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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18. 2024

맥도널드로 간 이유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스물두 번째 이야기 -

“내가 로마 황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그리 심각한 고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매일 9시경에 거리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는 그 재봉사 여자에게 단 한마디 말도 붙여보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훨씬 더 커다란 아픔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동선 속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 만약 그 사람들 중에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로 인해 이성적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일상은 좀 더 흥미로워진다. 사람 간에 생겨나는 호감은 삶을 생기 충만하게 만든다. 특히 이성 간에 생겨나는 호감은 더 그러하다.


과거 쉬는 날이면 글을 쓰기 위해 자주 찾던 카페가 있었다. 주말 아침 카페가 문을 여는 시간 즈음이면 항상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여자 바리스타와 오랜 시간 마주쳤다.

A man ordering coffee at a cafe and a woman barista taking orders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플랫화이트 미디엄 사이즈 한잔 주세요, 아, 하프 슈거 부탁드려요”

“예 알겠습니다, 4불 50입니다. 드시고 가시나요?”

“네”


대화는 항상 비슷하다. 항상 같은 말만 주고받지만 계속 마주치는 시선은 그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품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겨나는 감정에 다소 예민한 편이다. 다만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이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이고 상대가 어떤 감정과 생각을 품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추측건대 상대도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만약 이 시선이 시간을 품고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면...


난 그 카페에서 몰입하며 글을 쓰다가 잠시 사색에 잠겨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면 그녀와 자주 눈이 마주쳤다. 이건 두 가지의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시에 나와 눈이 마주치는 우연이 계속되었거나 아니면 그녀가 나에게 오랜 시간 시선이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라면 이건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이 작용한 것일 것이고 후자라면 한쪽의 관심이 만들어낸 현상일 것이다. 전자는 기적적인 일이고 후자는 인위적인 일이다.  


그녀는 내가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쉬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 것일까? 글이 잠시 멈추고 사색이 필요해 시선을 카페 안 다른 먼 곳으로 옮긴다. 그럴 때마다 자주 그녀와 눈이 맞주쳤다. 그럼 나는 어색해진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곤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고 쓰던 글을 이어나갔다. 적잖은 시간 그 카페에서 많은 글들을 남겼다. 한국인들이 별로 없이 백인들과 다른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이 자주 찾는 아늑한 곳이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가득 찬 백색 소음은 몰입에 좋다. 특이하게도 나는 이국적이고 낯선 곳, 그리고 낯선 이들 사이에 있으면 낯선 다른 세계로 쉽게 빠져든다. 내가 항상 이른 새벽 집 밖으로 나와 집이 아닌 다른 장소를 찾아 글을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상의 익숙한 것들에서 분리되어야 몰입이 잘 된다. 일상에서 나를 잡아두는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잠시 벗어나야 한다.

The image of a man sitting in a cafe writing on a laptop and a female barista making coffee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일찍 오셨네요, 오늘도 플랫화이트 하프 슈거 맞으시죠?”

“아 네…”

“근처에 사시나 봐요? 자주 오시네요”

“아 네…”


자주 마주치면 감정이 생기고 그 감정을 확인하고 싶어 진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덧붙인 인사말에 나는 그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곳은 관계가 아닌 몰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인간답지 못하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남자답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또한 이건 남자의 기준이 아닌 여자의 기준이다. 여자들이 말하는 남자다움과 남자가 말하는 남자다움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기준이 모호해졌음에도 여자들은 항상 과거의 남자다움을 선망한다. 그런 남자가 먼저 다가오길 바란다. 시대가 변해도 유전자는 여전히 그 변화에 발맞춰 갈 수 없다.


나는 남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털털하고 강해지려 노력한다. 수컷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하지 않아도 강한 척해야만 살아남는다. 이건 동물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물론 환경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과거 내가 머물렀던 환경(직장과 직업)이 대부분 남자들이 대부분인 세계였다. 그래서 나의 성향이 그렇게 바뀐 듯하다.

하지만 나의 내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면은 여리고 여성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그것이 과거 내가 처해 있던 환경에 억압되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도 과거의 고착된 성향은 나의 일부가 되어 변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남들 모르게 나의 내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내면의 모습이 나의 글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관계과 몰입의 장소는 분리된다


누군가에게 카페는 일상의 관계의 공간일 것이다. 차와 음식을 나누며 대화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페를 찾는다. 나는 그 카페를 일상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보다 이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상상과 몰입의 시간이 더 소중했다. 뭐 인사를 나누고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의식하는 공간에서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또한 상대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호감이 내면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도 안다. 외모와 내면의 일치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외모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내면의 초라함을 감추기 위함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더 이상 그 낮은 가능성에 지금 나의 소중한 시간을 헌납할 수 없다.


나이가 늘고 생각이 많아지면서 나에게 생긴 이성에 관한 한 가지 확고한 신념이 있다. 그건 나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연인을 만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그런 상대를 만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짐을 깨닫는다. 대화하기 힘든 상대는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없다. 대화가 편안하고 흥미롭지 않으면 함께하는 시간은 서로가 권태가 자리 잡는다. 외모에서 느꼈던 설렘과 호감의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않다.


물론 그녀가 공감과 이해를 나눌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는 만나보고 대화를 해봐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나와 그녀의 관계가 격이 있는 손님과 직원의 관계에서 지인으로 나아가게 되면 그 공간은 더 이상 낯선 공간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럼 나는 그곳에서 몰입을 할 수 없다. 나는 그 공간을 글을 쓰는 공간, 나를 의식하지 않는 무의식의 공간으로 정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는 나를 잊어버릴 수 없다. 역할이 생긴 공간이다. 하지만 글은 몰입에서 나를 잊어버리는 순간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카페는 나에게 그런 공간이었다. 무의식의 비현실로 빠져드는 공간에 의식해야 하는 현실의 대상(사물과 인물)이 있으면 안 된다.


“뭘 주문하시겠어요”

“플랫화이트 하프 슈거요”

“네 4불 50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식어버렸다. 내가 뭘 주문할지 알면서 물어본다. 이건 내가 매일 같은 메뉴를 입력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키오스크와 같다. 요즘은 AI가 자주 찾는 메뉴를 추천해 주는 시대임에도 그녀는 10년 전 길거리 자판기처럼 나를 대한다. (요즘은 키오스가 기억하더라... 즐겨찾기 메뉴에 가장 먼저 뜬다)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호감이 사라지고 반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남녀 사이에 감정이 생겨나면 멈춰 있을 수 없게 된다.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성장 혹은 퇴보이다. 감정은 답보 상태를 견딜 수 없다. 무관심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의 감정이 스며든 공간에서 글을 쓸 수가 없다. 따뜻한 시선이 차갑게 변해버린 게 느껴지면 그곳에 머물며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 나도 인간인지라 따뜻한 시선과 관심을 좀 더 선호한다. 그게 아니라면 예의를 갖춘 적당한 무관심 속에 머물길 원한다.

맥도널드 키오스크

맥도널드로 향한 이유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맥도널드를 찾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방인처럼 잠시 머물며 그 어떤 대인 감정도 생겨나지 않는 대중적인 공간이다. 키오스크에서 주문하고 번호가 불려지면 가서 커피를 가져오는 비대면 시스템이다. 그곳은 감정이 스며들 수 없는 공간이다. 맥도널드는 감정 소모가 없는 공간과 잘 썩지도 않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일상의 바쁨으로 돌아가는 공간이다.  


왜 맥도널드가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자본주의는 감성이 섞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 호주는 아직까지도 그런 감성 있는 단골 카페들이 해외 기업형 카페에 밀려나지 않았다. 아직 감성이 살아있다. 그들은 아침에 서로 안부를 물으며 커피를 주문하고 바리스타가 만든 커피 맛에 길들여진다. 오늘은 조금 쓰고 내일은 조금 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오늘 바리스타의 미묘한 기분과 감정의 변화도 함께 음미한다. 하지만 난 그런 현실의 모든 감정을 느끼면서 비현실에 집중할 수 없다. 이 두 가지의 현실을 분리해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가슴 아프다. 비현실로 들어가는 공간 속에 현실의 감정들이 스며들면…


페소아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오늘도 자본주의의 상징인 공간에서 비자본주의적 행위를 반복한다. 모순적이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곳, 현실의 감정이 없는 곳에서 비현실의 감정들이 생겨난다.


나는 맥도널드에서 

현실과 비현실 사이오고간다.


[불안의 서] in Mc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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