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Nov 26. 2022

무엇을 위한 발전인가?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시라이 사토시 - 세 번째 이야기 -

"그럼에도 바쁜 노예처럼 정신없이 사는 것을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이라 생각해요. 시간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버리고, 소중한 삶을 낭비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바쁜 삶에 중독돼서 그래요. 사회가 교육을 통해 이루려는 최종 목적이죠. 사회가 시킨 데로 생각하고, 하라는 데로 움직이며 땅에 묻혀 흙과 하나가 되는 순간까지 쉼 없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이자 대체 가능한 부속품들, 이것이 내가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는 이유예요."

 

                    - 출처: [영혼의 종족-6 바람은 나부끼는 곳으로 분다] 중에서 by han 브런치 -


  소설의 한 구절을 발췌해 봤다. 오래간만에 올라온 그의 소설을 읽다가 문득 글감이 떠올랐다. 이전에도 그의 소설을 읽다가 떠오른 영감에 글[의지(意志)와 의지(依支)]을 썼던 기억이 있다. 그는 읽다 보면 빠져들고 많은 상념을 일으키는 소설을 쓴다. 부럽고 존경스럽다. 지성을 상상력을 통해 감성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신 분 같다. 그의 소설을 읽다 떠오른 상념을 얘기해 볼까 한다.


"교육은 인간 정신의 자연적인 발전 방향과 정확히 반대로 가르침으로써 정신을 타락시킨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얼마 전 봤던 쇼펜하우어의 글귀가 떠올랐다. 공감하는가?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명제이다. 이건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옳기도 하며 그르기도 할 것 같다.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느냐가 관건이다. 육 받아본 자들이 판단할 문제지만 나는 동의한다. 내가 과거 한국에서 받은 교육은 이 명제와 일치하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어떤 교육 환경에 자랐느냐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의 교육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다. 주어진 교육시스템에 자신을 끼워 맞춰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한다. 만약 그 교육 시스템이 자신과 잘 맞고 잘 적응한다면 그는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재원으로 성장할 것이다. 사회에 큰 불만 없이 그 속에서 산업 자본주의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교육 시스템이 자신과 맞지 않고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 인간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하층 노동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50분 수업 10분간 휴식!"

 

이 룰은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대학 그리고 군생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블루 컬러는 종소리에 맞춰 일하고 휴식하며 화이트 컬러는 상사의 눈치 맞춰 일하고 휴식한다. 요즘은 사무실 안에도 CCTV 카메라가 근무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다. 과거 나는 화이트 컬러였지만 차라리 종소리에 맞춰 일하는 블루컬러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 보는게 더 싫다. 그건 아마도 몇십 년간 단련된 '학교종이 땡땡땡'의 위력이 아니었을까.


이와 같은 교육은 산업자본주의 성장을 위해 만들어진 미국의 테일러 주의(Taylorism)에 기반한 교육 시스템이다. 산업사회는 노동력을 근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근 100년간을 이 노동력에 의존해 발전해 왔다.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유롭다는 착각 안에서 갇혀서 노동할 수 있트레이닝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국가와 사회 이용하는 교육 시스템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학교종이 땡땡땡을 외치며 시간에 맞춰 등교하고 수업을 듣고 동시에 밥을 먹고 동시에 하교하는 이유였다. 이건 결국 산업 사회의 공장과 기업이 돌아가는 시스템에 인간을 끼워 맞추기 위해 트레이닝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은 전쟁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미국의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을 필터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간은 컨베이어 벨트 위 기계의 속도에 맞춰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야만 했다. 미국의 포디즘(Fordism)은 미국을 세계 최강 제조강국으로 올려놓았고 일본은 그것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켜 토요티즘(Toyotism)을 만들었고 미국 다음으로 제조강국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토요티즘 (Toyotism) [사진출처: https://www.shutterstock.com/]

한국은 전후 미국의 산업시스템과 함께 교육 시스템도 그대로 들여왔다. 시간에 맞춰서 잘 외우고 외운 데로 잘하는 학생이 우수한 인재의 기준이 되었다. 학교는 암기능력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를 매기고 상위층은 관리자로 하위층은 노동자로 분류해서 산업사회의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인간의 로봇화


과거 다니던 회사에서는 해마다 생산 라인 직원들에게 시간당 작업량 콘테스트를 해서 사은품과 소정의 휴가비를 제공하는 이벤트를 하곤 했다. 생산라인 작업자들은 기계의 속도에 맞춰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반복적인 손놀림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이라고 우승한 사람은 많은이들의 축하와 추앙을 받곤 했다. 그리고 너도 나도 빨리빨리를 외쳤다. 나도 박수치고 환호하며 그 광경을 구경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인간이 기계가 된 순간을 슬퍼해야 마땅했다. 그 작업자들은 공장 생산 라인이 반자동에서 전자동으로 바뀌면서 그 숙련된 작업 속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사은품이나 휴가비를 지급하지 않아도 쉬지 않고도 1등 인간의 속도를 유지한다. 365일...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 노동자와 그 가족의 전체 생활시간을 자본의 가치 증식에 이용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바꾸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변한다."


             - 마르크스 [자본론]_제15장 기계와 대공업, 제3절 기계제 생산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가장 직접적인 영향 -


쉬지 않는 기계 때문에 인간이 기계가 되어야 하는 슬픈 현실을 맞이했다. 산업화는 결국 인간이 로봇이 되길 강요했다.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쉬지 않고 모든 것을 해내는 노동자가 모범 시민처럼 비춰 쳤다.


근면성실(實)이라는 미명 아래


'근면성실'이라는 말은 마치 인간이 지향해야 덕목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근면(勉) - 부지런히 노력하고, 성실(實) - 정성을 들여 열매를 맺으라'는 말은 마치 쉬지 않고 일해서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라와 같은 뜻이었다. 이건 산업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정말 잘 포장해 표현한 듯한 느낌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일을 하게 된 것일까? 다 쓰지도 먹지도 가지지도 못할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직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목수는 하루에 실질적으로 네 시간 정도 일했고, 무사들은 하루 일하면 이틀은 쉬었는데 일해서 번 돈도 바로 써버렸다는 것이다. 돈은 묵히는 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 책 속 인용문 -


나는 가끔씩 넓고 한적한 공원의 들판을 찾아 나무 그늘 아래 간이 의자를 펼치고 앉아 책을 보고 낮잠을 자고 영감이 오면 글도 좀 쓰고 그러다 배고프면 도시락을 까먹으며 시간을 보내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자유다. 몸도 머리도 자유롭다. 탁 트인 공간은 생각이 뻗어나갈 자유를 맑은 공기와 따사로운 햇살은 몸이 숨 쉴 자유를 준다. 한국에서는 그런 공간이 없어서 주말이면 그렇게 산을 찾아다녔던 모양이다. 무릎에 관절염이 올 때까지... 한국에선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이 여기선 일상이 되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보이는 대로 허둥지둥 따라갈 뿐이죠. 그게 바로 노예예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사람. 입으로 자유를 외치지만 정작 자유가 뭔지 몰라요.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주인인 사회가 명령한 대로, 어려서부터 돈과 유명세를 목표로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에 성인이 돼서도 뭔가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처럼 불안에 시달리죠.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해요."


                      - 출처: [영혼의 종족-6 바람은 나부끼는 곳으로 분다] 중에서 by han 브런치 -


자유민주주의와 산업자본주의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면서 진정한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과거 수십 년간 학교와 직장에서 세뇌되어온 습관 때문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몹시 불안해한다. 자본을 창출할 수 있는(당장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야) 행위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린다. 지금 돈도 안 되는 이런 글을 쓰는 행위가 부끄럽고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까? 스스로가 읽고 쓰고 생각하는 시간이 자본을 창출하는 노동 시간보다 값지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에 값을 매기고 돈과 교환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돈은 몸도 마음도 움직이게 만든다. 자유민주주의와 산업자본주의상호 공존하는 것 같지만 사실 자유민주주의는 산업자본주의 안에 구속되어 있는 듯하다


  교육과 시스템은 무서운 것이다. 이것에 길들여지면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그게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이 산업자본주의를 계속 굴러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하고 소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해야 한다.  


삶은 의무의 연속


학교(의무) - 병역(의무) - 일과 직장(선택적이지만 필수적 생존 의무) - 결혼(욕망의 의무화) - 출산(본능의 의무화) - 양육(의무) - 부양(의무 -> 선택적 의무)


우리의 삶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 온갖 의무들로 점철되어 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 대부분의 시간을 의무만 행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을 때는 이제 몸도 마음도 시들해졌을 때이다. 그때는 국가도 사회도 쓸 만큼 썼다. 그래서 자유를 선사한다. 하지만 노년의 자유는 한가롭지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 이 자유를 누려야 하는지를... 누려본 적이 없으니까. 


여기 호주에서는 사교 모임 장소라는 미명 아래 곳곳에 합법적으로 도박장이 운영된다. 대게 그곳에 평일 대낮에 가보면 자유를 누리는 노년들이 모여있다. 멍한 눈빛으로 슬롯머신 화면만 바라보며 소중한 시간과 돈을 허비한다. 젊어서 열심히 일해 받은 노후연금을 다시 국가(세금)와 기업(이윤)에게 돌려준다. 그들은 은퇴 후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무엇을 어떻게 누려야 할지 알 수 없다. 일만 하다 늙으면 자유를 줘도 쓸 줄 모른다.

호주의 도박장

나 또한 한국에서 근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학교와 회사에서 보내고 그 시스템에서 벗어났을 때 맞이한 구속 없는 자유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가장 불안하고 두렵다는 것을. 시스템에 길들여진 인간이 얻은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공포가 된다. 또다시 구속을 찾게 된다. 우리는 왜 천천히 사색하고 명상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왜 세상은 우리를 계속 바쁨 속으로 몰아넣는 것일까?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는 분명히 주객전도된 상황이다."  


                                                         - 책 속 인용문 -

                                                                               

만약 내가 아직 한국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와 회사의 시스템에 숨을 헐떡이며 쫓아가기 바빴을 것이다. 호주에 와서도 물론 일을 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수많은 관계와 의무적인 일들에서 벗어난 시간 읽고 사색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지금 이런 글도 쓸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구속 없는 자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직도 그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 내가 존재하고 있는 세상은 내가 다시 그 시스템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머리 밀고 속세를 떠나거나 혹은 성직자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산업혁명과 노동 [사진 출처 : quasarzone.com]

"[자본론]을 집필할 당시 마르크스가 보았던 것은 하루 16시간 꽉 채워 노동자를 일하게 하는 세상이었다."

                                                

                                                       - 책 속 인용문 -


2년 전쯤이었다. 아는 지인(한국인)의 부탁으로 지방으로 샵 인테리어 일을 간 적이 있다. 쇼핑센터 그랜드 오픈일에 맞춰서 샵 공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당시 일이 없어 쉬고 있던 터라 시드니에서 꽤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지인이 꽤 괜찮은 급여를 제안하는 바람에 며칠간 일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48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했다. 샵 공사 매니저는 마감을 맞추지 못하면 벌금이 엄청나다며 사람들을 부추기며 숙소로 보내주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현장에서 수도 없이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밤새 일을 했다. 어떤 이는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벽에 기대어 졸면서 일을 했다. 인간은 때론 돈을 위해 인간답지 않은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밖에서 보는 자와 안에서 겪는 자


내 친구 중에는 한 번도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는 자가 있다. 고소 공포증에 폐쇄공포증까지 그 덕분에 그는 밖에서 한국을 볼 수 없다. 내가 해외를 싸돌아 다니면서 보고 경험한 것들을 그에게 얘기하면 저 세상 얘기인 듯 의아해한다. 물론 요즘은 정보가 많아 안에서도 밖의 정보를 알 수 있지만 안에만 있으면 관심도 흥미도 생기지 않는다. 나 또한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지금은 직접 보고 들은 경험과 독서를 통해 많은 것을 알았지만... 물론 우물 안에서 불평불만 없이 산다면 우물 밖을 볼 필요가 없다. 이상하다면 우물 밖으로 나가 볼 필요도 있다.


내가 우물 밖에 나와서 보니 빠르고 편리한 것이 내게 가져다준 것은 느리고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게 능력이었다. 처음 호주에 와서 끊임없이 짜증과 불평불만이 쏟아진 이유는 알고 보니 빠름과 편리에 길들여져서였다. 한국인이 처음 호주에 와서 살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이 느림과 불편이다. 현지인들에게 그것은 그냥 일상일 뿐이다. 결국 빠름과 느림, 편리와 불편도 상대적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느리고 불편한 것이 익숙해지고 당연해지면 짜증 내던 공백의 시간을 즐기게 된다. (문제는 한국인은 여기서도 그것들을 빠르게 그리고 편리하게 바꾸려 노력 중이다. 한강의 기적을 여기서도...ㅋ) 그것이 바로 사유(생각)의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하늘을 보고 자연을 보고 하릴없이 앉아서 혹은 걸으면서 무언가를 관찰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한다. 그러면서 내 안에 깊이 숨어 있던 것들 정체성과 나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그럼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세상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밖에 서서 세상을 관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아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바쁘게 산다는 게 좋다는 그 말


세계에서 가장 바쁜 나라 중에 하나인 한국은 속도 경쟁에서라면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차라리 바쁜 게 좋아 잡생각도 안 나고 시간 나봐야 돈만 쓰고"


과거 이런 얘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쁜 삶이 좋다는 말은 바쁘지 않은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생기면 먹고 소비하고 유흥을 즐기기에 바빴다. 우리는 시간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른다. 인간은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자본을 증식시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산업혁명 이래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에 쏟아부었다. 그 바빴던 시간이 가져온 건 무엇인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200년 전 칸트가 말했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이 세 가지의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진리를 찾고 배우며 선을 행하고 예술로 표현하고 널리 퍼뜨리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진정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고.


이제는 우리는 경제 발전이 아니고 인간 발전을 위해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 않을까?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표지 사진 출처 : https://themusicnetwork.com/city-of-sydney-to-go-24-hours-but-live-music-misses-out/]


매거진의 이전글 술과 담배 그리고 신앙에 관한 일화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