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세 가지 질문은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거쳐가야 할 질문이다. 여기저기 서양철학을 기웃거리다 보면 결국 마주치게 되는 인물이다. 서양 철학에 관심을 가진 이상 칸트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다.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면 서양 철학의 절반을 이해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철학은 깊고 방대하며 또 그만큼 난해하기로도 유명하다. 과거 한국에서는 "철학과 = 칸트 학과"라고 불릴 정도로 대부분의 철학 교수들은 칸트 철학에 집중했다. (그럴 만도 하다. 칸트를 이해하면 서양철학 반이상을 섭렵하니까)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마르크스 철학에 집중했다. 그래서 학생운동이 그렇게 심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결론에서 얘기하겠지만 만약 그때 학생들이 마르크스가 아니고 칸트에 매료되었다면 혁명가가 아닌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 뭐 지금의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있지도 않았겠지만...
나 또한 그의 관념론에 대해 대충 알고 있다가 과감히 그의 책을 집어 들었다.
서양철학에서는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그의 철학의 중요성을 높게 산다. 그래서 그의 관념론은 코페르니쿠스 전회(천동설-> 지동설)라고 일컫는다. 이건 마치 예수가 태어나기 전(BC)과 태어난 이후(AD)와 비견할 정도이다. 칸트는 그의 이전에 모든 서양 철학을 통합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이 새로운 뿌리가 되어 또다시 수많은 철학들이 탄생했다.
임마뉴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철학이란? (哲學, Philosophy)
철학이라는 학문은 인간 스스로가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궁극적인 물음에 답을 해가는 과정이다. 인간에서 비롯된 모든 수많은 학문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답을 찾는 철학으로 귀결되게 되어있다. 칸트 또한 그러했다. 많은 이들이 칸트를 철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젊은 시절부터 대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논리학, 형이상학 등 강의를 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천문학 <세계 자연사>과 지리학 <물리 지리학>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다양한 학문에 보이던 관심이 철학 한 곳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가 급기야 수많은 친구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켰고 오랜 시간 자신만의 사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1781) 그가 세상에 가지고 나온 것이 바로 [순수 이성 비판 : the Critique of Pure Reason]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은 이전의 모든 철학 기조를 뒤집어엎는 파격적인 철학이었고 그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해석들로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실천이성비판, 1788], [판단력 비판, 1790]의 3개 시리즈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사유(思惟)에 대해 모든 것을 집대성해내는 기염을 토해내며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칸트 이전, 철학은 별도의 학문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후 대학에 철학과가 처음으로 개설되었고 그는 세계에서 첫 철학과 교수의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모든 학문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분명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학문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결국 철학이라는 인간의 사고를 들여다보는 철학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건 칸트의 철학의 핵심인 관념론의 이치와도 같다. 인간은 대상(수학, 물리, 자연 등등)을 통해 사유하다가 결국 주체인 인간을 통해 사유하고 있음을 깨닫고 인간은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 3대 비판서 (왼쪽부터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요즘 들어 철학의 세계 속으로 심취해가는 것 같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철학에는 크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있다. 나는 둘 다 관심이 많다. 하지만 관심만큼 시간이 많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요즘은 서양철학 쪽에 관심의 중심이 많이 옮겨가고 있다. 과거 니체, 쇼펜하우어, 마르크스,에리히 프롬 등의 관련 서적을 읽고 적지 않은 독후감을 남겼다. 여태껏 내가 만난 철학자들은 감성적인 접근이 가능했다면 칸트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그의 대표 저서 [순수 이성 비판]의 책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지극히 이성적으로 접근해야만 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하고 나면 지극히 감성적 혹은 지성적 그리고 상상적인 사고의 세계를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서론이 길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본론도 길어질 듯하다. ^^;;
앞에서 세 가지 질문 칸트의 철학을 대변한다고 했다. 내가 이해한 저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의 이야기는 항상 나의 상상력이 가미된다는 사실을 염두해 주시길 바란다.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아무런 타이틀이 없는 그냥 책을 좋아하는 어중이떠중이 글쟁이일 뿐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What is Truth? = 眞 (참 진) = 진리
Know the Truth. 칸트의 대답이다.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모든 것이 새롭다. 눈과 귀와 입 그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모든 것들이 정보이며 이 정보들은 감각기관을 통해 뇌로 인지되며 세상을 배워간다. 아기가 성장해 가면서 부모와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교육을 받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회로 들어가 세상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참되고 거짓된 것인지 헷갈리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배움의 시작은 그냥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과정처럼 지식과 정보를 거침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스펀지가 물에 흠뻑 젖으면 무거워진다. 짜내고 걸러내야 한다.
배움의 시기, 진리를 깨닫는 시기
지식을 습득하고 지혜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우리는 정규 교육과정과 심화과정(대학, 대학원)을 통해 이 배움의 시기를 마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평생 이 배움의 시기에만 머물러 있는 자들이 태반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 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 헤매이다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른 체 세상과 작별한다. 그들은 삶의 마지막에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자들이다. 허무한 한숨과 함께 후회로 점철된 삶을 마감한다.
진리는 배움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진리를 알 수 없다. 앎과 삶이 연결되어있어야만 한다. 앎 속에서 삶을 발견하고 삶 속에서 앎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진리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거짓을 진리로 알고 악을 진리로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거짓이 진짜이고 악이 최선이 될 수 있다. 상대적인 것이다.
영화 [친구] 중에서
"자신들은 음지에 살면서도 양지를 더욱 밝고 환하게 해주는 게 건달 아이가?"
- 영화 [친구] 중에서 -
누구도 악을 지향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라는 공간에서 수없이 무한 반복적으로 세뇌되어 왔다. 선과 악의 개념을 정의하고 선을 지향(志向)하고 악을 지양(止揚)하라고... 하지만 교육과 삶은 다르다. 말과 글로 하는 것은 교육이고 몸으로 체험되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삶이 말과 글을 이긴다. 각자가 성장하고 겪어온, 즉 몸으로 부딪쳐 온 환경이 결국 선악과 참과 거짓의 정의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도 음지에 있다는 것,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명분으로 선을 앞세운다.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관념론의 개념으로 접근해 봤을 때 결국 선과 악도 인간이라는 주체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물의 세계 그리고 자연의 세계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악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것이고 그 이유로 이성(理性)이라는 동물이 가지지 않을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진리를 제대로 아는 것
우리는 삶에서 이 첫 단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하지만 세상은 온갖 유혹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은 참과 거짓 그리고 선과 악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기에 수많은 인간들이 배움의 단계에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칸트의 비판 시리즈 첫 번째 [순수이성비판]이 바로 이 부분을 얘기하는 것이다. 칸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성으로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가장 힘들고도 어려운 과정이다. 이 과정을 넘어선 자들이 바로 성인들과 역사 속에 남아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위인들이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들은 진리를 깨우치고 그 다음은 무얼 했던가?
선행이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What is Good? = 선(善, 선할) = 선행 (善行)
Do the Good. 물음에 대한 칸트의 대답이다.
칸트의 두 번째 저서 [실천이성비판]는 진리를 깨우치고 나서 해야 할 행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가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선행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칸트의 성장 배경을 들여다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마구(馬具)의 장인 아버지와 신실한 기독교 신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칸트는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가난한 그가 공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교회였다. 그의 정신에는 유년시절부터 기독교 윤리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갈라디아서 6:9] -
여기서 칸트가 왜 실천을 얘기할 때 선행을 얘기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기독교에서 성경의 진리를 깨우친 자는 반드시 선을 행하도록 되어있다. 이건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나 기타 다른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불법과 악행이 만연한 사회는 사랑이 아닌 증오만이 가득할 뿐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마태복음 24:12~13]-
하지만 선행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함으로써 칸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 선행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어찌 보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국가 및 사회, 관계 공동체 혹은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이 추구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칸트는 진리 다음에 선행이 최우선 되어야 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두 번째 저서 [실천이성비판]에서 윤리를 덕의 개념에서 의무의 개념으로 격상시키려 한다. 진리를 깨우친 자는 무엇이 좋은 것(Good)이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는 말이고 좋은 것은 알고만 있는 게 아니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선행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우친 것이다.
예술이란?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 = What is hope? = 미(美, 아름다울) = 미술(美術)
Do the Art. 칸트의 답변?!
내가 물음표와 느낌표를 붙인 것은 나의 생각이 가미되었다는 뜻이다. 아직 그의 [판단력 비판]을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확신한다. 나의 생각이 그의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표현하는 동물
며칠 전에 썼던 서평[생각이 내가 된다]에서도 언급했지만, 세상의 모든 창조물(사물 off-line과 콘텐츠 on-line)은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만든 창조물은 왜 만들어졌을까라는 물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답은 사물의 기능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삶의 편의를 위해 생각을 물질로 구현해사물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음식의 보관과 위생을 위한 생각에서 그릇이 만들어졌고, 험한 길을 오래 동안 걷고 부상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한 생각에서 신발을, 좀 더 먼 거리를 좀 더 빠른 시간에 이동하고자 하는 생각이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제는 어떤가? 지금은 쓰지도 신지도 않는 그릇과 신발들이 넘쳐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멈춰있는 차들이 대부분이다. 그릇이 많아도 예쁜 그릇만 찾고 신발이 많아도 예쁜 신발만 신으며 자동차도 아무 차나 고르지 않는다. 기능은 이제 평준화되었고 디자인이 우선되는 시대이다. 말 그대로 이쁘면 장땡이다.
"삶의 향유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사유에서는 판단력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하는데, 가령 심미적 판단력의 핵심에는 상상력이 있다. 앞에서 도식화를 설명할 때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창조적인 사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상상력이다. "
- 책 속 인용문 -
인간이 삶을 향유함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에 기초한다. 인간의 역사는 항상 예술과 함께 했다. 인류의 상상력은 원시 시대 동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나긴 밤 사피엔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상상, 먹고사는 것을 제외한)은 그림이 되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표출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살아왔다. 지금은 각자가 자기만의 SNS와 유튜브 계정에 자신의 일상과 생각(관심사)을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존재감을 찾아가는 존재이다. 그 과정 속에서 예술이 탄생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고 춤을 추고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며 자신의 생각을 시각화 청각화 몸짓화 시켜왔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감과 영감을 전달하고 퍼지고 또 퍼져나간다. 우리는 고흐, 로댕, BTS, 베토벤, 톨스토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남긴 예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또 다른 예술가들을 탄생시킨다. 그들의 예술은 인간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들의 예술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삶의 위안과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술 속에는 참과 거짓, 선과 악의 개념이 녹아 있으며 참된 선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예술 작품을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반대다.
"상상력을 중심으로 감성과 지성, 그리고 이성이 주변부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창조적 판단력이다."
- 책 속 인용문 -
칸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자하는 창조적 판단력은 바로 예술인 것이다. 이건 다른 철학자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된다. 내가 좋아하는 니체나 쇼펜하우어 또한 예술을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가장 궁극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 칸트가 주장한 두 번째, 선행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버전인 것이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를 하고 그들의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보전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념론(觀念論,idealism)
이건 바로 칸트의 대명사인 관념론의 핵심이다. 인간에 생각의 원천인 소프트웨어, 뇌를 선하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을 가득 메운 대상과 사물들을 바라보며 오염되는 우리의 생각을, 반대로 생각을 통해서 본다는 그의 관념론처럼 생각을 선하게 만듦으로써 대상과 사물을 선하게 보게 하는 것이다.이게 우리가 자기계발서에서 자주 접하는 긍정과 감사의 효과이다.
"'진선미(眞善美)라는 말이 있듯이 서양철학에서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이론 철학은 제1철학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선의 문제를 다루는 실천철학은 제2의 철학으로, 미의 문제를 다루는 예술철학은 제3철학으로 분류된다."
- 책 속 인용문 -
동양의 철학, 진선미가 바로 그가 말한 세 가지와 일치한다. 진리를 깨닫고 선함을 행하며 미를 창조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삶이라는 것이다. 칸트의 기나긴 사유의 시간은 결국 이 세 가지를 얘기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3대 비판서를 통해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의 궁극적인 질문을 세 가지 질문으로 세분화하고 그에 대한 답을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