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무도 없고 권리도 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행복감을 글로 표현한다. 이것이 적절한 말과 이미지로 가공되기만 한다면…. 내 글을 읽는 독자는 내가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을, 내 어린 시절과는 사실상 아무 연관이 없는 그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요즘 유튜버에 도전하면서 나의 사유 방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사유방식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제 글을 쓸 때 영상화 되었을 때를 미리 생각하게 된다.
텍스트와 영상은 모두 의미를 담을 수 있지만 그 의미를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다.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텍스트가 이미지와 영상으로 전환되는 지체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뇌가 일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지와 영상을 통해 더 빠르고 자극적이며 효과적으로 그 의미와 정보와 느낌을 얻고 싶어 한다. 이건 인간의 본성이다.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된 건 이 플랫폼이 인간 본성을 아주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의 시선과 뇌를 가장 오랜 시간 잡아두는 플랫폼이 되었다. (20억 시간/월)
유튜브 시청
우리는 텍스트가 이미지와 영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더 이상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의미와 생각의 시작인 텍스트를 생략하고 영상을 소비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런 영상 중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나 또한 가히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영상을 만들고 구독자를 모으고 더 많은 이들이 나의 영상을 소비하길 바라는 모순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
“세상은 모순이다.”
내가 오랜 시간 글을 읽고 쓰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모순을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나는 모순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이제야 모순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쉽지 않았다. 이걸 받아들이지 못해 분노하는 자들이 많다. 나 또한 그랬다.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발견하면 그걸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런 자들은 저항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 그런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저항은 인간의 본성이다. 모순을 유지하려는 자와 모순을 부수려는 자의 싸움이다. 하지만 이 모순은 세상 본연의 모습이기에 부수면 다시 생겨나고 유지하면 부서지는 도전을 받는 것이다.
나는 무저항의 저항을 좋아한다. 그 방식이 누군가는 그림이고 음악 같은 예술이고 나는 텍스트라는 표현 방식을 선택한 것뿐이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역할과 소명은 이 모순을 지키거나 부수려는 것보다 세상이 모순이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난 이건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다만 나는 모순(부조리)을 좋아하지 않는 쪽에 속해 있을 뿐이다. 이 노력은 중요하다. 세상은 선악으로 나눠져 있지만 그 힘의 세기는 항상 평형을 이루지 않는다. 선이 강할 때가 있고 악이 강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선악은 완전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모순 뒤에 진실이 있고 진실 안에 모순이 있다. 선 안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생겨나기도 한다. 기독교는 가장 핍박받던 시기에 가장 간절하게 강하게 빛났다. 하지만 기독교가 공인(AD 313년, 밀라노 칙령)되고 공공연해지자 그 안에서 악이 생겨나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고난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고 신에게 다가가는 과정이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 루이스-
나의 좌우명이다. 나는 텍스트를 지향한다. 다만 내가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느낀 점 중에 하나가 텍스트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누구나 그 가치를 인정받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힘을 발휘하는 자는 명성과 권위와 전문성을 가진 자들에게 우선순위와 기회가 더 많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온라인상에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지금 세상의 모든 눈은 대부분 영상으로 향해있다. 유튜브는 인간의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유튜브뿐만이 아니라 각종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까지 합치면 사람들의 눈은 항상 액정 스크린을 향해 있다. 최근 포터블 모니터의 매출이 급증했다. 이제는 하나의 모니터도 부족해 동시에 두 개의 화면을 동시에 소비한다. 1인 2 화면의 시대이다.
포터블 모니터
이 말은 글은 사람들에 시선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모니터로 텍스트를 접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니터는 언제나 영상의 유혹이 더 강하다. 글을 보는데 고화질의 LED화면이 필요한가? 종이 책이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이다. 종이책은 영상의 유혹을 차단시키며 읽고 싶은 자들이 선택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내가 영상을 만드는 이유는 나의 영상을 보고 다시 텍스트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영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나의 텍스트의 조회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냐 나는 내 영상에 항상 나의 글을 연결시켜 놓고 텍스트로의 유입을 이끌려하기 때문이다. 나의 영상이 타인에게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지만 나는 타인도 나처럼 생각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고자 함이다. 이것이 내 유튜브 채널의 의도이자 목적이다. 영상으로 글쓰기를 지향한다. 모순이다.
AI 글쓰기 vs 직접 쓰기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북튜브[책그림]를 영상을 봤다. 과거 오랜 시간 그의 영상을 시청해 왔다. 그런데 그는 이젠 유튜브를 거의 하지 않는 모양이다. 채널에 영상이 올라오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마 이제 다른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나마 최근에 올라온 그의 영상(8개월 전)을 보고 그가 어쩌면 AI 때문에 책소개 영상을 그만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AI 글쓰기
실제로 지금 유튜브를 운영하는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ChatGPT 같은 AI를 활용해 대본을 작성하고 그 대본으로 영상 작업을 한다. 실제로 AI가 만든 텍스트는 이제 인간이 쓰는 텍스트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오히려 더 논리적이고 구체적이며 리얼하기까지 하다. 덕분에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대본 작업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줄여주고 있다. 영상 콘텐츠의 기본인 대본 작성에 시간을 크게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내가 쓰는 이유 - 퍼스널 브랜딩(Personal Branding)
나도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물론 글을 쓸 때 필요한 사실적 정보와 그 디테일에 대한 내용을 모를 때 물어보고 참고하는 데 활용한다. 그리고 필요한 내용은 인용해 쓰기도 한다. 하지만 아예 주제를 던져주고 통째로 만들어 달라고 하진 않는다. 이건 내 글이 아니다. 그 말은 그 내용을 내가 소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글짓는 목수(Carpenwriter) 유튜브 채널 이미지
나는 퍼스널 브랜딩을 하려는 것이지 공장에서 의미라는 제품을 생산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대본을 쓰는 자가 있다면 아마도 자신의 콘텐츠를 자신도 잘 모른다는 오류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비록 자신이 만들었지만 생각의 대부분을 직접 한 것이 아닌 AI가 대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그 대본을 읽으며 영상을 제작했기 때문에 독서의 효과는 있을 수 있다. 이것 또한 배움의 과정이다.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다만 이 독서는 배움이지만 사유(직접 쓰면서)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체화되지 않은 배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자가 만약 타인과의 대면 대화 혹은 강단에 서서 연설을 한다면 그 콘텐츠 속에 담긴 내용들이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을 기대하긴 어렵지 않을까. 복사 붙여 넣기 (Copy & Paste)는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왜냐 이건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AI의 지식을 소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쓰기 없는 읽기는 체화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많이 읽으면 지식이 쌓이지만 그것이 체화되려면 반복적으로 계속 읽거나 아니면 읽은 것에 대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며 쓰는 시간을 가져야만 체화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말이 논리 정연해 지고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지는 건 그가 쓰면서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들을 체화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이 다르다면 그 자는 직접 쓴 게 아니다.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
내가 다른 북튜버들과 다른 점이라면 바로 이점이다. 나는 책을 소개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 아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내가 사유했던 감동과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나는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이다. 오랜 시간 나의 글을 읽은 독자들은 아시리라. 나의 글 속에는 나의 삶이 녹아 있다.
“뭐야? 이거 딴 소리만 늘어놓고 있네”
그렇다. 혹자는 내 글과 영상을 보며 빨리 책 내용과 핵심 주제를 알고 싶은데 딴 소리 하는 내가 답답해 나가 버리는 자들도 많을 것이다. 아쉽지만 그런 분들은 책소개나 전문 서평 영상을 찾기를 추천한다. 나는 말 그대로 책을 읽고 내가 느낀 주관적인 생각을 삶과 연결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책의 내용 요약이나 책의 전체 내용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겐 다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관적임은 주관적임의 대중화일 뿐[칼럼 참조]이다.
독서란 타인의 생각을 읽고 나의 생각을 만드는 과정이다. 타인의 생각을 꿰뚫어 분석하고 그대로 흡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생각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나는 그 다른 생각 중에 하나일 뿐이고 나는 남다른 생각을 글로 옮기고 글을 쓸 때 떠올렸던 이미지를 영상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거쳐온 이 일련의 과정을 당신도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원한다면. 왜냐 나는 이것이 성장이라고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서두의 문장은 페소아가 100년 전에 읽히지 않는 자신의 글을 아쉬워하며 자신이 글을 쓰며 생각하고 떠올린 상상들을 적절한 음향과 이미지로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 리얼하고 감동적인 상상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다. 페소아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100만 구독자를 뛰어넘은 크리에이터가 되지 않았을까?
성인(聖人)의 성장 방식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각을 이미지와 영상으로 표현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든 생각은 텍스트에서 시작하지만 인간은 생각의 결과물(이해하기 쉽고 빠른)만 원한다. 그 말은 이런 결과물을 빠르게 잘 만드는 자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기계화(AI)되면 성공은 할지 모르겠지만 성장은 없다. 돈을 많이 버는 부자가 현인(賢人)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4대 성인 사진
과거 성인(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들이 글을 쓰지 않고 대화와 토론의 방식으로 지혜를 전달한 것은 눈에 보이는 부조리에 현혹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 아닐까? 모든 배움은 모방에서 시작되지만 모방에서 멈추는 것을 우려했다. 체화된 것은 나의 글과 입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제 글은 당사자가 썼는지 확인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얼굴을 마주한 당신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것만이 당신이 체화한 것이다. 우리가 왜 직접 강연과 토론을 찾아다니며 정치가, 작가 그리고 예술가를 직접 만나서 듣고 싶은가를 잘 생각해 보라. 대본 없이 말할 수 있는 자는 이미 그것과 하나 되었음을 의미한다. 만약 글을 잘 쓰는데 말이 어눌하거나 비논리적인 사람을 만난다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직접 읽고 쓰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이유이다. 성장이 우선이고 그것이 성공을 이끈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AI는 분명 인류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내가 주체가 될지 AI가 주체가 될지는 당신이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렸다.
당신은 세상에 AI를 남기고 싶은가 아니면 당신을 남기고 싶은가? 성공했지만 성장하지 않은 자보다 성공하지 못해도 성장하는 자가 낫지 않은가?
우리는 항상 성공과 성장 사이에서 고민한다. 왜냐 성장은 더디고 성공은 빠르길 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