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담배를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형제여, 기도에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
- 최인철 [프레임] 중에서 -
위에 말에 동의하는가? 책을 읽다가 이 대화문에서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책 속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해마 깊숙히 숨어있던 과거 나의 기억들이 하나씩으로 떠오르곤 한다.
과거 나는 담배를 즐겨 피웠다. 많이 필 때는 하루에 두 갑씩 피던 시절도 있었다. 알다시피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음주와 흡연이 금지되어 있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점에서 금연 금주는 지향할 습관이다. 하지만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보다 나쁜 습관을 끊는 것이 더 힘든 법이다. 문제는 그럼 흡연자와 음주가는 교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흡연자와 음주가도 신앙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은 신앙인이라면서 술 담배를 저렇게 해서 어떻게?"
내가 아는 한 신부님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하나님을 외치고 있다. 과거 유학시절 알게 된 형님이었는데 오랜 세월에 지나고 그와 연락이 닿았을 땐 그는 신부가 되어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과거의 모습과 신부라는 직업이 전혀 매칭이 되질 않았다. 제작년쯤 그가 호주에 왔을 때 시드니의 어느 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고 신앙에 대해서도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는 다 끊어도 술은 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면서 정신이 더 또렷해지며 대화의 깊이를 더해 갔다는 것이다. 이성을 잃지 않는다면 술이 대화의 물꼬를 트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물론 차나 음료를 마시면서 그런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면 건강상으로 더 좋겠지만... 그런 것을 보면 술담배와 신앙이 자석의 양극단처럼 꼭 분리되어야 하는 건 아닌 듯하다.
"저한테 자꾸 이러시면 이제부터 성당 갈 겁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나를 잘 아는 집사님이 하도 술 담배로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길래 내가 그에게 던진 말이다. 그는 나의 그런 말에 당황해하며 그 이후로 잔소리가 많이 줄었다. 그땐 나에게 성당이든 교회이든 장소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있으며 나는 그 안에서 평안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술과 담배 과거 한국에서 교회를 다닐 때마다 이것이 참 어렵고도 난처한 문제 중에 하나였다. 사회생활에서 술을 피할 수 없고 흡연 또한 유일한 나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찬양하며 노래 부르는 것 또한 알 수 없는 기쁨과 해방감을 가져왔기에 직장생활의 힘든 한 주를 보내고 가끔씩 주말마다 교회를 찾곤 했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 찬양 때는 정신이 맑다가도 설교와 기도를 하면 온갖 잡생각 밀려왔다. 그게 아니면 졸음이 밀려왔다. 성경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고 교회 안에 딱딱한 분위기에 경직되고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2:2]
하나님도 주일은 안식을 취하라고 했다. 과거 나에게 교회라는 공간은 결코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경건함으로 포장된 중압감 그리고 술 담배를 하지 말라는 목사의 훈육을 들으며 항상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공간이었다. 과연 이 예배당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동병상련(同病相憐)?!
늦은 밤 화려한 네온사인이 즐비한 유흥가 골목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낯익은 교회 사람과 마주쳤다. 넥타이는 늘어진 채 목에 걸려있고 바지 안에 갇혀있던 하얀 와이셔츠는 허리띠 밖으로 해방되었다. 정장 재킷은 검지와 중지에 걸려 어깨 위에 얹혀 있다. 나와 같은 모습이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그를 다시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 또 서로 멋쩍은 인사를 나눈다. 그는 아내 옆에 붙어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설교를 듣고 있다. 뒤에서 그 모습에 의아해하며 지켜보다 그의 고개가 한동안 올라오지 않고 아내의 어깨로 기울 때, 나는 그는 그나마 나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주님이 주신 안식의 시간을 온전히 보내고 있구나 하며 왠지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평일의 일상을 감추고 주일에 안식일을 지킨다며 앉아있는 교회라는 공간이 정말 안식의 공간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간 단 하나의 이유는 찬양하며 노래하며 느끼는 그 알 수 없는 환희에 이끌려서였다. 그리고 물론 예배당은 아니지만 나만의 기도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기도는 교회 담벼락 뒤에 숨어서 담배를 입에 물고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뒤로 보이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The Cross on the Church "휴우~ 하나님! 내가 고삐리도 아니고 다 커서까지 이렇게 동네 양아치처럼 담벼락에 뒤에 숨어서 담배나 피워야 겠습니까?"
한숨과 담배 연기를 번갈아 내뱉으며 사는 게 힘들다며 이 힘듦을 좀 덜어달라며 푸념인지 기도인지 모를 말들을 교회 십자가를 향해 내뱉었다. 그것이 나의 기도 시간이었고 교회 담벼락 뒤가 나의 기도 공간이었다. 그때의 나의 기도가 불손했기 때문일까? 아직도 사막 위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띠리리링"
"형제님 어디예요? 셀모임 시작하는데..."
"아네~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교회 집사에게서 전화가 온다. 허겁지겁 담뱃불을 끄고 쏜살같이 예배당 밖에 있는 별도로 떨어져 있는 화장실로 뛰어가 비누를 잔뜩 묻혀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누가 들어올세라 준비해 간 가글로 입안을 잽싸게 헹궈낸다. 그리고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가 눈썹을 찌푸린 집사님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공동체 모임에 참석한다. 내가 그들에게 그렇게 까지 대한 이유는 그들이 내게 보여준 친절과 관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앙이 없는 종교활동은 습관처럼 계속되었다. 그렇게 삶과 신앙은 분리된 채 평행선을 그리며 각자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며 마치 분단된 남북처럼 서로의 명분과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비무장지대 경계에 서서 남과 북을 수시로 오고 가는 이중간첩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자! 여기서 피라!"
"형님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와 줘서"
얼마전 교회에 전에 같이 일하던 동생이 찾아왔다. 내 옆에 앉아 예배시간 내내 따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같이 밥을 먹고 그를 이끌고 교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한 블럭을 더 걸어가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서서 그에게 말했다. 나도 경험했기에 십분 이해하고 공감한다. 얼마나 피고 싶었을지... 10여년 전의 내 모습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지금 술담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앙이 생겨라기 보다는 하지 않을 때 좋은 점이 할 때의 좋은 점보다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건 신앙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술과 담배가 의지와 이성을 무너뜨리는 촉매제가 되고 한국인의 특성상 과도한 음주 문화가 한 몫한 것이기도 하다. 술과 담배를 맛본 자들이 그것들을 멈췄다면 그건 신앙 때문이 아니라 신앙 속에서 배운 인내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끊은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고 있는 것이다. 평생...
"선생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정색을 하며 대답하기를) 형제여, 그건 절대로 안 되네. 기도는 신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그럴 순 없지."
- 최인철 [프레임] 중에서 -
자! 이 대화에는 동의하는가? 서두의 대화문과 상황은 같다. 그런데 무엇이 바뀐 것일까? 프레임이 바뀌었다. 본질은 같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살아간다. 안타깝지만 인간은 프레임 없이 세상을 볼 수 없다. 대상(본질)은 같지만 프레임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프레임의 각도와 방향과 크기는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임을 바꾸면 NO를 YES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보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프레임까지 이해해야 나의 프레임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 가지의 프레임을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서두와 말미의 대화문 중 한가지만 알고 다른 한가지를 생각해 낼 수 없다.
"형! 저는 배경과 인물이 모두 클리어하게 1 배율로 찍어주세요"
"OK"
"자! 근데 이건 어때?"
"오~ 이렇게 찍어도 멋있네요"
나는 사직 찍는 것을 즐기고 좋아한다. 찍어주는 것도 찍히는 것도 다 좋아한다. 사진에 담긴 나의 사진은 이후에 나의 글감이 되기도 하기에 기억력이 나쁜 나는 이미지를 남기며 과거를 기억하려 한다. 내가 찍는 사진에는 나만의 프레임이 있다. 나는 아웃포커싱을 좋아한다. 내가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클리어하고 선명한 사진을 좋아하기도 한다. 모든 곳을 선명하게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한 곳에만 집중해서 보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가 선호하는 프레임이 있다. 프레임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항상 핸드폰 속 누군가의 SNS 사진 그리고 영상들을 수시로 드나들며 들여다보는 것 또한 내가 관심 가지는 사람이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드려다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Focus on 기도? or 담배?
문제는 신은 우리 인간의 눈을 모든 것에 포커싱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시야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것에 클리어하게 볼 수 없다. 시선은 항상 한 곳으로 집중되고 나머지는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어 있다.
기도에 포커싱하면 담배는 아웃포커싱되고 담배에 포커싱하면 기도가 아웃포커싱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다. 상대방을 어디에 포커싱 시키느냐는 당신이 어떻게 프레임을 짜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는가? 그가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지 들여다 보라.
프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