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나 자신도 영혼 깊은 속에서는 낭만주의자의 후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고전주의 작품을 읽을 때만 만족을 느낀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는 시와 산문 가운데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시는 산문보다는 더 감성적이다. 문학에서 시는 감성에 뿌리를 두고 이성으로 향하며 산문은 이성에 뿌리를 두고 감성으로 향한다. 둘 다 문학이지만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르다.
시는 세상의 사물과 현상 그리고 관계를 글이라는 한정된 도구로서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 버렸다. 그래서 자신만의 실마리를 독자에게 던져준다. 알아맞혀 보라는 듯이. 그래서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울타리가 없는 상상을 펼칠 수 있다. 그래서 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시를 이해하려면 당대의 시대 배경과 작가의 삶을 함께 드려다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는 시를 읽으며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상을 할 수밖에 없다. 그건 작가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이 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산문은 다소 명료하고 비교적 자세히 그것을 보여주려 한다. 산문은 당신이 인내심만 가지고 작가가 안내해 주는 자세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들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그 안에 모습까지도 보여준다. 물론 그 디테일은 당신의 상상에 맡긴다. 하지만 이건 가이드라인이 있는 상상이다. 물론 산문도 작가의 시대 배경과 작가의 삶을 드려다 보면 더 큰 이해와 공감이 있겠지만 굳이 그것이 없어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크게 문제가 없다.
시와 산문 사이
페소아의 글은 시와 산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가 항상 상상과 현실의 경계 사이를 오고 가며 살았던 때문일까? 그의 글도 시와 산문의 경계를 오고 간다. 읽는 자로 하여금 감성과 이성을 끊임없이 오고 가게 만든다. 감성으로 나를 인도하고 그 안에서 이성(깨달음)을 일깨운다. 자연과 사물 그리고 관계 속에 가려져 있던 그것들의 이치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렇게 친절하고 자세하진 않다. 이건 페소아가 읽는 독자에게 사색과 사고의 시간을 던져줌을 의미한다. 그냥 표면적으로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사색과 사고를 동시에 하게 된다.
산책 in Castle Hill Heritage Park Reserve
요즘 산책을 하며 그의 책을 읽고 들으며 사색 속에서 많은 상념들을 떠올리고 있다. 종종 그의 책을 읽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 여러 번 그 문장을 되새김질한다. 그러다 보면 ‘아하’ 하는 감탄이 터지곤 한다. 이것이 페소아 글의 매력이다. 감성과 이성을 끊임없이 오고 가는 재미가 있다. 감성으로 빠져들다 이성으로 돌아온다.
낭만과 고전 사이
그런데 그도 그런 것을 즐겼던 모양이다. 서두에 문장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페소아(1888~1935)는 고전주의 (Classical Period, 약 1730-1820)와 낭만주의(Romantic Period, 약 1800-1850) 시대를 지나고 태어났다. 그는 아마 그와 가까운 시대의 예술인 낭만주의에 많이 끌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항상 고전주의를 향하고 있었다. 낭만과 고전 사이에서 적잖은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문학에서 보자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고전주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인데, 그들과 나는 유사성이 가장 덜하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도 그렇다. 난 글을 쓸 때, 항상 가사가 없는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글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대중음악이나 혹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이상하게도 몰입이 잘 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을 싫어하진 않는다. 난 둘 다 좋아한다. 물론 대중음악이 더 감성적이고 낭만적이기에 더 끌린다. 대중음악을 들으면 감성에 휩쓸리듯 빠져든다.
클래식은 들으면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다. 클래식은 마치 소용돌이치는 감성을 진정시키려는 것 같다. 클래식(고전)은 언제나 협화음과 불협화음(갈등)을 오고가며 마지막엔 협화음(조화)으로 마무리한다. 클래식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로 향하는 유토피아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알다시피 대중음악은 그렇지 않다. 그냥 휘몰아치는 감성 혹은 감정의 끝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이성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대중과 고전 이 양극단에서는 글을 시작할 수 없다. 그래서 난 언제나 그 사이 경계인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대중과 고전을 오고 간다. 과거엔 대중이었고 지금은 뉴에이지 그리고 그 다음은 아마도 고전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대중 속에서 이야기를 찾고 그 가운데서 양쪽을 보며 고전으로 연결하고 향해가려는 것 같다.
Mere Christianity [순전한 기독교]
예전에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서평참조)를 읽고 왜 밝은 빛만 보는 이들이 많음에도 세상이 어두운 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들은 고전에 머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성경은 가장 오래된 고전이다. 그들은 대중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빛 속에서 그냥 환하고 밝게만 살고 싶다. 어둠은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며칠 전 아침에 공원을 산책하다가 나무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었다. 알다시피 요즘 스마트 폰은 아웃포커싱 기능이 좋아서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다른 감성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때 나는 숲 속의 풍경과 햇살을 함께 찍고 싶었다. 그런데 숲 속을 터치하니 햇볕이 커지며 화면이 밝아졌다. 그리고 햇살을 터치하니 햇볕이 작아지며 화면이 어두워졌다. 빛에 포커싱 하면 세상이 어두워지고 어둠을 포커싱 하니 빛이 강해지더라.
빛과 어둠
신기하지 않은가? 그게 세상과 무슨 상관이냐고 나에게 되묻는다면 난 당신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 카메라 렌즈가 세상을 보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빛을 바라보면 조리개가 닫힌다. 하지만 어둠 속을 바라보면 조리개가 열린다. 이걸 쉽게 설명하자면 어둠 속에 고양이의 눈동자는 동그랗고 귀엽고 예쁘다. 하지만 대낮에 고양이의 눈동자는 매섭고 날카롭다.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빛만 바라보는 자들은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양이
빛 속에서만 사는 자들은 어둠을 무시한다. 하지만 어둠 속에 사는 자들은 항상 빛을 바라보며 부러움과 시기질투를 품고 살아간다. 어둠 속에 산다고 어둠을 사랑하진 않는다. 어둠이 좋아서 어둠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들은 항상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본다. 악에 머물지만 선을 지향한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을 행하는 것이다. 현실이라는 고난과 장벽에 막히고 욕망에 사로잡혀서.
“고전(클래식)을 많이 읽고 들으세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아예 책 자체를 읽지 않는데 고전을 읽을 리 만무하다. 물론 나도 고전을 많이 읽지는 않는다. 대부분 대중과 고전 사이의 교양서(과학, 예술, 인문 등)나 철학서 혹은 소설 등을 주로 읽는 편이다. 그렇지만 잊을 만하면 고전을 한 권씩 읽는다. 그리고 매주 주일이면 예배당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을 드려다 본다.
Holy Bible
물론 고전은 시대와 배경 때문에 잘 읽히지 않지만 읽다 보면 시대와 배경을 초월한 내용임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시대가 변해도 고전이 품고 있는 진리와 깨달음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현대에 출간되는 많은 소설과 교양서와 자기 개발서들은 모두 현대적인 시각과 표현법으로 고전을 변형시킨 것뿐이다.
물론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 그들이 있어야만 고전의 의미와 깨달음이 계속 후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이 품고 있는 뼈대는 변하지 않지만 그 살과 피부는 계속 바뀐다. 의미는 같지만 표현 방식은 변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대중과 고전을 이어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과 문학을 만드는 자들이 고전을 지향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 말은 그들이 고전을 읽었고 들었으며 이해하고 있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고전을 모르고 그 사이에 있다면 대중(낭만)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낭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낭만적인 분위기와 낭만적인 사랑 그리고 낭만적인 삶을 지향한다. 하지만 앞에도 설명했듯이 고전은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표현해서 협화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낭만은 기쁨이면 기쁨, 슬픔이면 슬픔, 분노면 분노, 아픔이면 아픔만을 강조하고 그것에 깊이 빠져드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고전은 희로애락을 모두 품고 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어지럽다.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 아니던가. 하지만 언제나 그 종착지는 조화로움(협화음)이다.
“고전주의들의 간소함, 명확한 표현을 대하면 나는 기묘하게도 위안을 얻는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널찍한 방들을 다 돌아다니지는 않고 오직 바라보기만 하는, 포용력이 큰 어떤 삶에 대해서 즐거운 상상을 할 수가 있다. 거기서는 설사 이교도의 신들이라 해도 신비한 기운을 잃어버리고 만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는 시 같은 산문을 쓰면서 항상 낭만과 고전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고전으로 향해 있었다. 내가 그의 글에 계속 빠져드는 것은 나도 그의 마음과 같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