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Sep 15. 2024

꿈을 잃어버리다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스물다섯 번째 -

“어떤 사람은 커다란 꿈을 품고 살아가, 그 꿈을 잃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꿈 없이 살다가, 역시 그 꿈을 잃어버린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마지막 날이다.


돌아가야 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경험을 한다. 이런 경험을 많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아마도 삶의 큰 변화를 많이 겪은 자가 아닐까? 익숙해진 환경을 떠나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하는 자는 지나온 삶을 회고하게 된다. 나는 지금 공항에서 잠시 뒤 떠날 비행기를 기다리며 지나온 날들을 회상한다.

At the airport (Sydney)

편도행 비행기표는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아니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기약 없이 떠난다는 것은 그곳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떠나야 함을 의미한다. 익숙해진 모든 것들과 작별해야 한다. 팔 수 있는 건 팔고 줄 수 있는 건 주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 이곳에서도 항상 이사를 많이 다녀서인지 40여 년의 삶에 비하면 남들보다는 아주 가벼웠다. 하지만 먼 길을 떠날 때는 더 많은 것을 내려놔야 한다.


28인치 여행 캐리어 하나에 6년의 시간을 담아야 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 그리고 여행에서 가장 필수적인 물건을 담아야 했다. 그냥 보통의 여행이었다면 좀 더 쉬웠으리라. 왜냐 그냥 여행에서 필수적인 것만 담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떠나는 것은 추억의 물건 또한 챙겨야 한다. 그래서 더욱 힘들다. 중량은 15kg에 제한된다. 백팩 하나까지 합쳐도 고작 20kg 정도의 짐만 허락되었다. 방안에 보이는 모든 물건들을 정리했다. 

떠나는 자는 다음 사람을 위해 그 흔적들을 모두 지워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흔적들을 너무 많이 남겼다. 그래서 지구는 아프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그리워하면서도 현재의 흔적을 남기며 미래를 희망한다.

At the airport (Nha Trang)

이제 내게 남은 건 머릿속의 기억들 밖에 없다. 


나는 지금 떠나는 길 위에서 그 기억들을 더듬으며 그것들을 정리하고 있다. 사실 지금 적고 있는 과거의 회고가 이후 다시 또 어떻게 바뀌게 될지 모르지만 다만 확실한 건 나중에 이때의 기억을 더듬을 때 지금의 회고록이 아마도 많은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삶과 환경의 큰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두 가지였지만 며칠 뒤 이 글을 다시 퇴고하며 한 가지가 더 떠올라 세 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 세 번째가 아닐까? 


“꿈을 이루었거나 아니면 그 꿈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현실이 그 꿈을 방해하거나…”


꿈이 없는 사람은 해당되지 않지만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 가지의 상황 중에 어느 한 가지에는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난 세 번째의 상황에 놓여있다. 생각해 보면 항상 이 세 번째의 상황만을 경험했던 것 같다. 신기한 건 이 세 번째 상황은 꿈을 더욱더 간절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천명관 [나의 삼촌 브루스 리] in Saigon

“세상에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서 꿈은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동안에만 행복한 거야”


- 천명관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중에서 -


여행 중에 읽고 있던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구절이었다.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삼촌 또한 ‘이소룡’이 될 거라는 허황되고 막연한 꿈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꿈이 그의 고되고 힘든 삶을 견디고 이어가는 원동력이었다. 만약 그 꿈이 없었더라면 삼촌의 삶은 좀비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처럼 의욕도 눈빛도 없이 물질과 계좌 잔고를 채우는 것을 꿈이라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꿈(Dream)은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꿈이다.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꿈을 잃어버렸다.


꿈을 이루면 꿈만 같다. 하지만 다시는 그 꿈을 꿀 수 없게 된다. 이런 꿈은 보통 더 큰 이상향을 가지지 못하는 꿈을 꾼 자들이다. 예를 들면 ‘내년엔 꼭 포르셰를 살 거야’, ‘5년 안에 10억을 모을 거야’, ‘그 자식보다 더 빨리 높은 자리에 올라갈 거야’, 재물과 지위에 대한 꿈은 그것을 이루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더 많은 재물과 지위를 향해 달려간다. 오로지 자신만을 욕망 충족을 위한 삶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꿈이란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이라야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류의 꿈은 멀리 높은 정상이 보이는 것 같지만 상실의 숲에 갇혀 헤매는 것과 같다.


이런 류의 꿈은 처음에 아주 간절하다. 아마 적지 않은 시간 생활고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자일 것이다. 그래서 돈과 물질에 대한 집착이 꿈이 되어버린 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꿈을 꾸며 산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꿈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그것을 꿈을 이뤄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뿐이다.

Some people live with big dreams, and they lose them. Some people live without dreams, but they also

꿈도 없이 살다가 꿈을 잃어버렸다.


가장 불쌍한 사람이 아닐까. 꿈이 없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불행한 삶이다. 비록 앞에서 설명한 물질과 지위에 대한 꿈, 아니 욕망이라도 있는 자는 삶을 의욕적으로 살아가기라도 하지만 이 케이스는 그냥 생물학적인 존재만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배고프면 먹이를 먹고 때가 흥분하면 교미를 하고 화가 나면 나면 죽이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아니 동물은 먹이를 구하고 교미의 상대를 유혹하고 경쟁자를 죽이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지만 이런 류의 인간은 그런 것도 없다. 짐승보다 못하다.


이런 류의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예시가 뭘까? 아마도 술과 마약 같은 중독에 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이건 당장의 쾌락, 즉 시간의 경과 없이 바로바로 그때 그때 욕망을 성취했을 때 느끼는 기분을 노력 없이 느끼려는 자들이다. 화학적인 약물을 통해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 분비를 유도하고 통제하는 자들이다. 그렇게 뇌의 자율신경계는 영구히 손상된다. 돌이킬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환경을 조성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들이 왜 술과 마약의 유혹으로 갈 수밖에 없었나? 물론 모든 경우를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삶의 의욕을 상실한 자들, 즉 인내와 성실과 정직함을 지키려는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고 이용당하기만 하는 사회일수록 이런 중독이 만연해진다. 노력이 성취와 보상으로 이어지는 호르몬 변화를 경험하기 힘든 사회의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이다.


비록 이런 인내와 성실과 정직함이 다소 비효율적이고 때론 미련해 보이고 우둔해 보일지라도 그것들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은 대가일 수 있다. 다들 신속하고 효율적이고 거짓으로 목표와 성과를 이루려는 것이 보편화된 세상은 그런 자들이 설 자리를 앗아가 버린다. 하지만 그 자리는 누군가가 대신해야만 하는 자리이다. 그 자리를 지금 누가 대신하고 있는가? 그런 환경에 익숙하게 살아온 자들 빈민국의 해외노동자들이 대신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그렇게 변해갈 것이다. 우리는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 그들을 이용할 뿐이다. 왜냐 시간이 돈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는 모든 국민의 부귀(富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부는 경제발전이고 귀는 인간의 존엄(귀함)이다.  부와 귀는 시소와 같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치국(治國 :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어렵다.


꿈과 환경의 상관성

 

환경이 바뀌는 것은 꿈이 방해받거나 혹은 꿈을 향해가는 것일 수 있다. 만약 꿈을 이루는 과정이 순탄하다면 그 꿈은 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꿈이 계속 난관에 부딪치고 방해를 받는다면 그 꿈은 포기되거나 혹은 더욱 간절해진다.


전자(포기하는 자)는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욕망과 중독)의 경우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꿈의 허황됨을 깨닫고 현실에 순응하며 세상이 말하는 꿈, 즉 눈에 보이는 부와 지위를 꿈꾸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한탄하며 노력하고 인내해봐야 성취나 만족이 없다고 결론 내리면 노력과 인내 없이 그것을 얻는 방법을 찾는다. 중독이다. 더 이상 인간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길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이 인간이 아닌 길로 빠뜨리면서까지 부를 이루려는 잔인한 존재이다.

Coca Cola cherry

“콜라 한 캔의 가격은 얼마인가?”


당신은 이 질문에 얼마라고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가? 과거엔 상품의 포장에 ‘소비자 권장가’라는 문구와 함께 가격이 표시되어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마트에 가서 상품들을 보면 이제 그런 ‘소비자 권장가’라는 문구가 적힌 제품 포장을 찾아볼 수 없다. 상품 진열대에 언제나 바뀔 수 있는 별도로 적힌 가격표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젠 같은 상품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가격이 변화기 때문 아니던가? 콜라 한 캔이 대형 마트에서 500원이지만 고급 호텔 식당에서는 5,000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뙤약볕이 쏟아지는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아래에서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는 누군가에겐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가 될 수 있다. 그때는 부르는 게 값이다.


인간의 상품화


인간도 상품화 되는 곳이 산업자본주의 세상 아니던가? 그 말은 내가 어떤 환경과 시스템 그리고 관계 속에 머무느냐에 따라 나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 우리는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변화하며 발버둥 쳐도 꿈과 계속 멀어지는 상황이 나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스스로의 질책하며 더욱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자신을 갈아 넣는 삶을 살아왔다. 물론 이것이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시스템과 환경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이민을 떠나고 직장을 옮기고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경험하지 않고는 판단할 수 없다. 물론 노력도 없고 인내도 없이 계속 환경만 탓하고 바꾸는 자는 현실도피이다. 하지만 노력과 인내가 이용만 당하는 환경 속에 있던 자는 희생양이다. 자신의 가치와 노력을 인정하고 빛내줄 수 있는 환경과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익숙한 곳에만 머물려 한다.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한다.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채찍질만 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른 수건만 쥐어짜는 자들이다. 아프다. 나올 것도 없는 마른 수건을 짜면 손만 아프지 않던가? 그때는 수건을 짜주는 사람이 아닌 마른 수건을 원하는 자를 찾아 나서야 한다.

Besakih Great Temple

“왜 나를 계속 이리저리 떠돌게 하시나이까?”


나는 과거 교회 예배당에 앉아서 이런 기도를 자주 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것에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환경의 변화는 언제나 고달팠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고 짐을 싸기 위해 짐을 버려야 하고 또 다른 새로운 환경과 관계에 적응해야 했다. 이건 경제학적으로 아주 비효율적이다. 기회비용이 너무 많다. 작업 전환과 환경 적응이라는 기회비용을 계속 지불하는 삶이다. 버리고 가면 또 필요해서 사야 하고 새로운 관계는 더 처음에 많은 관심과 예의를 필요로 하며 이건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렇다 할 큰 성취와 보상 없이 계속되면 사람은 지치게 된다. 나도 그렇게 지쳐가고 있었다.

Sunrise in Mt Batur

“난 지금 여행을 다니는 거야 그리고 나의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자가 되는 것이야, 여행은 내가 기록할 것들을 기억하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을 바꿨다. 생각이 바뀌니 모든 게 다르게 느껴지더라. 작가와 기록하는 자가 무엇이 다른가? 다르다. 작가라면 직업을 떠올리게 된다. 직업이란 그것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자를 말한다.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경제활동을 통해 소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알다시피 모든 일이 생계와 연결되면 구속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것이 생계로 연결되는 것만큼 행운인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기록했지만 소득을 만들어내지 않았고 기록은 계속되었으며 그 기록을 왜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하는 수많은 시간을 지나옴에도 아직까지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어지자. 그것이 꿈이 되었다. 영원히 이뤄지지 않는 꿈. 기록하는 자가 된다는 건 이미 이루어졌고 계속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래야 하기에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다.


현재진행형의 꿈


진정한 꿈이란 항상 현재 진행형이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꿈이다. 그래야 계속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꿈을 이루기 위해, 즉 현실의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수 있게 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꿈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모두 꿈을 잃어버린다. 

꿈이란 포기할 수 없으며 또한 이뤄질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그것이 꿈의 진정한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꿈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이라.


(서두의 페소아의 문장에 이어서…)


“그리고 누군가는 그 꿈을 이루어 버리고 꿈을 잃어버린다.”


- 글짓는 목수 -


불안의 서 in 아테네
이전 26화 기독자가 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