은 예전 같지 않다. 익숙함 속에서도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의 육체를 이용해서 그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성적인 사랑을 할 때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성적인 사랑이 아닐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미지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섹스는 암수로 나눠진 모든 동물이 지향하는 육체적 행위이다. 이건 분명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생명의 본성이다. 하지만 우리가 섹스에 임할 땐 그것보다는 섹스가 가져다 줄 즐거움과 호르몬 분비의 변화로 인해 얻는 그 짜릿한 기분을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행위는 오로지 상대의 육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성적인 유혹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다. 세상에 매춘과 성상품화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내가 혼인하지 않은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홀로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나 만일 스스로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정욕에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습니다”


- [고린도전서] 7:8~9 -


알다시피 교회는 보수적인 집단이다. 교회에서 섹스에 관해서 얘기한다는 것은 마치 금기처럼 여겨질 정도로 민감하다. 나도 오랜 시간 교회를 들락거렸지만 이런 성적인 문제에 관해서 앞에서 드러내 놓고 얘기하는 목사나 성직자를 찾아보긴 힘들었다. 성스러운 것은 성적인 것에 불성실하다.


하지만 사실 이 성적인 문제는 인간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쉽게 논하지 못하는 것은 이 문제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런 이성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누군가는 그곳을 떠나야 간다.


정신과 육체가 합일될 수 없는 사랑은 성스러운 공간에선 허락되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성경의 시작이 두 남녀(아담과 이브)의 갈등이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남녀의 교합은 쌍방향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다. 음양이 섞이고 그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그래서 교회라는 공간은 남녀가 쉽게 연애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힘들다. 이건 현재 청년 남녀가 생각하는 연애에 대한 가치관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유연애 시대이다. 많은 상대를 만나고 사귀어 보고 그중에서 나와 가장 적합한 상대를 찾는 것을 연애의 과정처럼 생각하는 시대이다. 교회라는 보수적인 공간은 그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만약 사귀었다가 서로 안 맞으면 어떡해요?”


이것이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다. 연애와 결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요즘 남녀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 맞지 않으면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의 남녀가 동의할 것이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자유로이 연애하고 사랑하는 시대에 서로 맞지 않는 남녀가 잠깐 눈 좀 맞았기로서니 그것 때문에 평생을 함께 하는 고통을 떠안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교회의 결혼

연애는 이상, 결혼은 현실


연애는 이상적인 것이고 결혼은 현실적인 것이다. 이상과 현실이 이어지길 바라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갈망하지만 세상은 디스토피아로 향한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이상과 현실의 합일을 지향하는 성격의 집단이다. 그래서 이것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교회에 대한 적잖은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목사는 딴 세상에 사는 사람 같다. 현실에 몸담고 살지만 이상만을 바라보며 먹고사는 것이 직업 아니던가… 하지만 세상의 현실에 섞여 사는 우리는 그것이 가장 어렵다.


교회는 세상에 수많은 옵션을 가진 이성들 속에서 자신과 맞는 자를 찾는다는 개념보다는 우연히 만나 인연이 된 이성과 서로 맞춰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성격과 생각과 습관이 다른 둘이 인연으로 엮여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서로를 내어주는 방식의 사랑을 하길 바란다.


속된 말로 어른들이 종종 하는 ‘안 맞아도 맞춰가며 살아라’이다. ‘그놈이 그 놈이다’라는 말처럼. 그래서 교회는 연애를 시작하면 결혼으로 이어져야만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연애에 임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문제이다. 부담을 안고 시작하는 연애는 서로를 알아가는데 걸림돌이 된다. 서로 마음의 문을 열기가 어렵다. 내 마음을 열기 전에 상대의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잘못된 방식을 선택한다. 상대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선 내가 먼저 열어야 하지만 우리는 열었다가 상대가 아니면 어쩌지라는 걱정과 불안을 먼저 떠올린다.


미련 때문에


오랜 시간 지내며 교회라는 공간이 삶의 일부가 되었는데 한 명의 이성이 만든 감정이 이 삶의 공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익숙해진 삶의 일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남녀가 가정을 만들고 합일을 이루는 곳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장 힘든 공간이 되어버렸다. 모순이다. 그래서 성스러운 것과 성적인 것은 분리된다.

성적 관계

“수음(섹스) 행위는 혐오스럽게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사랑의 가장 논리적 표현인 셈이다. 수음하는 사람은 뭔가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도 않고, 스스로 속이지도 않는 유일한 자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정욕에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톨릭)에서는 신부님과 수녀처럼 수도사의 길을 걷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정욕을 절제하는 삶을 택한 자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아는 바울은 아마도 그 고귀해지려 하는 노력 뒤에 커져가는 욕망(욕정)에 스스로가 잡아 먹히게 될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억압할수록 강해지는 것이 욕정이다. 욕정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그것을 적절히 해소하며 조화와 균형을 찾는 것이 더 낫다고 본 것이다.


결혼은 그런 욕정을 해소하며 그 과정 속에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다. 부부가 서로의 벌거벗은 모습을 바라보며 육체적인 관계 속에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현실에 통제되어 있던 감성과 욕정을 오직 한 사람 앞에서 거짓 없이 드러낸다.


이런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행위(육체가 반응하며 생겨나는 호르몬 분비의 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어른이 된 몸은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상상과 몽상만으로 그 믿음과 사랑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만 먹고사는 현실의 문제에 더 오랜 시간 몸담고 살아야 하는 어른에게 이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물리적(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신체에서 발생하는 화학적(호르몬) 변화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 기분과 감정을 느껴야만 한다. 그것만이 사회적으로 건강한 부부로 살아갈 수 방법이기 때문이다.


육체(욕정)를 초월한 사랑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자는 정욕보다도 더 큰 이상을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정욕이 이것을 흔들 수 없는 자들이다. 과거 성인들과 위대한 자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과 관련 있다. 그들은 분명 욕정보다 큰 대의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욕정이란 풀고 또 풀어도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도돌이표 같은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 내에서 이성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레 정신적인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시간과 시선이 지속되며 들어오는 이성의 모습은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지를 만들고 쌓여가는 이미지는 연속되는 영상처럼 머릿속에 재생된다. 그럼 이 정신적 사랑을 실현(현실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다. 이 욕망은 상대에게 육체적 사랑을 갈구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건 사랑이 정신에서 육체의 합일로 나아가려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순탄치 않으면 갈등이 생겨난다.


사랑이 스며들면 우리는 상대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상기하며 사랑에 빠져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럼 우리는 머릿속에 떠올린 이성의 모습을 계속 현실에서 재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가 좋아하는 이성을 자주 만나고 함께 하고 싶은 이유이다.


우리는 이 감정을 상대방이 나에게 만들어 준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이건 자신이 상상하고 만들어낸 이미지를 통해 생겨난 감정이다. 최초 이성에 대한 호감과 사랑의 감정은 상대가 만들어서 내게 가져다준 것이 아니다. 이건 오로지 자신이 상대를 보고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이고 이미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성과의 바라보는 시선과 시간 속에서 그 감정과 대상에 대한 이미지는 다양해지고 입체화되며 리얼하게 변해간다.


그럼 우리는 이 호감과 사랑의 감정을 이성에게 직간접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머릿속에 가졌던 이미지와 느낌과 기분을 현실의 상대에게서 느끼고 확인하고 싶다. 상상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이건 사람마다 표현의 방식에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가진 감정이 쌍방향이란 확신이 앖기에 보통은 간접적으로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려 한다. 상처와 실망 같은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한 방식을 이용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상대의 감정이 나와 같은지를 가늠하려 한다.


누구나 좋아하는 상대가 생기면 그 상대와 함께하는 순간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 상대와 연인이 되면 일어날 일들을 미리 상상하는 것이다. 그 상상의 과정이 우리를 즐겁게 다. 문제는 이 상상을 현실에서 재현하려는 과정 속에서 벌어진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확인하는 순간 고통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상은 자유지만 현실은 언제나 구속이다. 상상대로 실현되는 현실은 없다. 상상은 언제나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_ 고흐

이상과 현실이 이어주는 것 : 예술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는 자는 상상을 현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는 자들 아닐까? 우리는 이것을 예술이라 칭한다. 상상의 느낌을 특정대상이 아닌 불특정 대상을 향하는 것이다. 상상의 보편화 과정이라 해야 할까? 예술가들은 자신의 상상을 개인적인 현실로 옮기려는 과정은 상상이 깨지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의 사랑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는 그 상상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정신적으로 사랑했던 대상이 현실의 육체적 사랑까지 모두 이루었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 느꼈던 사랑과 현실의 사랑은 분명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상상만큼 이상적인 현실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현실의 사랑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상상 속 사랑을 꿈꾸게 된다. 이제는 현실의 사랑과 이상의 사랑이 완전히 분리된다. 아내가 남편이 아닌 드라마 속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남편이 게임 속 캐릭터에 빠지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이건 타인이 만든 상상(예술, 창작, 콘텐츠)을 통해 대리 만족하는 과정이다. 보이는 것(이미지와 영상) 없이 스스로 상상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텍스트로 상상하는 자


나는 글을 읽으며 상상한다. 글을 통해 전전두엽에 이미지와 영상을 떠올리고 스스로 사랑하는 느낌과 미워하는 느낌과 슬퍼하는 느낌을 꿈꿀 수 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글을 읽고 감동하고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다. 이미지와 영상만으로만 그럴 수 있다면 동물과 다를게 무엇인가. 감각기관으로만 느끼는 것이 동물이다.

텍스트로 상상하는 자

인간은 이 상상의 사랑, 즉 이 정신적인 사랑을 각종 매체(소설, 드라마, 게임등)를 통해 끊임없이 느끼고자 한다. 하지만 이 느낌을 매번 현실의 육체적 사랑으로 연결시킬 순 없다. 이건 사회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인간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는 무언의 수많은 약속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을 지켜고 살려는 노력만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수많은 남녀는 이런 사회적 도덕적 관습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싶어한다. 사회와 시선 때문에 자신을 구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즉 욕망을 절제를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이 생긴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각종 남녀 간의 치정 문제로 인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건 사람들이 상상의 영역에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이 사라진 어른들은 현실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 헤맨다. 상상은 그 상상 속에서만 자유롭고 이상적이지만 현실에서 그것을 재현하는 과정은 구속과 제약 그리고 고통이 수반된다. 그걸 알지만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 상상이 사라진 자리는 현실의 욕망충족이 대신한다.


상상이 스스로 실현되면 예술이 되고 상상이 타인에게 투여되면 욕망이 된다. 욕망이 실현되면 또 다른 욕망이 나타난다. 그래서 상상은 승화되고 욕망은 되풀이된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상상)들을 통해서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상상할 수 없기에 타인을 통해서 그것을 느끼고 지속하는 방법으로 사랑한다. 타인이 만든 상상(예술)을 보고 타인의 육체를 통해서…


하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을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다.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The Book of Disquiet in Mcdonald

글짓는 목수(유튜브 계정)

https://youtu.be/IsDiaarA53A

이전 21화 무저항의 저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