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열다섯 번째 이야기 -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는 것은 최대치에 이르도록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고귀한 영혼 가진 자라면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는 인간으로서 가장 고귀한 3가지의 삶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그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 한 가지 방법으로 평생을 살았다. 이 세 가지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깨닫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안다고 해서 실천하긴 더욱 어려우며 그것을 전 생애에 걸쳐 지속하며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기에 가장 고귀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의 삶을 얘기해 보려 한다.
벌써 15번째 페소아의 독후감이다. [불안의 서]를 읽으면 영감이 끊임없이 샘솟는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장은 나에게 깊은 상념의 세계로 인도하는 마중물과도 같다. 이제 페소아의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며 그가 살아온 삶을 나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작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작가가 살아온 삶을 따라가며 사유하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나는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를 읽고 쓰는 독후감이 나의 회고록이 되어가는 듯하다.
요즘 칸트의 일상을 따라가며 산책을 하고 페소아의 문장 읽고 기록한다. 오후에는 과거 썼던 나의 글들을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영상 편집을 하면서 과거의 글들을 다시 읽는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에 과거의 기록을 다시 더듬으며 회상한다. 내가 쓴 글은 언제 읽어도 감회가 새롭다. 나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는 듯하다. 수많은 글들 속에서 무엇을 영상으로 만들까부터 시작한다. 내 머릿속에는 글을 쓸 당시 이미 모든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을 다시 떠올리며 그때의 그 이미지와 가장 흡사한 것들을 찾고 이어 붙이는 작업이다. 비주얼리제이션이다. 시간과 노력이 투입된다. 노동이다. 이젠 AI 기술의 발전으로 이 영상화 노동의 시간과 노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작가(Writer)와 감독(Director)은 하나가 된다. 나중에는 나의 쓴 소설을 내가 직접 영상으로 만드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현실에 구현해 내는 쪽으로 발전한다.
내가 생각과 기록을 멈추지 않는 건 미래에 AI에게 대체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일지도. 인간은 그 존재만으로도 고귀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오늘도 나의 존재를 증명하려 또다시 끄적여 본다.
“가치를 지닌 모든 영혼은 삶을 극단까지 몰고 가기를 원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여기서 페소아가 말하는 고귀한 삶의 첫 번째는 극단의 삶이다. 이건 체험으로 점철된 삶을 의미한다. 전 생애를 새로운 것들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이건 우리 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경험하긴 아주 어려운 삶이다. 이건 방랑자의 삶이다. 삶 전체가 여행인 자이다.
1. 체험과 방랑의 삶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삶)
인간은 여행하는 동물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그렇게 설계되었다. 원시 수렵 시절 인류는 먹이를 찾아 추위와 더위 그리고 천적의 습격을 피해 항시 이동하며 살아야 했다. 매일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며 살아왔다. 인류의 출현을 약 200만 년 전으로 보면 1만 년 전 농경생활을 시작하였으니 199만 년을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살았다는 얘기다. 우리의 유전자는 수렵 생활에 가장 최적화된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이고 러닝 머신 위에서 뛰면서 땀을 흘리지 않으면 병이 생기는 이유이다.
페소아는 이런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고귀한 삶의 한 가지 방식으로 생각했다. 정착하지 않는 삶, 마치 오디세우스처럼 방랑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고달파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여행을 해도 언제나 집(베이스캠프)이 있어 잠시 여행을 다녀와서 다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가야만 한다. 일상의 경제활동을 멈출 수 없다. 인간은 농경 시대와 산업 시대를 거치면서 수렵인에서 농경인 그리고 경제인이 되었다. 모두가 떠돌아다니면 국가도 사회도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다.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는 정착과 함께 성립되었다. 그럼 이 인생이 어떤 삶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소속이 없는 유랑인이 된다는 말이다. 현실에 머물지만 현실에 소속되지 않는 인간이다.
“난 로또에 걸리면 전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나는 우스개 소리로 로또에 걸리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는 말에 세계여행을 말하곤 한다. 하지만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유랑하려면 돈이 필수적이다. 경제활동을 멈추고 유랑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래서 나는 호주에서 6년의 시간 유랑과 노동을 병행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12번의 이사와 여행 그리고 땀 흘리는 노동을 이어갔다. 노동으로 돈이 좀 모이면 다시 여행과 사색을 즐겼다. 하지만 페소아가 말하는 극단의 체험으로 나아갈 순 없었다.
왜냐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방랑자가 되어 모든 체험 가능한 감각을 통해 산다는 건, 현대 사회에 소속되어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판 원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태초의 인류 형태로 말이다. 내가 예상컨대 이런 삶을 살게 된다면 아마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보고 느낄 수밖에 없음을 분명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페소아는 그것이 가장 고귀한 영혼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완전한 포기의 길, 완벽하고 엄격한 체념과 금욕의 길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두 번째의 길은 간혹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아니 요즘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스스로 금욕과 체념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들도 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이 길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2. 금욕과 체념의 삶 (의지와 이성으로 통제하는 삶)
전자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신앙인(종교 지도자)들의 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상의 것들에 관심을 끄고 영적인 평온을 얻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도 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세속에 살면서도 각종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지속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는 자들이다.
하지만 어디 세속의 유혹이 만만한가?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그저 종교단체(공동체)가 부여한 자격증을 가지고 겉으로는 그런 척하며 뒤로 욕망을 채우는 이중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영적인 삶을 살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베푸는 삶은 사는 진정한 신앙인은 선교를 하는 자들이라 생각한다.
기존의 자신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첫 번째의 페소아가 말한 방랑자의 삶(어중간한)과 금욕의 삶의 중간지점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완전히 극단적이지 않지만 두 가지를 병행하는 절충적인 삶은 세상의 유혹에서 멀어지고자 하고 낮은 곳에 사람들을 더 많이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럼 점에서 이런 삶은 주어진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세상의 유혹이 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초심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쉬울 수 있다. 왜냐 자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욕망을 놓을 수밖에 없는 체념의 상황에 자신을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세속의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영적인 금욕과 체념을 말한다. 나는 그게 과연 가능한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인간은 자신이 낮은 곳에 있을 땐 낮은 자들과 함께 하지만 자신이 높아지면 더 이상 낮은 곳으로 내려오지 않는 법이다. 인간은 예수가 될 수 없다. 다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가 있을 뿐… 그 노력은 어쩌면 내려놓음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일지도.
“세 번째는 완벽한 균형을 지키는 길이다. 절대적 조화의 한계를 최대치로 추구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 세 번째 삶이 페소아가 선택한 삶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남아공(더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청년이 되어 다시 포르투갈(리스본)로 돌아온 이후 남은 여생을 고국에서만 살다가 죽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는 더 이상 여행하지 않았다.
3. 현실과 이상 사이의 삶 (이성과 감성 사이)
사실 그는 여행을 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그는 몸은 리스본에 정착했지만 그의 정신은 세계 곳곳을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다시 말하면 그는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지속하며 살았다는 의미이다. 그는 낮에는 일상(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섞여 살았고 어둠이 찾아들면 또 다른 일상(이상)이 펼쳐졌다.
이 두 가지의 삶을 병행하며 살았고 이 둘은 섞이지도 않았으며 두 가지의 삶이 균형을 잃지 않으려 평생을 노력하며 살았다. 그는 현실의 삶에서 보조회계원과 번역가로서의 페르난두 페소아의 삶을 살았고 이상 속에서는 다른 이명(알베르투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 알바루 드 캄푸스)들의 삶을 살았다. 현실의 삶과 이상의 삶은 철저히 분리되었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았으며 서로가 방해하고 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 현실과 이상은 항상 충돌하고 서로의 영역을 잠식하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완벽한 조화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소아는 평생을 이것에 노력을 기울이면 살았던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실명과 이명, 즉 현실과 이상의 삶의 조화를 이루려 평생을 고심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페소아에겐 여행(방랑자)도 금욕(수행자)도 필요치 않았다. 그는 앞에 설명한 두 가지의 극단의 삶의 고귀함을 알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제3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 둘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찾고 그 사이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중적인 삶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이중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와 균형을 이룬 삶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여기 동전에 누구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가?"
"카이사르의 얼굴이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 [마태복음] 22:21 -
과거 예수도 유대인들이 모인 곳에서 그를 모함하려는 자의 의도된 질문(왜 로마제국에 부당한 세금을 내야 하는지에 관한)에 이와 같이 대답했다. 비록 인간이 만든 현실의 규칙(법)이 부당하고 불합리할지라도 그것을 따르되 이상의 끈을 놓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페소아는 세상이 원하는 삶에 자신을 내어주면서 또한 자신이 원하는 이상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섞이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역사 속에 위인들이 벌였던 혁명과 항쟁 같은 현실을 바꾸려는 저항 운동이 아닌 무저항의 저항이었다. 그 저항의 흔적은 그가 죽고 나서야 세상에 드러났다.
페소아는 이성과 감성, 현실과 이상, 경험과 느낌 사이를 살았다. 그리고 비록 그의 육체는 이성적으로 현실을 경험하며 살았지만 그의 영혼은 언제나 감성적으로 이상과 상상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페소아가 살았던 고귀한 삶을 드려다 보며 잠시나마 그것을 상상해 본다.
당신은 이 3 가지 고귀한 삶 중에서 무엇이 가장 끌리는가?
글짓는 목수 (유튜브 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