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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15. 2024

이해와 공감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스물 한 번째 이야기 -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일은 사무실에서 이질적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동료들과 다르지 않다는 그 아이러니를 즐기고 싶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처음엔 항상 사람들 속에 묻혀서 그들과 비슷하게 그들의 문화와 관습 속에서 그것들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이직을 할 때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회사마다 그 회사의 분위기가 있고 그들만의 무언의 규칙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을 가장 빠른 시간에 파악하고 적응하는 것이 그 집단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직장인의 삶

전 직장에서 배우고 익혔던 것들은 모두 지워내야 한다.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행동 양식을 요구한다. 첫 직장에서 3년이 넘는 시간 고착된 업무 방식과 행동 양식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의 두 번째 직장은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가장 처절한 직장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경력직으로 들어간 두 번째 직장에서 기존의 직원들이 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아주 냉혹했다.


“어이! @대리 넌 경력인데 이런 것도 모르냐? 너가 신입이랑 다른게 뭐야? 아놔 진짜”


나는 두 번째 직장에서 3년이라는 시간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 살았던 것 같다. 동료들과 섞이지도 못하고 동료들이 나를 진정으로 나를 팀원으로 받아주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 시간은 나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직장 생활은 그 속에 묻혀서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해야만 하지만 나는 나의 존재감을 계속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동료들과 상사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오점이었다.


그래도 회사를 나갈 순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야 살아남는다는 직장인의 제 1 행동강령을 따라야 했다. 월급이 끊기는 것은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노후를 위해 지금의 희생을 참고 견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고의 성장 아니겠는가.


그 때 나는 세상이 말하는 인고의 성장과 진정한 인고의 성장을 헷갈리고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인고의 성장이란 처한 시스템에 길들여져서 큰 기계 속 하나의 부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부품은 시간이 지나고 노후화 되면 다른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런 과정을 내가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경험하는 성장의 개념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교대상이 없기에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 혼자만 있는 세상에선 나를 제대로 드려다 볼 수 없다. 타인이 있기에 나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려면 그 두 가지의 과정을 다 경험해 보면 확실히 구분이 가능해 진다. 물론 굳이 옳지 않은 것을 경험해서 알 필요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공감할 수는 없다. 그냥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이해받기를 항상 거부해왔다. 이해받는다는 것은 몸을 파는 행위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과거 나를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대부분 나의 상황을 합리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자기합리화이다. 합리와 비합리는 어떻게 잘 끼워 맞추는가에 달린 것이다. 이건 마치 소설을 앞뒤 스토리를 잘 연결시키는 것과 같다. 빠져드는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은 앞뒤 맥락을 잘 연결시키고 그 스토리에 감성과 이성을 오고가며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생활과 직장생활은 항상 상황을 모면하고 어떻게 해서든 타인에게 나의 이해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타인이 나를 이해할지 못할지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그걸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모든 상황에 합리적으로 보이는 명분과 핑계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자신이 구차해져 간다는 것을 몰랐다.


새로운 관계 속으로


호주에 온 이후 MZ세대(1990이후 출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나와 10년 이상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엮일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라는 공간 때문이었다. 보통 교회는 기혼자와 미혼자들이 분리되어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 불혹의 미혼인 나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한참 어린 손 아랫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내가 다닌 교회는 가정 교회였는데, 내가 속한 그룹의 리더 또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였다.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모르던 세계를 드려다 보는 경험을 했다.

MZ 세대

그들의 사고 방식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것과는 많이 달랐다. 처음에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국의 오랜 직장 생활에서 고착된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마인드가 어디 그리 쉽게 바뀌겠는가, 하지만 이젠 그 어떤 지위도 권위도 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진 내가 그들에게 내세울 있는 건 없었다. 완전히 동등해 졌다. 내가 서슴없이 얘기하니 그들도 거침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쏟아내더라. 권위와 지위와 나이를 내려놓으면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어른의 의미


이제 어른이라고 어른 대접을 해주는 시대는 지났다. 과거엔 아랫 사람이 어른에게 깍뜻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지식과 경험들을 그들을 통해서 배우고 전수 받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지식과 기술은 온라인 상에 존재하고 언제 어디서든 보고 배울 수 있는 시대이다. 과거 어른들이 몸소 축적한 수많은 노하우와 지식들은 이제 오픈 소스가 되어 온라인 공간에 산재해 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온라인에서 그 모든 지식과 기술들을 습득하고 익힌다. 더욱이 그들은 IT기기를 다루는데 능숙해 그런 지식과 기술의 습득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 이제는 아날로그 시대의 어른들이 더 무지해 보인다. 지식은 보편화 되었고 지혜(지식들을 적절히 잘 연결하고 융화하는)가 필요한 시대이다. 

MZ

이것이 바로 어른이 이제 더 이상 어른 대접을 받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울게 없는, 즉 얻을 게 없는 어른에게 나의 시간과 관심을 투자할 인자한 MZ는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개인주의를 디폴트 값으로 장착하고 태어난 자들이다. 그것을 어른들이 뭐라고 할 수 없는 건 어른들이 그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박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만 가르친 탓이다. 이제 어른들은 더 이상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


내가 MZ 세대들과 어울리며 개인적으로 느낌 점이 하나 있다면 그들은 ‘굳이 경험해 봐야 아냐’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경험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다 이해하듯이 얘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목수일은 제대로 해 본적도 없으면서 사람들 앞에서 목수일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나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이 틀리지 않다. 그런 지식과 정보는 유튜브를 조금만 보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영상으로 좀 봤다고 목수를 이해한다?! 뭐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도 어렵지만 절대 공감할 순 없다. 


보는 것과 직접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특히 이런 육체적인 노동의 영역은 말로는 절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들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는 방법 밖에 없다. 그것도 하루 이틀의 체험학습이 아닌 일정 기간 그것이 삶의 일부가 되어봐야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다.


그들도 내가 과거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타인에게 이해시키려 했던 것처럼 대부분 어디서 보고 들은 것 그것이 자신이 직접 체화한 지식과 기술인 것처럼 말하며 나를 이해시키려는 것 같았다. 말로는 집의 프레임을 세우고 지붕을 얹히면서 정작 팀버를 여러장 들어올릴 때 느껴지는 그 중량감과 질감 및 촉감은 알 수 없다. 수직을 맞춰 세우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프레임 사이사이에서 그 무거운 네일 건을 한 손으로 들고 총을 쏠 때 느껴지는 그 반동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그것을 굳이 해보지 않아도 해본 것처럼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AI와 유튜브에서 그 모든 것들 것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준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모두가 마치 천재박사 같다. 모르는 게 없다. 어떻게 이리도 잘 알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너도 나도 서로를 모든 것을 이해하는 시대, 아니 이해하는 척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이렇게 양극화와 부조리가 만연함은 설명할 길이 없다. 이건 이해만 있을 뿐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나를 파괴했다.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을 잊는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해하기 위해 하는 노력이 무엇인지 드려다 보라. 무언가를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것이 자신을 더욱 알리고 드러나 보이게 하려는 행동처럼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 이해 받기 위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재화와 서비스는 평준화 되었다. 더 높은 수준의 가치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고민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이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 많은 이들로부터 이해받는 자가 부를 가져가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컨텐츠가 아닌가? 재화와 서비스라는 빠르고 편리하며 예쁘고 편안한 상품에서 이제는 컨텐츠(보고 이해할 수 있는)라는 상품이 보편화 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누가 더 많이 이해받느냐가 이 시대의 새로운 경쟁을 만들고 있다. '좋아요'는 우리가 타인을 이해했음을 표시하는 행위 아니던가? 요즘은 웬만해선 '좋아요'를 남기지 않는다. 얼마나 상대를 쉽게 잘 이해시키느냐가 관건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 ~ 1519)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이해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오직 사랑하거나 혹은 오직 미워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 경쟁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더욱 더 양극화로 몰아갈 듯 보이지 않는가? 사람마다 보는 유튜브가 다르고 그들은 보는 것만 계속 본다. AI 알고리즘은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계속 더 심화시켜 관련 영상을 추천한다. 자기의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든다. 서로 다른 세계만을 드려다 보는 자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이해하고 이해 받는 세계만 공감하고 사랑한다. 그렇지 않은 반대의 세계에 대해서는 반감과 미움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익숙한 곳에서만 이해하고 이해받는다. 


하지만 사랑은 이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이해(理解)는 이해(利害)를 전제하고 있다. 페소아가 '이해받는 것은 자신을 파는 행위'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나에게 익숙하고 유익한 것만 찾아서 이해하고 소비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세상은 이해(理解)관계와 이해(利害)관계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진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이 아니다. 서로 공감하는 것이다.

서로의 영역에 머물고 타인의 영역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역을 내어주고 상대의 영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이제는 공감 없이 이해를 소비하는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공감은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이해는 머리의 인지 능력만 뛰어나면 된다.


당신은 나의 글을 이해하는가 아니면 공감하는가?


[불안의 서] in Syd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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