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 [마태복음] 6:26~28 -
매일 아침 숲 속을 산책하면서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숲에 사는 꽃과 새들은 초연하고 태연하게 이슬을 먹고 풀 속의 식물 뿌리와 씨앗을 뜯어먹고 그 속에 숨어있는 벌레를 먹는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근심이나 걱정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실의 삶에서 항상 불안과 근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그래서 매일 아침 공원을 산책하며 나 또한 불안과 근심에서 벗어나 그들이 누리는 평온함을 찾게 된다.
In Castle Hill Heritage Park
“우리는 자연세계로부터, 마태복음에서 언급하는 ‘들의 백합’과 ‘하늘의 새’로부터 집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
매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감옥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연이 알려주는 진리를 알 길이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어떡하면 '잘 먹고 잘 살까'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매일을 살아간다. 한국에선 산을 자주 찾았다. 그땐 내가 왜 주말마다 그렇게 산을 돌아다녔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그냥 산에 올라가면 기분이 좋다는 단순한 느낌이었다. 지금 먼 낯선 땅에 와서야 그 느낌이 품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는 주변 곳곳에 숲과 초원이 펼쳐진 공원이 많아서 그 느낌을 더 많이 더 자주 느낄 수 있다.
“굿모닝, 나는 데이비드(David)이에요”
“굿모닝 저는 토마스(Thomas)입니다”
결국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우연찮게도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매일 이른 새벽 맥도널드에서 서로 눈팅만 하던 한 노년과 중년의 첫 대화가 성사되었다. 난 그렇게 이름도 모르고 또 그를 기억 속에서만 간직한 채 이곳을 떠나게 될 줄 알았다. 감사하다. 그가 먼저 내가 다가와 손 내밀어 준 것에 대해.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작은 감사와 감동을 글로 적기로 마음먹었다.
“What are you doing every early in the morning here, David?”
(데이빗, 당신은 매일 이른 아침 여기서 뭘 하시는 거예요?)
“Ah, I read Bible”
(아, 성경을 읽어요)
오늘 내가 성경 구절로 글을 시작한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그가 매일 새벽 맥도널드에 앉아서 읽고 쓰는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 5~6시 사이 이곳에 나타난다. 그리고 커피 두 잔(롱블랙과 라테)과 맥모닝 하나를 먹는다. 여기 맥도널드 직원들은 그가 나타나면 그가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들을 가져다준다. 단골효과이다. 얼마 전부터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내가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자마자 직원이 롱블랙(아메리카노)을 가져다준다. 주문과 동시에 커피가 나온다.
Discount coupon
“So fast” (엄청 빠르네요)
“I already know what you order every early in the morning” (저는 매일 아침 당신이 뭘 시킬지 이미 알고 있어요)
이제 직원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같은 시간 키오스크에서 주문되는 롱블랙 한잔이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인지시켰다. 존재감이란 반복되는 꾸준함 속에서 나타나는 진리는 변함없다. 그 어떤 사소한 행위도 그것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이 쌓이면 존재감이 드러나고 변화가 생긴다. 그렇게 나의 글도 쌓여왔고 쌓여온 글만큼 나의 존재는 더욱 뚜렷해진다.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7 -
유년 시절 유일하게 기억하던 성경 구절이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이 끌리던 이 구절이 품고 있는 의미를 깨달은 것은 타향 멀리에서 중년이 되고 나서였다. 모든 시작은 미약하지만 반복되는 성실함과 꾸준함이 미약함 존재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간다.
오랜 시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알게 되는 사람들끼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그 노인은 매일 새벽 맥도널드 매장에 첫 번째로 나타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수기로 글을 쓰며 생각에 잠긴다. 가끔씩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아무도 없는 텅 빈 매장 안을 한 번씩 걸어 다니며 심각한 상념에 빠지곤 한다. 그는 아마 성경 구절을 읽으며 과거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 오버랩되며 상념에 젖어든 것이리라. 나처럼...
Leo Tolstoy
“톨스토이의 생각에 따르면 진정한 믿음이 어떤 모습인지 이해하려면 우리는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
말년에 회심한 톨스토이는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농부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다. (때문에 자신의 아내와 큰 갈등과 불화를 겪게 된다) 그가 깨달은 신앙은 당시 교회를 지배하던 여론과 교리 그리고 형식과 전통 같은 것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하고 고된 일상을 살아가는 노동자의 삶 속에서 피어나는 신앙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까지 당하는 굴욕을 당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자신의 내면의 신념을 지켰다. 땀 흘리는 노동과 부조리 속에 핍박받으면서 살아가는 평민의 삶을 떠나서는 그 믿음에 간절함이 지속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비록 청년시절을 방탕하게 보냈지만 말년에 회심하며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내가 톨스토이의 삶을 존경하게 되는 이유이다. 신앙과 믿음은 언제나 고통과 핍박 속에서 더욱 간절해지고 강해짐을 안다. 기독교는 가장 핍박받을 때 가장 빛났다. 신이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은 간절한 믿음과 신앙을 자라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로마서] 5:3-4 -
그런 점에서 톨스토이는 크고 웅장한 교회에서 화려한 의복과 만찬 속에서 신의 말을 마치 자신의 말인 양 떠들며 그들이 마치 그 농민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척하는 모습에 경멸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 속에 섞여 있지 않으며 그들을 이해한다는 말은 여느 정치인들이 하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인기를 얻기 위해 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역사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다르지만 닮아있다. 모순이다.
“저의 셋째가 생겼어요”
내가 5년 동안 지켜봐 온 평민 부부에게 또 아이가 생겼다. 내가 호주에 와서 경험한 일 중에 가장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부이다. 이 부부는 슬하에 두 자녀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그리고 뱃속에 또 새로운 생명이 하나 더 생겼다. 한국으로 치면 국가 유공자 급이다. 나는 처음에 그들이 경제적 여건과 상황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마치 자연 생태계에 존재하는 동물처럼 사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결혼과 출산 양육을 생각할 때 언제나 경제적 여건을 가장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본 이 부부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무책임하다고 느꼈었다.
네 가족 + 1
“부족한 건 언제나 하나님이 채워주시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라고 어디 근심 걱정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항상 내가 이해하기 힘든 말로 나를 이해시키려 했다. 나는 이치에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논리적 비합리적인 사람들과 오랜 시간 같이 밥을 먹으며 지켜보다가 깨달은 것은 인간은 언제나 걱정과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이런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과 걱정보다 모든 것이 해결될 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우리는 통장 잔고에 찍힌 숫자를 보고 믿음을 얻지만 그들은 언제나 성경 속에 적힌 글자들을 보고 믿음을 얻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부모 세대들도 못 먹고 없어도 자녀들을 다 키워냈다. 사실 없어서 못 사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만 보고 믿기 때문에 못 사는 것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이런 불안과 걱정을 조장하여 사람들을 염려하고 불안케 하는 감정들을 이용해 비즈니스를 한다. 보험은 불안의 비즈니스 아니던가?
나는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부족함 때문에 자녀를 키우지 못한다는 건 우리가 모든 일을 세상의 기준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다른 기준에서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 그 모든 기준은 성경 속에 담겨 있고 그들은 매일 그 글을 읽고 기도하며 밀려오는 불안과 걱정을 믿음과 소망으로 바꾸며 살아간다.
A old man who read Bible every early in the morning in Mcdonald
그리고 지금 내 건너편에 앉은 저 노신사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매일 성경 속의 진리를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을 느끼는 것은 분명 살아온 삶의 모든 해답이 그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주 어린 시절 할머니가 갑자기 변해버린 낯선 모습으로 찬송가 카세트테이프가 틀어진 라디오와 낡고 두툼한 성경책 앞에 나를 붙잡아 두었던 건 할머니도 내가 이걸 알길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많이 늦긴 했어도 지금 내가 그때의 낯선 할머니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는 건 지금에야 그때 할머니가 품고 있던 생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간혹 이유 없이 잊히지 않는 기억들을 품고 살아간다. 그 기억들이 왜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이건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건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낯선 땅에 와서 이상한 부부를 만난 것도, 이른 새벽에 맥도널드에서 마주친 저 노인도 모두 우연이지만 이 우연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다만 우리는 그 우연이 품고 있는 의미를 애써 무시하고 살아갈 뿐이다. 신은 그것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신은 계속 알려주고 있었지만 내가 몰랐을 뿐이다.
David meets Thomas who is the disciple of Jesus in Mcdonald
오늘 성경 속의 다윗(데이빗)과 도마(토마스)가 현실의 맥도널드에서 마주했다. 오늘 이 우연이 또 한 편의 글을 만들었다. 삶은 이런 우연들로 이루어져 있고 신은 분명 이런 우연 속에서 당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이유를 숨겨놓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당신은 그런 이해하기 힘든 혹은 잊히지 않는 우연의 기억들이 있는가?
그건 어쩌면 신이 당신께 준 우연일지도 모른다.
[왜 살아야 하는가] the meaning of life and death (in Ho chi min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