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빛이 들지 않은 컴컴한 새벽, 침대 옆에 세워진 백열 스탠드 등을 켰다. 방 안에 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어제 봤던 전자책에서 밑줄 친 문구들을 훑어본다. 오늘 마음에 드는 문장과 최근에 나의 핸프폰 갤러리 속 사진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오버랩시키고 인스타 스토리에 업로딩을 하려고 할 때였다.
오랜 시간 인스타 맞팔을 하며 서로의 일상을 드려다 보던 작가님의 포스팅이 올라왔다. 그녀는 독일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전직 방송작가였다. 몇 권의 책을 냈고 지금은 한국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글쓰기 강연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일반 성인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글쓰기 강연을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보였다. 무의식 중에 그녀의 인스타를 계속 드려다 보고 있었다. 나도 어쩌면 그녀와 같은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들었다.
아직 어둠이 짙게 드리운 새벽, 그녀의 포스팅에 적힌 첫 문장이 이른 새벽 나의 상념의 바다에 돌을 던졌다.
직접 경험 (짓기) > 간접 경험 (읽기)
최근 웹소설 공모전에 참여하느라 많은 시간을 글쓰기 아니 정확히는 ‘글짓기’에 할애하고 있다. 13만 자에 달하는 장편 웹소설[발리에서 생긴 일]의 초반부를 완성했다. 이제 중반부를 써나가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삶을 살아봐야 알 수 있듯이 이야기도 써봐야 알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쓸 수밖에 없다. 알고 싶다면.
웹소설 공모전
사람들은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현실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지만 나는 판타지 소설을 쓰면서 그걸 경험한다. 나는 간접경험보다는 직접경험을 선호한다.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리얼하게 상상된다. 박 터지는 웹소설 시장의 경쟁은 치열하다. 이제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쓰면서 내가 만든 판타지 세계에 머무는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걸 함께 즐길 수 있는 몇몇 독자라도 있다면 감사하다.
읽기와 쓰기의 밸런스
호주라는 낯선 세상에서 적잖은 시간 글을 쓰고 또 지으면서 또한 많은 책과 글들을 읽었다. 읽기와 쓰기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읽기 없이는 쓰기를 이어갈 수 없다. 읽기 없는 쓰기는 읽어 보면 티가 난다. 이건 우리가 현실과 이상, 이성과 감성을 모두 포기할 수 없이 살아가는 것과 같다. 둘 중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삶은 피폐해진다. 현실만 쫓으면 로봇처럼 되어가고 이상만 좇으면 미친놈이 되어간다. 이 두 가지가 적절한 밸런스를 혹은 리듬(어느 한쪽이 강해지고 또한 약해지는 시기가 있을 순 있다)을 유지해야 한다. 읽기와 쓰기 또한 그러하다.
A man who is doing reading and writing at the same time in the library
내가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한국에서 마지막 직장을 퇴사한 후부터였다. 그때부터 도서관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던 내가 퇴사 후 일주일에 한 권씩 읽기 시작했다. 물론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이기도 했지만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살아온 삶이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속해 있던 직장과 주변에서는 나를 이해시켜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 책 속에선 그것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조금씩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었다. 문제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또 다른 기대와 궁금증들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읽은 책이 또 다른 궁금증을 유발하더라. 그러니 그 궁금증은 소멸과 증가를 반복하며 그 총량에는 크게 변함이 없더라. 지식으로 이해해 가는 세상은 또 다른 지식을 원하게 되고 그 지식은 또 다른 지식으로 연결되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예전에 사회생활 속에서 힘들어했고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의문들은 조금씩 해소되었지만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궁금증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또 다른 책을 찾게 되더라.
책을 읽고 나면 감흥이 밀려온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이 감흥을 퇴색시키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감흥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읽은 책을 모두 기록으로 남길 순 없지만 가능한 많은 독후감을 남기려 노력했다. 그렇게 수백 편의 독후감들이 쌓여왔다. 가끔씩 그것들을 다시 읽으면 해마 속에 잠들어 있던 감흥이 다시 밀려든다. 다시 볼 때마다 그 감흥은 뚜렷해진다. 기록은 기억을 찾게 도와주는 아주 좋은 수단이다. 그렇게 읽기와 쓰기는 병행되었다.
아주 주관적인 생각 ≒ 창의적인 생각
나는 책을 읽고 쓰면서 내가 점점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어간다 생각했다. 수많은 작가의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짬뽕이 되면서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각과 사고를 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사고가 유연해지고 관계도 유연해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난 점점 더 주관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인간은 객관적인 정보와 지식들을 통해 또 다른 주관적인 사고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정반합 변증법적 사고를 통한 또 다른 새로운 주관적 사고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과거 그것과 관련된 독후감[정반합의 불편한 성장]을 쓴 적이 있다. 객관적이 되려는 노력은 어쩌면 아주 주관적인 생각으로 나아가는 모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 기존의 객관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아주 주관적인 생각들이 생겨난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생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최초에 이건 가장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봉준호 감독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 봉준호 (from 마틴 스콜세지) -
이건 절대 객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기존에 이런 생각과 사고를 하는 사람이 없거나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객관은 이미 어느 정도의 대중(다수 혹은 소수)의 공감과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다만 내가 몰랐던 것이었을 뿐. 하지만 전에 없던 생각이 객관적인 정보들의 연결과 융합을 통해서 발견 혹은 탄생한다면 이건 아직 객관적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그건 절대 객관적인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었다. 객관은 주관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아주 주관적인 생각의 또 다른 말이 창의적인 생각이 아닐까.
객관적으로 주관적이 되다
나는 몰입의 과정에서 그런 것들을 한 번씩 경험한다. 이건 없던 것이 새롭게 탄생한다기보다는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에 가깝다. 다만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거나 너무 사소해서 지각하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객관적인 정보를 많이 입력하면 할수록 더 많은 복잡한 연상과 연결 과정의 밑천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바로 독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칫 잊혀 버릴 객관적인 정보들의 집산 기억 속에서 그것들이 보존되고 오래도록 주기억 장치와 연결되려면 그것들이 기록된 정보가 있어야 하고 그건 내가 직접 입력한 것이어야 한다. 이건 마치 컴퓨터의 휘발성 메모리인 RAM과 캐시 메모리가 작동하기 위해 SSD와 HDD에 그것을 기록해 두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저장(기록) 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폴더별로 잘 정리하고 자주 접속하여 그 경로를 까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내용은 까먹어도 된다. 까먹을 수밖에 없다. 망각을 통해 새로운 것을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주제나 제목만 기억하면 언제나 검색으로 찾아내 다시 상기시킬 수 있다.
읽기와 쓰기의 반복을 통해서 핵심적인 내용과 주제를 기억하고 색인을 통해 그것들을 상기시키며 강화해 나간다. 새로운 외부의 정보를 CPU가 읽어 들이고 (읽기) 그것을 나의 기존의 기억(Memory)과 융합해 생겨난 새로운 정보를 기록해서 메모리로 저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다음에 입력되는 새로운 정보와 다시 융합되며 또 다른 정보를 만들어 낸다.
지식의 습득 방식 (이성 vs 감성)
이건 내가 소설을 쓸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내가 읽은 여러 가지 소설(문학)적 표현들과 과 내가 현실에서 경험한 사건들 그리고 각종 철학, 과학, 예술 관련 서적에서 얻은 지식들이 에세이 형식의 시간적 흐름과 공간의 이동 속에 놓이게 되면 그것은 이야기로 재탄생된다. 이것은 기존의 나의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것들이 융합되어 이야기로 재탄생 되는 과정이다.
이건 지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인문교양서적과는 다른 것이다. 간접적으로 이야기 속에 담아서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 가진 힘이다. 이야기 속에 담긴 정보와 지식은 깨달음 같은 지식이 아니라 체화하고 감화하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이건 이성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 감성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아하!' 하는 자극의 방식이 아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동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편도체는 감정적 사건에 크게 반응하고 해마는 감정적 기억을 더 오래 기억한다.
이성으로 접근하는 지식은 휘발성이 강하다. 하지만 감성으로 접근하는 지식은 각인되고 삶에 나도 모르게 녹아든다. 그래서 문학(이야기)은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가장 오래되고 오래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고 누구나 쓸 수 있다. 소설가와 시인은 자격증이 없다.
가장 오래된 고전이자 경전인 성경 또한 이런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바로 깨달음을 주는 구절과 문장을 보고 그 순간 “아~~!” 하는 감탄을 자아내고 마치 뭔가 터득한 사람처럼 느끼지만 며칠만 지나면 아니 하루만 지나도 그것을 잊고 관성의 법칙에 따라 어제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가. 낯선 이(강연자, 전문가등)의 직설 화법은 순간 뼈를 때리는 앎을 주지만 정작 삶을 변화시키는 건 결국 당신의 주변에 많은 삶의 이야기를 품고(당신이 많이 알고 자주 마주하는) 살아가는 지인들임을 알지 못한다. 변화는 한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계발서 한 권만 읽어도 삶이 바뀌어야 옳다. 앎이 삶이 되려면 시공간을 지나는 기나긴 이야기를 지나야 한다.
나는 낯선 환경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많은 이야기(삶)를 지켜봤다. 그리고 거기에 치우치지 않으려 끊임없이 다른 이야기(책)를 읽었다. 그 속에서 또 괴리와 모순들이 생겨났다. 그것들을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지만 난 철학자도 전문가도 아니다 그냥 명함 없는 한 명의 글쟁이일 뿐이다. 누군가의 뼈를 때리는 말을 할 수도 없고 할 자격도 없다. 그래서 그냥 혼자 써내려 갈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 정반합의 괴리와 모순과 마주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객관(客觀)과 주관(客觀) 사이
그 과정은 다른 이들을 좀 더 이해하려는 과정이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해 왔건만 내가 타인을 이해하려는 과정은 결국 타인이 나를 절대 이해하기 힘든 과정으로 나아가는 모순의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그럴수록 나의 생각을 말하기 힘들어진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객관적인 생각과 행동을 견지해야 하지만 그게 더 힘들어진다.
우리가 아는 많은 신 지식인들과 철학자 그리고 문인들은 아마 분명 세상과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공부하고 또한 연구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국 그들이 전에 없던 아주 주관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이룬 성과와 기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영감을 던져주며 객관화된다.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은 또 다른 아주 주관적인 사람으로 나아가며 다른 이들에게 그들만의 주관적인 생각에 밑거름이 된다.
주관적으로 권위와 인지도를 얻은 사람들은 좀 더 주관적인 사람들을 발굴하고 찾아내려 한다. 조건이 있다. 주관적인 생각이 끈기를 품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기나긴 장편의 스토리는 주관(창의)과 끈기의 싸움이다. 싸움에서 승리하면 이야기는 객관화가 진행된다. 내가 쓰는 이야기도 그렇게 되길 바라본다.
객관과 주관 사이에서…
Writing between objectivity and subjectivity in Mcdona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