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열아홉 번째 이야기 -
“고통을 견디면서 자신과 하나로 남아있는 자는 행복하다. 불안으로 인해 변화를 겪었으나 자신과 분리되지는 않은 자는 행복하다. 불신하면서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햇빛 아래 앉아 있을 수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아침 산책이 끝나고 차 안에서 가져온 사과를 꺼내 수돗가에서 씻었다. 그리고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여기 호주는 겨울이지만 볕이 내리쬐는 곳은 온기가 있어 따뜻하다. 이 피부에 닿는 햇살의 따스함과 입 안에 퍼지는 차갑고 새콤한 과즙의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 나를 잠에서 깨운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내 모습이 편안하다. 이제 이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나는 걸으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자면서 걷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귓속으로 전해오는 페소아의 글귀를 읽으며 상상에 빠져든다. 산문은 보통 내비게이션과 같아서 작가가 독자를 그의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런데 페소아의 글은 길 위에 가끔씩 나타나는 이정표와 같다. 이정표와 이정표 사이 공백과 여백이 많다. 다음 이정표가 나올 때까지 나의 시선과 생각은 자유롭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려하면 다시 이정표가 나타나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한다.
페소아는 나를 잡아두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오히려 그에게 붙어있으려 한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옆에 잡아두려 하면 계속 빠져나가려 하지만 사실 또 풀어주면 부모에게서 떨어져 놀다가도 항상 부모가 근처에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곤 부모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찾기 시작한다. 페소아는 그걸 잘하는 듯하다. 잡아두면 도망가려 하고 풀어주면 돌아오려 하는 아이 같은 본성을.
다른 작가들의 글은 울타리가 쳐진 산책로를 따라가는 것이라면 페소아의 글은 울타리가 없는 산책로이다. 산책을 하다 예쁜 꽃을 만나면 산책로를 벗어나 꽃을 감상하고 들판에 새들이 날아들면 들판에 들어가 새들을 관찰하고 아침 이슬이 맺힌 거미줄을 보면 숲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한참 동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다 다시 페소아가 안내하는 산책로로 돌아와서 다시 사색을 이어간다.
이건 다른 작가들의 글은 점진적으로 빠져들어가는 점입가경(漸入佳境) 형태라면 페소아의 글은 바로바로 빠져드는 형태이다. 산문이지만 글이 단편적이다. 하지만 단편이 장편을 품고 있다. 단편은 페소아가 준 마중물이고 장편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항상 나에게 주제와 질문을 던져준다. 내가 생각할 수 있도록. 내가 페소아의 한 두 문장에 영감을 얻어 이렇게 긴 글을 쏟아낼 수 있는 이유이다.
또 서론이 길었다.
다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면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만약 예전에 나였다면 떠나기 전에 더 챙기고 더 벌어서 가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 먹어 보지 못했던 것, 가보지 못했던 곳, 새로운 것들을 찾고 해 보고 떠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요즘 매일 이사 온 집 주변 반경 1~2km 안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른 새벽 집 근처 맥도널드에서 글을 쓰고 공원에서 책을 읽으며 산책을 하고 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만들어 먹고 다시 도서관에서 글을 영상으로 만든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수영을 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아무런 부가가치도 창출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갔음에도 뿌듯하다. 과거 매일 출근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그 많은 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갈 때도 느껴보지 못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무엇일까? 나를 위해 하는 일과 나의 가치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은 현실의 궁핍함을 견뎌야만 한다. 그걸 깨달은 자는 그 궁핍함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궁핍을 견디지 못하기에 나의 가치가 아닌 타인과 기업과 국가의 가치를 올리는 소모품으로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써버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입에 풀칠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 간다. 만약 사회와 기업과 국가가 인간을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렇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사회와 국가가 만든 시스템(정책과 질서와 법)에 따라서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존속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것이 힘들게 된다면 그 사회는 존속할 이유가 없다. 인간(다수)을 위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지키기로 한 약속(시스템)이 그저 다수를 통제하고 억압하며 소수(특권층)가 힘과 이익을 취하기 위한 것이 된다면 그건 민주주의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럼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거나 그것이 힘들다면 개인의 생각과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다. 시스템도 바뀌지 않는데 개인 스스로도 바뀌지 않고 기존의 생각과 태도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게 개인은 시스템을 무시하고 불법과 편법으로 위선과 가식을 디폴트로 장착하게 된다. 불신이 만연한 사회가 된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시대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불신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하지만 인간은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다. 한국에 왜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지는 이와 연관이 깊다. 믿음 둘 곳을 인간이 아닌 신에게로 옮겼더니 그곳까지 이용해 먹는 것이 인간이더라. 한국이 사기 공화국의 오명을 가진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믿음을 이용한 범죄이다.
한국인이 이걸 참 잘한다. 사기와 사업이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둘 다 믿음에 근거한 인간의 활동이다. 이건 인간의 본성, 즉 믿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는 아주 악랄한 범죄이다. 나는 호주에서 몇몇 그런 류의 인간들을 경험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건 피해자만 있을 뿐 가해자가 없다. 가해자는 그걸 인지하지 못한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된 상태에선 그렇지 않은 당신이 바보처럼 취급된다. 속은 자가 멍청한 것이다.
이건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을 만드는 인간들의 마인드부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위에서부터 썩은 물이 흘러 내려오는데 아랫물은 오죽하겠는가? 이쯤 되면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을 수밖에 없다. 국민을 위한 국가인가 국가를 위한 국민인가? 뭐가 먼저인가? 불신은 위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이 사기 범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건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위에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고 배웠음이라. 기술은 위에서 아래로 전수되는 법이다. 한국인이 열심히 일하며 성실하게만 살아야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 한 번으로 말이다. 그래서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믿음은 사라지고 믿음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 차가운 로봇처럼 사는 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진 자가 나라를 다스려 백성이 그런 걱정 없이 열심히 노력하고 살면 모두가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이 자리 잡은 세상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개인의 발전과 그 방향 또한 국가가 바르게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믿다가 삶을 나락으로 가본 사람들에게 다시 믿음이 생기는 기적은 쉽지 않다.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믿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에게 신이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내가 왜 하나님을 믿는 줄 아세요?”
“왜?”
“인간은 믿을 게 못되거든요”
과거 계속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을 믿고 기다려 달라며 급여를 계속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왜 자신을 믿어주지 않냐며 나에게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 불신은 누가 만든 것인가? 불신의 책임이 왜 나에게로 전가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인가? 일을 하고 돈을 받지 못한 것은 나인데 왜 내가 그 사람에게 혼이 나듯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을 내가 화를 내지도 못하고 듣고 있어야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그 자가 미안한 표정과 태도로 나에게 사정을 얘기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돈을 주는 사람이면 무조건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교육을 받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불합리와 부당함을 알면서도 그 누구도 그것을 당사자 앞에서 따져 묻지 않는다. 누군가 다른 이가 그걸 대신해 주길 기다릴 뿐. 얼굴 붉히기 싫다. 그렇게 우리는 불신하면서 믿을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삶에 익숙해져 버렸다. 부조리가 디폴트가 되었다. 난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었다. 그래서 난 남들보다 좀 더 힘들었는지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삶이 더 고단해지더라. 이제 그걸 받아들였다. 부조리와 모순이 이 세계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다만 그걸 싫어하지만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불신과 믿음이 공존한다. 완전히 믿을 수도 없고 완전히 불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믿으라고 강요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믿음이 없이는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신을 믿고 그 불안을 떨쳐버리려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를 인간에게 위로받으려 하지 않고 신에게 위로받는다. 신은 언제나 내 편이다. 내가 믿기만 하면. 그래서 믿어서 나쁠 게 없다.
고통과 불안 사이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했다. 며칠 전 오한과 몸살로 삼 일간 앓아누웠다. 코로나19 때 이후 처음으로 가장 심하게 앓았다. 6년 동안의 삶을 정리하고 떠나려니 밀려든 공허함이 만든 병이었을까? 아니면 다가올 또 다른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불안이 만든 병이었을까.
환경의 변화는 언제나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안다. 환경의 변화는 강제적으로 나의 주변 관계와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킨다. 환경이 중요한 이유이다. 사람들이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 변화가 가져오는 스트레스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난 언제부터인가 이 익숙함에만 머무는 자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게 되더라. 웃기지만 그들은 나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고통 없는 변화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약 내가 이 원치 않은 수많은 환경의 변화를 모두 고통으로만 받아들였다면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 난 이 변화가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에도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것은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희망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로마서 5:3~4] -
고통과 불안과 불신 속에서도 이렇게 눈부신 햇살 아래 앉아 사과 한 입 베어 물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건 내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강한 정신은 신을 믿는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