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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17. 2024

생각(T)과 느낌(F)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열세 번째 이야기 -

“나는 항상 타인들과의 공감대 형성이 극심하게 부족한데, 그것은 대다수의 타인들이 느낌으로 생각하는 데 반해 나는 생각으로 느낀다는 차이에 기인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불안해서일까? 쓰던 소설이 멈췄다. 매일 아침 또 다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자아들을 경험하는 것에 빠져있었다. 페소아가 즐겨하던 이명 놀이를 어느 순간부터 나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지가 않는다. 그건 아마도 또다시 현실의 불안이 나를 조금씩 잠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현실은 언제나 내가 상상에만 머물도록 허락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다른 책과 글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페소아의 글만 눈에 들어온다. 며칠 전부터 산책을 하면서 다시 읽기 시작한 그의 문장들은 매 문장마다 나에게 수많은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며칠 전부터 내가 쓴 글(Text)을 영상(Video)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나의 뇌는 또 다른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듀얼 코어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어지럽다. 없던 두통이 생겨났다. 과거 화이트컬러로 살아갈 때 느꼈던 느낌이다. 물론 그때보단 낫다. 왜냐 이러쿵저러쿵 나에게 간섭과 명령과 핀잔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급여도 없다.


“객관화란 창조하는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과 그 글을 다시 영상화하는 것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를 야기한다. 물론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 특히 글 소설과 에세이를 쓰는 과정 또한 비주얼리제이션(시각화) 과정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시각화는 나의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나는 글을 쓰는 동안 그 이미지들 속을 돌아다니다 왔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의 영상기기를 통해 구현해 내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스킬을 필요로 하며 이건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에 가깝다. 이건 다시 말하면 내가 그 스킬을 익혀야(영상툴의 사용법) 하고 그것을 반복 숙달해서 속도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머릿속에 떠올렸던 이미지들에 가장 가까도록 연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객관화의 과정이다. 시각적인 객관화이다. 내 머릿속에만 있는 것은 주관이다. 하지만 이것이 글과 영상으로 표현되고 누군가가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바로 객관화의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가 이해하면 이건 객관화된 사실 혹은 정보가 된다.


과거 페소아는 그가 살아생전엔 아주 주관적인 인간이었지만 그가 죽고 그의 작품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객관화의 과정을 거쳤고 지금은 20세기 문학사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안타까운 점은 그는 살아생전 자신을 객관화시키지 못했다. 이건 그가 원치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신이 허락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글을 출판하고 알리려 여러 액션을 취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그는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쓰는 것이 살아있음과 같았다. 즉 그는 생각하는 것이 사는 것이었다. 생각으로 느끼는 존재였다.

페르난두 페소아 (1888~1935)

“생각에 감성이 실리게 되면 생각은 감성 자체보다도 더욱 예민해진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에게 느낌은 항상 생각을 통해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당신이 누군가의 슬픈 혹은 기쁜 사연을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럼 당신은 그 자리에서 그 당사자와 함께 울고 웃으며 상대의 이야기에 공감의 제스처를 취하게 될 것이다. 무뚝뚝한 성격이라 표현에 인색하더라도 마음은 그것이 맞다고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페소아는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도 인간들의 보편적인 행동패턴에 따라 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가 진심으로 슬퍼하고 즐거워했던 시간은 나중에 찾아왔을 것이다. 그때 찾아오는 느낌은 당시의 그것보다 더 강력하다.


이걸 뭐라고 과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누군가가 슬퍼하고 기뻐하고 혹은 내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쏟아내고 있다. 그럼 나는 그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액션을 취한다. 하지만 머리는 종종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 생각은 상대가 하고 있는 말과 완전히 별개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이 던져준 말에서 기인한다. 생각이 샛길로 빠진다고 표현하면 맞을까


“자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어? 뭐라고 했어?”

“야! 내 말에 집중 안 할래!”


그래서 나는 종종 상대의 말을 듣다가 혼자 다른 생각으로 빠져 있다가 상대가 물어온 말에 다시 되묻는 일이 있다. 과거 회사에서 일할 때도 상사의 장황하고 쓸데없이 반복되는 말보다는 그의 표정과 눈빛 그리고 모션에서 더 집중하곤 했다. 그러다 상사가 되묻는 말에 대답을 못해 꾸지람을 자주 듣곤 했다.


때론 타인 앞에서 이성적으로 말하는 행위가 자신의 내면을 가리고 포장하는 것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눈빛과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표정과 몸짓까지 이성적으로 컨트롤하긴 쉽지 않다. 왜냐 우리는 전문 연기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듣는 것보다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더 정확할 거란 나만의 믿음 같은 것이 있다. 말에 현혹되기보다 본질을 뚫어보려는 것이다. 물론 서로 1:1로 동등한 입장에서 진정성(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섞인)있는 대화를 할 때는 다르다.

생각과 느낌 사이 (Between thinking and feeling)

“보통 평범한 사람들에게 느낌은 산다는 것이고, 생각은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이 삶이고, 느낌은 생각을 위한 영양분과도 같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그래서 나는 페소아의 이 문장이 너무도 가슴에 와닿는다. 느낌(Feeling)은 나에게 생각(Thinking)을 던져주는 마중물과 같다. 느낌이 없으면 생각을 할 수 없지만 느낌은 순간순간이고 생각은 삶이 된다. 나는 일상과 책 속에서 순간순간 느낀 것들을 이렇게 긴 글로 써내려 간다. 느낌은 1~2초 혹은 길어봐야 10초를 넘지 않는다. 그 순간의 느낌(영감, Inspiration)이 내가 2~3시간 글을 쓰면서 생각하게 만든다.


내 글을 오랫동안 읽어온 독자라면 아시리라. 나는 책 속의 행간에서 떠오른 느낌으로 단편의 에세이와 칼럼(평론)등을 써내려 간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때, 번득이며 스쳐가는 느낌을 메모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보고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때 그 생각 속에서 울고 웃고 즐거워한다. 그때 느끼는 감정과 기분은 누구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감정이다.


바로 느끼지 못하고 생각으로 느끼게 된 이유


왜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건 아마도 오랜 시간 사회생활 속에서 감정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것을 통제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고 슬플 때도 우리는 일터로 가서 웃으면서 고객을 대하고 상사를 대해야만 하고 몸이 아파도 책임감에 아프지 않은 척 견디며 해야 할 일들을 모두 해내야만 한다. 느낌과 통증에 반대로 반응하는 것에 익숙해진 탓이 아닐까. 기업과 사회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기 위해선 이것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정작 기뻐하고 슬퍼해야 할 때도 통제된 상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남모르게 글을 쓰면서 울고 웃었던 경험이 적지 않다. 소설을 쓰다가 혼자 키득거리고 혹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건 완전히 새롭게 생겨난 느낌이라기 보단 과거 어느 순간의 어느 기억 속의 장면들을 재연되며 더해진 상상이 나의 감정을 살리고 증폭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때 상대가 하던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상대가 나에게 지어 보였던 표정과 몸짓과 말투의 느낌을 떠올리며 새로운 대화와 줄거리를 만들어 낸다.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이건 허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소설가들이 이 과정을 거치지만 나처럼 이렇게 그 과정을 설명해 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할 때 종종 보는 문구가 있다.


[본 영화 속 인물과 장면은 모두 사실과 다른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왜 이런 문구를 굳이 보여주는 것일까, 이건 사실(기억)에 근거했지만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오해의 소지와 분란의 소지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소설은 그렇다. 완전히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다. 현실에서 보고 들은 것에 기인한다.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그자와 한 번 단 둘이서 그것에 대해 대화해보고 싶다. 궁금하다. 그것이 가능한 자라면 나는 그를 정말 우러러보게 될 것 같다. 마치 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일 것이다.


“내 느낌의 강도는 내가 느끼고 있다는 의식의 강도보다 항상 더 약했다. 나는 고통 자체보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그 의식을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생각으로 느낀다는 페소아의 글귀가 공감되는 자는 글을 쓰거나 예술을 하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예술가와 작가(문학)는 과거의 기억과 경험(지식)을 다시 떠올려 상상을 가미하는 과정에 반드시 감성이 스며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느낌(Feeling) 없다면 그 그림과 글은 제품사용서 혹은 게시판에 적힌 설명문과 안내 그림일 뿐이다. 나는 설명서와 안내문 같은 글은 쓰지 않는다. 느낌도 없고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아침 글을 쓰는 이유는 느끼기 위해서이다.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과거 오랜 시간 현실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상황과 관계 속에서 느낌(감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을 통제하는데 익숙해져 버린 탓에 이젠 생각으로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페소아도 아마 현실과 이상의 삶을 분리해서 살아간 것은 그도 생각으로만 느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오늘도 아침이 밝아오는 새벽,

생각과 느낌 사이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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