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에는 세 가지 실존 영역이 있다. 바로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신앙)적 실존이다. 심미적 영역은 즉시성(Immediacy)의 영역이다. 윤리적 영역은 요구(requirement)이다…. 종교적 영역은 성취(Fulfilment)의 영역이다”
- 키르케고르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 Stage on Life’s way (1845) ]중에서 -
당신은 지금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당신은 현재 비존재로 향해가고 있는 중이다. 존재에서 비존재로 향하는 것은 삶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우리가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개념 속에 갇혀있는 것을 전제한다.
생성과 소멸은 언제나 이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시간이 없다면 세상의 모습은 사진 속에 정지된 스틸 샷과 같다. 순간의 장면은 존재와 비존재만 나타난다. 하지만 시간을 가진 영상은 존재에서 비존재로 비존재에서 존재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간은 소멸로 향해가는 것을 즐기면서 소멸이 다가옴을 슬퍼하는 부조리(모순)한 존재이다.
만약 당신이 이 부조리(모순)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키르케고르가 평생을 연구하며 깨달은 인간이 나아가야 할 궁극의 실존에 다다른 것이다.
키르케고르 (1813~1855)
불안은 공백의 시간과 함께 찾아든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생긴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 행위(정신적 - 몰입, 육체적 - 집중)를 지속하는 동안에는 그 어떤 불안도 스며들지 않는다. 온전히 그 현재에 머물러 있다. 그 시간 속에 머물 때가 가장 평안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이것을 알게 된 것이 나의 삶에서 얻은 가장 큰 지혜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몰입과 집중의 시간에서 벗어나 현실을 대면하면 권태와 불안이 밀려든다. 최근 이 불안과 권태에서 벗어나려 몰입과 집중의 시간을 계속 늘려가는 일상을 지속했다. 그랬더니 몸이 조금씩 피폐해짐을 느꼈다. 누적된 피로와 정신적 과부하 때문일까? 며칠간을 심하게 앓아누웠다. 열병을 앓았다. 몰입과 집중의 시간이 강해질수록 이것에서 벗어나는 시점에 찾아드는 권태와 불안 또한 더욱 강해지더라. 결국 난 성취(목표)를 향한 갈망 때문에 숨 가쁜 일상(일과)을 만들어 자신을 갈아 넣는 오래전 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더라. 목적 없는 공부가 주는 환희가 아닌 쌓아가는 공부가 가져다줄 성취에 눈을 돌린 탓이리라.
[불안의 서]
나는 한 동안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매일같이 읽으며 그 불안을 가만히 드려다 보았다. 그런데 너무 오랜 시간 불안을 드려다 보았기 때문일까? 그 속에 머물 땐 불안이 느껴지지 않더라 그런데 그곳에서 빠져나오면 또다시 불안이 찾아들었다. 그럴 때면 다른 것에 몸과 마음을 재빨리 옮겨야 했다. 노동과 운동으로. 그럼 그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리고 노동과 운동으로 환기된 몸과 마음을 다시 몰입의 시간으로 옮기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불안과 권태의 빈도 줄였지만 그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불안(불안의 서)을 관찰하길 잠시 멈추고 다른 곳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러다 만난 책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낯선 여행지에서 한 달 전의 독후감을 퇴고하고 있다.
Ubud in Bali
[왜 살아야 하는가](원제 : The Meaning of Life and Death)는 10명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통해 얻은 사유를 책으로 엮었다. 산책 간에 이 책을 읽다가 내가 최근 겪고 있는 권태와 불안의 실마리를 깨닫게 해주는 또 다른 사상가를 만났다.
실존주의 사상가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어떻게 실존하는 것이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알려준다. 나는 책을 읽고 내가 이 절망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행위가 아주 힘든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방법은 내가 페소아를 통해서 알게 된 방법이었으며 그 방법이 아주 힘든 방법임을 알면서도 계속 지속한 것은 그것이 고귀하기에 힘들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는 계속 분주하게 살아감으로써 절망과 그 기저에 깔려있는 공허함을 무시하려 애쓴다. 하지만 결코 절망을 물리치지는 못한다. 그저 주의를 돌릴 뿐이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의 첫 번째는 심미적 실존이다. 이 실존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실존하는 방식이며 이 실존은 두 가지의 영역으로 나눠진다. 내적환경(정신적)과 외적환경(육체적)이다. 대부분의 지적 혹은 이성적으로 소양을 갖춘 자들은 이 심미적 실존의 최적화된 균형을 유지하며 살려고 한다. 이건 이전에 내가 [불안의 서]를 읽고 쓴 독후감[가장 고귀한 3가지의 삶] 중에서 3번째의 페소아가 살아온 삶과 유사하다. 다만 페소아가 다른 일반인들과 다른 점은 그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했다는 것이고 일반인들은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1888~1935)
인간이 이상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이 이 세상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며 우리는 이 과정이 내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페소아는 이 과정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인물이다. 왜냐 이상을 현실화시키는 과정 속에 수많은 인간 세상의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허언증(리플리증후군) 환자들로 넘쳐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건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는 무엇이 되려면 그것이 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라는 말과 상충한다. 가식과 위선 그리고 성공과 성장이라는 완전히 다른 것 같은 단어도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이 차이는 결론적으로 이 행위가 누군가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자신의 성공과 성장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행위에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다. 페소아는 아예 이것을 원천 봉쇄해 버린 자일지도. 현실의 자신은 현실에 맞춰 이상 속 자신은 이상 세계(글쓰기)에서 두 가지의 삶을 분리해서 향유한 것이다.
1. 삶을 즐긴다는 것 (심미적 실존)
페소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심미적으로 즐긴 자이다. 이건 두 세계(정신적, 육체적)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과 조화를 이룬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을 말한다. 키르케로르는 이런 균형을 이룬 심미적 생활양식이 일반적인 인간들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실존이라 말한다. 이 두 가지가 적절히 섞여서 조화와 평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 유혹과 방해가 너무 많다. 어찌 보면 페소아는 현실의 삶에서 가장 그것을 완벽하게 유지하기 위해 이상과 현실을 분리시켜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 두 가지의 영역이 섞이면서 평형을 이루는 삶을 지향한다. 이상의 현실화를 지향한다.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삶을 균형적이고 조화롭게 즐긴다는 말이다.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정신적인 즐거움을 찾으며 다른 시간에 운동과 산책과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며 육체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건 사람마다 방법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또 다른 형태의 정신적 행위와 육체적 행위를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심미적 균형
“심미적으로 살다 보면 우리는 금방 권태를 느끼며 따라서 삶의 목적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야 한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문제는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정신적 육체적 만족을 주는 새로운 것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태와 공허가 계속 찾아든다. 이건 이 즐거움의 강도와 빈도를 올려야 함을 의미한다. 쾌락은 더 큰 쾌락을, 욕망 충족은 더 큰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새롭고 더 자극적인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산업자본주의는 재화와 서비스를 향한 욕망을 통해 발전한다. 육체적 편리와 정신적 쾌락의 한계치를 계속 늘려간다.
더 강력한 즐거움을 얻고 또 그 두 가지의 즐거움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이것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극으로 치닫으며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그래서 심미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사는 것은 아주 어렵고 힘들다. 세상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현대인들은 바로 이것의 균형을 이루며 살려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불가능의 가능을 지향한다. 만약 이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산다면 심미적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건 세상이 원하면서 또한 자신이 만족하며 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자는 자신의 이상과 삶의 내용과… 진정한 본성을 어떤 식으로인가 자기 바깥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부재한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문제는 이 방법은 모든 행복을 외부(타자, 사물, 서비스 등)에서 얻어서 채우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들로 느끼고 생각하는 삶은 결국 자신이 이것들에 가려져 자신을 영원히 찾지 못하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실존의 모든 삶이 자신이 없는 부재의 삶을 살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러 극도의 공허함과 후회를 느끼며 죽는 것이다. (페소아는 적어도 반쪽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았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심미적인 실존은 ‘악’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심각한 ‘무관심’이라고 보았다. 문제는 이것이 무관심인지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그는 심미적 실존에 다른 실존들이 더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어쩌면 현대의 지성인들은 이 심미적인 삶을 위해 자신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심미적인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여럿이 될 수 있는 어떤 인생 관계에도 들어가지 않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 말은 이런 균형은 ‘독신’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축복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심미적인 삶을 완전히 포기하며 산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원시수렵 시대로 돌아가면 모를까. 최소한의 심미적 생활양식을 유지하되 또 다른 실존으로 나아가야 한다.
“삶에서 내가 맡은 과업이 있고 당신이 맡은 과업이 있는 셈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의 소명을 지니고 있으며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심미적 실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의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이건 칸트의 철학(진선미의 철학_서평 참조)에서도 언급한 부분이다. 두 번째 선의 실천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칸트는 이성으로 진리를 깨닫고 그다음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봤다. 키르케고르도 이 부분에서는 칸트의 철학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 다음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스스로가 답을 하고 그 답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두 번째의 실존이다.
2. 삶을 선택한다는 것 (윤리적 실존)
윤리적인 실존, 즉 성공과 욕구 충족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존의 의미를 윤리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다. 인간으로 선한 양심에 근거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일이 타인과는 확연히 구분된, 즉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획일화된 그런 류의 활동이나 행위는 아닌 것이다.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이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온갖 심미적인 유혹들에 가려져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설계된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혹자는 얘기할 것이다. ‘성공하고 돈 벌어서 가난한 자를 돕고 공익을 위해 살고 할 수도 있다'라고 그것이 윤리적인 삶 아닌가’라고? 물론 틀리지 않다.
타인의 노동력을 통한 부(잉여, 부가가치)의 축적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조금 다르다. 이건 나의 견해가 포함된 것임을 미리 언급한다. 왜냐 우리가 사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의 의미는 타인의 노동력을 창출되는 가치보다 낮게 책정해서 생겨나는 복수의 잉여를 자신이 취득하는 과정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남들과 다른 생각과 행동의 기발함과 노력에 대해 자본적 보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산업자본주의 시장에서의 경쟁력 아니던가. 하지만 이건 모두 타인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시간과 노동을 내게 집중시켜서 부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결국 당신이 순수한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만을 투입해서 버는 돈이 아닌 잉여의 부를 획득하는 과정은 모두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한다는 말이 된다. 타인의 존재가 없으면 당신에게 부는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의 부는 타인의 존재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게 쌓인 부를 다시 타인에게 돌려주는 행위는 선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당연한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만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가장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역발상이다.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자들은 당연한 행동을 선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부를 얻은 자들은 사회 환원보다는 더 많은 부를 쌓는 것에 혈안 되어 있다. 그래서 세상이 양극화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리적인 영역에서 사랑이란 헌신을 내포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택’을 내포하기도 한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윤리적 실존은 결국 세상이 말하는 선부론의 개념이 아니다. 일단 돈부터 벌고 생각하자는 과거 한국의 경제발전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오히려 역효과만 클 뿐이다. 한국이 지금 양극화과 소외, 분열, 혐오로 가득 찬 사회가 된 것은 일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었던 결과가 아니던가? 선악(善惡)의 철학이 없이 선부(先富)의 철학이 그 위에 올라선 결과이다.
그래서 윤리적 실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선택’이 필요하다. 이 선택은 세상이 정해준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진정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세상에 그리 많이 의존하지 않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주권을 늘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이것을 우리는 ‘소명’을 따른다고 말한다. 소명을 따르는 삶은 타인이 보기에는 고달픔 삶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그 안에서는 불안과 권태가 스며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실존을 통해서 우리는 불안을 잊고 권태와 작별하게 된다. 다만 불편이 좀 늘고 권리가 좀 줄어들 뿐. 하지만 자유롭다. 정신도 육체도.
그리고 이런 윤리적을 실존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것에 반하는 또 다른 도전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윤리적으로 사는 한 우리는 이미 신성에 맞닿아 있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기독교 신앙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마지막 실존은 신앙에 맞닿아 있다. 이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임마뉴엘 칸트가 선행이라는 윤리의 의무를 말하며 그다음에 (선한) 예술의 세계로 나아가 대중적으로 그 선을 퍼뜨리려고 했던 것과 가장 다른 점이다. -칸트의 [진선미의 철학] 참조-
키르케고르는 그다음을 신앙의 영역으로 연결시켰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신앙(종교)의 영역이 좀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신앙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신앙은 부조리(모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한다. 모순에 대한 믿음이다.
3. 삶의 부조리(모순)에 대한 믿음 (종교적 혹은 신앙적 실존)
모순과 부조리는 누가 들어도 부정적인 느낌을 풍기는 단어이다. 모순과 부조리를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싶지만 사실 우리는 이 모순과 부조리 속에 살고 있다. 여기서 키르케고르의 기발하고도 신박한 발상이 이어진다.
영화 [길복순] 중에서
“모순 뒤에 진실을 봐라.”
- 영화 [길복순] 중에서 -
과거 나는 선행이 불행으로 변하는 경험을 에세이로 적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몸이 불편한 노인을 돕고자 했던 나의 순수한 선행이 그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반전의 상황을 경험했다. 그 노인은 차라리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나쁘고 힘든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인간이 의도치 않은 상황, 즉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으로 세 번째의 실존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인간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실존이라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네게 일러 준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 [창세기] 22:2 -
외아들을 제물로 삼은 아브라함
그는 성경 속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의 이야기로 이 개념을 설명한다. 내가 겪은 일과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상황을 윤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신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말은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다. 이것을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신은 윤리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겠는가? 인륜 도덕적으로 이건 살인 행위이이며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경 속 아브라함은 신의 말에 복종하며 자신의 아들을 번제(燔祭 : 제단에서 구워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바치려 했다. 미친놈이다. 그 미친놈이 우리의 조상이란다.
성경 속에는 그 선택을 하기까지의 아브라함의 심리적인 묘사와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의 그의 상태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분명 심리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으며 선택을 했을 것이고 그 실행 과정 또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하나님이 분명 다른 계획이 있으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행동을 가능케 했다. 이건 초월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인간 세상의 논리와 개념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군중에 맞서야 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되는 것, 선하다고 악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맞서야 한다. 군중에게서는 어떤 좋은 것도 나올 수 없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물론 이런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성경은 이런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믿음을 요구한다. 이 시대에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이 시대의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교와 신앙의 영역은 언제나 현실 너머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인간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인간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언제나 이상에 대한 희망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신앙적인 실존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건 바로 모순(부조리)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에 심취한 인간들을 보면 마치 미친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없이 선한 모습과 행동을 하다가도 깊이 들어가면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과 행동을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것까지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상식과 보편적 개념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누구나 아는 말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는 증거는 우리가 항상 계획과 목표를 세우며 살아가는 것 아니던가?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꿈꾸고 계획하며 살아간다. 이것 또한 모순이다.키르케고르는 이런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는 신앙적인 실존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실존의 모습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심미적인 세상 속에서 머물며 윤리적인 자신을 발견하고 선택하며 신앙적으로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실존하는 이유이며 목적이다.
나는 아직도 심미적인 균형과 조화만을 쫓고 있는 것 같다. 불안과 권태가 스며들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