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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Sep 08. 2024

기독자가 된다는 것

[왜 살아야 하는가] 미하엘 하우스켈러 - 세번째 -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기독자가 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이 되는 것’과 차이가 없으며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별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만 한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내가 호주에 온 이후 교회라는 곳에 매주 출근 도장을 찍은 이유는 사실 할 일이 없어서였다. 한국에서 일요일은 너무 바쁜 날이었다. 월요일이면 다시 열리는 지옥문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마지막 유흥과 오락을 찾아야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토요일 늦은 밤까지 놀고 마시며 일요일은 오전 내내 시체가 되어 방구석을 뒹굴거렸다. 반복되는 주말의 유흥은 즐겁고 흥미로웠지만 다음날 찾아드는 숙취와 허무감 또한 피해 갈 수 없었다. 뭐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매주 주말의 유흥을 기다리며 한 주를 살고 또 다른 한 주를 견디며 반복되는 삶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재미와 의미 사이


그것을 탈출하려 찾은 또 다른 방법은 등산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야식과 운동부족 그리고 주말이면 폭식과 폭음으로 이어지는 생활은 나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래 주말이라도 좀 유익한 시간을 보내보자”


그렇게 시작한 등산은 일요일 아침 기상시간을 새벽으로 앞당겼다.  그러려면 전날 밤 술을 자제해야 했다. 마셔도 간단히 마시고 다음날 등산을 위해 충분한 수면으로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숲 속의 맑은 공기 속에서 땀 흘리며 오르고 또 오르는 과정은 몸속의 노폐물을 배출하고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덤으로 아름다운 경치와 강한 체력까지 가져다주었다. 점점 등산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건강이 다시 찾아들고 산을 오르며 알게 된 인연들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삶의 또 다른 재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Blue Mountains

그렇게 주말은 형태와 의미는 바뀌었지만 바쁜 건 매한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교회에 나가서 따분한 목사의 설교를 들어줄 여유나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친구들을 함께 매주 나갔던 교회는 사회생활이 시작되고 점점 멀어져 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교복을 벗고 세상에 들어가니 할 수 있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유혹들이 많아서였던 것 같다. 이제 의미가 아닌 재미를 쫓는 삶이 되어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 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지만 주말마다 이리저리 떠돌며 유흥을 즐기던 기억들은 그리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뇌는 재미를 선호하지만 의미를 기억한다.


변화


나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참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한다. 가만히 있질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런 내가 지금 한자리에 앉아서 두세 시간 길게는 네다섯 시간씩 읽고 쓰고 있는 모습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한국에서 교회에 나가는 건 두 가지로 설명된다. 자의와 타의의 두 가지 경우이다. 자의로 나가는 건 간헐적이고 타의로 나가는 건 주기적인 편이다.


첫 번째 자의로 인한 간헐적인 경우는 나에게 힘든 일이 닥쳤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기도하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피조물인 이유는 불가피한 혹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맞닥뜨리면 할 수 있는 것이 기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건 종교를 가진 자나 가지지 않은 자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신이 존재함을 의미하고 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 타의로 인해 주기적으로 나가는 건 관계 때문이었다. 호주로 오기 전 매일 새벽 출근 전에 수영을 배웠다. 새벽 수영반에서 알게 된 친한 지인의 끊임없는 권유에 못 이겨 다시 교회를 나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알다시피 주일 낮 시간은 항상 다른 스케줄로 가득 차 있었기에 보통 일요일 오전 혹은 오후에 예배를 나갈 수 없었다.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럼 저녁에라도 나와요. 저녁엔 특별한 일 없잖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교회는 일요일 저녁에도 예배가 있었다.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었다. 그렇게 매주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그렇게 한 주의 마지막이자 시작인 일요일 저녁에 예배당에 앉아 주말의 유흥으로 지친 몸을 예배당 앉히고 졸음을 쫓아가며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다음날 시작될 지옥을 기다렸다. 이건 오로지 관계를 위한 행위였다. 사회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매주 참석하던 저녁 예배도 그 친한 지인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난 후 발길을 끊었다. 뭐 크게 상처받거나 실망하진 않았다.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며 적잖이 겪어왔던 일이었기에. 또다시 관계로 인해 시작된 종교활동은 결국 관계로 인해 끝이 났다.


진정한 안식일


그리고 호주로 떠났다.


“형님~ 나오세요 교회 가시죠”


그런데 또 시작이다. 생판 처음 보는 동생이 주말이면 내 집 앞에 차를 끌고 나타났다. 이 모습은 어린 시절 일요일이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교회 가자며 집 앞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던 모습을 떠올렸다. 뭐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 아는 사람도 없고 주말이면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다시 그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녔기에 교회의 습성을 잘 안다. 그 습성 중 걱정되는 것 하나가 또 분명 사람들이 다가와 집적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이젠 더 이상 교회 속 관계에서 상처받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어랏! 여긴 성당인가?”


그런데 이 교회는 좀 달랐다. 특별히 내게 다가와 말을 걸거나 관심을 가지는 이가 별로 없었다. 나는 그게 너무 편안했다.


‘와~ 드디어 교회에서 안식을 가지는 구만’


한국에서는 교회만 가면 집사라는 직분을 달고 있는 많은 이들이 와서 인사를 하고 말을 걸고 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예의를 지키고 예의로 답하는 시간 속에 평안은 사라지고 불편이 자리 잡았다. 교회 공동체와 사회 공동체가 별반 다른 게 없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이 관심과 배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심과 배려도 받을 준비가 된 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관심과 배려가 사심과 잇속을 숨기는 행위로 변질된 사회에서 낯선 이의 관심과 배려는 충분히 불편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개인주의로 변해갈 수밖에 없는 건 그 때문 아니던가.  관심과 배려가 상처와 배신으로 변하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심이 불편하다.


"자꾸 이러시면 성당 나갈 겁니다"


나도 교회에서 그런 걸 적잖이 느꼈고 그것들만 없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과거 호주에 오기 전 다니던 교회 지인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적도 있다. 나에게 하나님이란 교회나 성당이나 절이나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나 있는 존재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나를 건드리지 않더라. 나는 홀로 찬양하고 눈을 감고 기도하다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면 감은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교회에서 평안한 안식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예배가 끝이 나면 조용히 교회를 나와 근처 공원을 찾아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주말의 여유를 즐겼다. 주일이 안식일이 되었다.

An Asian man dozing off tired in prayer in a church chapel - 안식일

모두가 알다시피 교회는 일도 많고 행사도 많고 관계도 많다. 그 속에 이리저리 얽히다 보면 주일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집에 오면 지쳐 쓰러진다. 주일과 평일의 삶이 크게 다를 게 없다. 성경에서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는데 교회 사람들은 주일이 안식이 아닌 더 바쁜 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드디어 안식을 찾았다. 홀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사색하며 따뜻한 햇살아래 공원이나 한적한 곳을 찾아 시간을 보냈다. 만약 그때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를 찾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세상의 소음에 잠시 귀를 닫고 자신을 드려다 보는 시간.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런 시간을 가지지 못하며 또한 그런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왜냐 그렇게 훈련되었고 바쁜 것이 올바른 것이라 배워왔다. 주일과 평일 모두 일과 관계 속에서 바쁘게 산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우선인지 모르고 산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것이 훨씬 쉽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


모든 종교는 개인의 수행 과정이 반드시 있다. 불교도 소승에서 대승으로 나아가고 기독교도 천주교에서 시작해 개신교로 나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후자의 형태가 더 대중적이고 보편적이며 발전된 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우월의 관계가 아니다. 선후의 관계이고 대등한 관계이다. 사람들은 이것의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알지 못한다.


나에서 시작해 타인으로


모든 종교는 크게  두 가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첫 번째, 모든 인간은 개인의 해탈과 깨달음 거쳐서 진정한 신앙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예전에 칸트의 철학[진선미의 철학]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알게 되면 그다음은 타인을 향한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말은 개인에서 공동체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내가 진리를 깨달으면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널리 알림에 힘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마누엘 칸트 (1724~1804)

칸트는 그래서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진리의 깨우침이 가장 우선이고 그다음 선행(실천이성비판)을 통해 특정한 타인으로 향하고 예술(판단력비판)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대중화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하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것과 같이 이성적으로 이 진리를 깨닫는 과정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 [순수이성비판]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11년의 시간이 걸렸을 정도이다. 그 이후 나머지 두 저서(실천, 판단력)는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만큼 칸트도 스스로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이 진리를 깨닫는 과정의 시작은 학교나 사회 혹은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학교)과 사회(기업과 공동체)화 과정 속에는 배움(지식과 기술)은 있지만 그곳은 온갖 유혹들도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다. 세속은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학교와 사회에서의 배움은 진리(지혜?!)와는 다른 것이다. 그곳은 법과 질서 안에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훈련 과정이다. 사회 공동체를 유지 발전하기 위한 시스템화의 단계이다. 문제는 우리는 이것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분주하게 살아감으로써 절망과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공허함을 무시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결코 절망을 물리치지는 못한다. 그저 주의를 돌릴 뿐이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우리는 학교를 졸업해 사회에 나가 직장을 가지고 또 가정을 만들고 여러 공동체에 속해 수많은 역할과 책임 그리고 의무를 가지며 살아가게 된다. 그것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거기서 벗어는 것도 어려워진다. 분주한 삶에 익숙해져 버린다. 그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깨달음에서 멀어지는 과정이다. 하지만 사회와 국가는 그들이 자신을 찾고 진리를 깨닫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사회와 국가를 유지되는데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계와 역할과 의무에서 잠시 떠나버리면 사회와 국가와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아주 근시안적 시각과 태도이다.

The image of a man staying in nature, reading and contemplating alone

세상의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잠시 눈과 귀를 닫으면 내면의 것들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서 알 수 없는 것뿐이다. 과거 위인들을 보면 많은 이들이 유배나 투옥 혹은 낙향하여 즉, 수많은 관계와 역할 속에서 벗어나서 단순한 삶 속에서 사색과 집필의 과정을 거쳐 무언가를 발견해 내었다.

The difference between Theravada Buddhism and Mahayana Buddhism

이와 같은 맥락이다. 종교가 개인(소승, 수도)에서 공동체(대승, 교회)로 옮겨간 이유이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종교는 이상을 지향하고 정치는 현실을 지향한다. 방향성이 다르다. 하지만 종교도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타협이 필요하다. 그래서 개인의 깨달음과 해탈보다는 공동체와의 조화를 우선시하게 된 것이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대승불교와 개신교가 국가 운영에 좀 더 친화적이라는 말이다. 국가와 사회는 번영과 발전을 원하는 집단이다. 국제 사회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계이다. 역사는 항상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침략하고 유린하는 과정이었다. 번영과 발전 없이는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기에 국가와 사회는 국민과 시민이 항상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역할과 의무와 책임을 다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간이 되길 바란다.

Praising and praying together in the church community

바쁨과 권태 사이


문제는 그 과정이 너무도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다. 기계가 아니다. 영적인 동물이 기계처럼 살면 지친다. 신기한 건 이런 기계적인 생활에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온전함을 견디지 못한다. 이건 우리가 과거 어떻게 교육받고 훈련되어 온지를 드려다 보면 이해 갈 될 것이다.


'학교종이 땡땡땡'


교육과 훈련은 분단위 시간표가 짜인 공백 없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공백의 시간이 오면 권태가 밀려든다. 신기하지 않은가? 나 또한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이 권태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바쁨과 권태가 반복된다. 인간은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았지'하고 되묻게 된다.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나는 사라지지만 국가와 법인과 공동체는 존속한다(물론 사라질 수도 있다, 약하면).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아주 대답하기 힘든 물음이다. 나는 이것의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 나는 둘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지점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God was bored and created man. Adam was bored alone and Eve was created

“신은 권태로워서 인간을 창조했다. 아담은 혼자 있다 보니 권태로웠고 따라서 이브(하와)가 창조됐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


저자의 비유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에 짝이 필요하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지금은 혼자 먹고 즐기고 놀 수 있는 것들 지천에 깔려 있는 세상이다. 끊임없이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혹들로 권태를 잊으며 살아간다. 권태가 스며들라 치면 또 다른 유혹을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가 빠르게 손가락을 아래위로 움직이며 숏츠와 릴스(음향포함)와 웹툰(음향불포함)을 소비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니던가? 세상의 유혹은 끊임없이 당신의 시선을 잡아두고 권태가 스며들지 않게 하면서 욕망을 자극한다.


저자는 이성(異姓, 암수)의 탄생도 그런 권태를 해결하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문제는 인간을 욕망충족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성욕을 통해 권태를 잊는 것이 아니던가? 자기 자신이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사물과 타인을 이용해 권태를 해결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란 ‘정신(Spirit)’이다.  정신이란 내면성이다. 내면성이란 주체성이다. 다시 말해 순수한 정열, 자기 자신의 영원한 행복에 개인적으로 무한한 관심을 기울이는 정열을 담은 주체성이다.”


- 미하엘 하우스켈러 [왜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


저자는 키르케고르의 입을 빌려 말한다. 결국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그러려면 세상의 시선과 소리를 잠시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세상이 그걸 허락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아간다. 빨리빨리 공부하고 돈 벌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차 사고 집 사고 자녀들 키우고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고 더 좋고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놀이와 음식과 환경을 쫓는다. 끝이 없다. 채워질 수 없는 행복이다.

키르케고르 (1813~1855)

이것이 내면의 나를 보지 못하고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함이다. 사회와 국가와 공동체는 그들에게 바쁨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개인의 존재 의미(소명)를 알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들이 그걸 알게 되면 스스로 세상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타인을 위해 선을 행하고 자신이 깨달은 그것을 널리 알리려 힘쓸 것이다. 그 행위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럼 세상은 지금처럼 갈수록 냉혹하고 어둡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욕망과 권태만 반복되는 분주한 삶을 끊어내야 한다.


♫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

연약함 그대로 사랑하시네

나의 모든 발걸음 주가 아시나니

날 인도 하소서 ♬ ♩

 

-      내 모습 이대로 (Just as I am)  중에서 -


내가 좋아하는 찬양이 있다. 자신을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 신은 당신이 진정한 자신(소명)을 알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 말과 행동이 선한 양심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비록 그것이 세상의 시선과 방향과 다를지라도 그것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 신은 당신 안에 깃들 것이다.


이건 사람마다 얼마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다만 알 때까지 현실의 수많은 유혹과 제약을 견뎌야 한다. 왜 속세를 떠나는 수도자들이 있는지는 이것과 연관이 있다. 유혹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원천 차단해 버린 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럴 수가 없다. (알다시피 가족은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이다)


일상을 살면서 그것들에 다가가려면 일과 관계가 아닌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건 돈(물질)과 권력(명예) 같은 경제적, 정치적 가치가 없는 행위이다. 그것에 가치를 두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경제와 정치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걸 평생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지도 않았으리라. 삶이 단순해지면서 알게 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과정이 진정한 기독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기독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 당신은 자기 자신인가?


독서와 사색 in th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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