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속 마음을 훤히 들켜버리면 그 사람들 앞에 다가가기 어렵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편이다. 더욱이 나는 상대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상대는 나의 마음속에 혹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드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불편한 것은 없다. 내가 글을 쓰고 것을 알고 내가 쓰는 글을 보는 자들과 일상을 함께하면 생기는 현상이다.
문제는 나도 그런 상대의 마음속에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상대가 나를 드려다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나는 의외로 그런 직관이 뛰어난 편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의 표정과 눈빛 그리고 행동을 보고 그런 것들을 직관적으로 알아챈다. 그것이 맞다 틀리다를 증명할 길은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들이 맞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더라. 물론 드러나지 않고 영원히 밝혀지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다면 그냥 나의 직관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직관적 상상이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계속 쓸 수 있다. 확인된 사실(그것도 진실인지는 알 수 없는)은 상상의 폭과 깊이를 줄여버린다. 차라리 확인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확인되지 않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참지 못한다. 그건 사람들이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없기에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확인해 봐야 한다. 그들은 상상이 사실이 되는 과정을 즐길 뿐이다. 상상을 즐기지 못한다.
언론인과 법조인
물적, 정황적 증거를 통한 사실 확인, 즉 이성적으로 사실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바로 언론인들과 법조인들이 아닐까? 그들은 언제나 사실과 증거에 입각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베일에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는 일을 하는 자들이다.
Prosecutors and lawyers also end up connecting the evidence or precedents they find and creating...
“근데 검사나 변호사도 결국 자신이 찾은 증거나 판례들을 연결시키고 맥락 있는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드는 거 아냐?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 잘 쓰여진 한 편의 소설이랑 다를게 뭐야?”
얼마 전 과거 법을 공부한 지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중 그가 말하는 법조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법에 대해서는 일도 모르지만 그들이 법정에서 사람들(배심원)과 판사 앞에서 하는 말과 행위는 모두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설득은 모두 객관적인 사실과 증거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 사실과 증거가 채택되고 진실이 되는 것은 사람이 판단하고 결정한다.
옳고 그름 그리고 진실과 거짓은 결국 설득하는 능력, 즉 스토리텔링의 완벽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것이 완벽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인간이 판단한 것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오판을 한다. 오판도 진실이 될 수 있는 곳이 세상이다. 이건 진실과 거짓에 상관없이 죄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죄는 유무를 판단하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현실의 죄는 가공되는 과정이다. 죄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벌어질 것이다. 이 많은 죄들이 언론인과 법조인에 의해 가공되어 밝혀지는 것들만이 죄가 되는 세상이다. 마치 기획과 설계와 제조를 통해 만들어지는 상품처럼… 법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설득 –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함 [네이버 국어사전]
그들이 하는 설득의 과정은 다수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과 동일하게 혹은 유사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이건 말 그대로 내편을 많이 늘려가는 게임인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내 쪽으로 움직이는 언변을 구사하는 자가 승리하는 게임과 같다. 물론 다수를 설득시켰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만은 아니다. 결정권은 두 세명의 개인(판사)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수를 설득시켰더라도 그 한 명이 설득되지 않는다면 결과는 나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판정 난다. 재판은 생각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과정이지만 그 판단 또한 사람이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해와 이해 사이
스토리의 승리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승리를 의미한다. 인간은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물론 스토리가 이해관계를 뛰어넘거나 혹은 이해관계와 스토리와 일치하면 금상첨화이다. 이 이해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를 품고 있다.
*이해(理解) –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혹은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이해(利害) – 이익과 손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이해는 동음 이의어이다. 우리가 재판을 하는 것은 첫 번째의 과정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해관계 속에서 머무는 존재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이 판단 과정에 자신(개인)의 이익과 손해 여부의 판단 과정이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이건 비공개이며 개인의 판단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세상이 절대 공정하고 정의로울 수 없는 이유이고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세상은 서로가 이해하는 세상을 지향하지만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생각해야만 하는 모순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척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면서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는 부딪친다. 같지만 다르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모든 부부는 마음속 깊숙한 곳, 영혼이 악마에게 속한 바로 그 지점에, 실제의 남편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남자의 이미지를 숨겨놓고 있고, 실제의 아내와는 완전히 다른 외양인, 수시로 변하는 세련된 여인의 모습을 숨겨놓고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의 이 문장이 부적절해 보이는가? 만약 이 문장을 읽고 이해와 공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마침 옆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정확히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면 마음이 뜨끔 할 것이다. 이건 여자들이 극장에서 로맨스 영화 속 멋진 남자를 보며 감동과 감격에 빠져있다가 영화가 끝나고 옆에 앉아 있는 오징어를 볼 때의 마음과 같다. 감동과 흥분은 사라지고 현실의 초라함과 냉혹함이 짊어진 자가 옆에 앉아 있다.
A wife who is infatuated with the male lead in a drama
하지만 상관없다. 우리는 그 마음을 상대에 말하지 않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마음은 현실의 삶에 그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적으로 뜨끔 한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상상의 영역이고 이것으로 우리는 서로를 정죄(定罪- 죄가 있다고 단정함)하고 단죄할 수 없다.
우리에겐 상상의 자유가 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세상에 그 모든 이야기(문학과 음악 그리고 예술등)들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선을 지향하고 아름다움을 지향하게 하려면 악을 얘기하고 더러움을 표현해야 한다. 비교와 대비의 효과를 통해 선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 [마태복음] 5:27~28 –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 중에서 누구 하나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세상은 항상 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성욕을 자극하는 수많은 유혹들로 가득하다. 이건 또한 돈 되는 산업이다. 우리가 현실에 몸담고 살아가는 이상 이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저는 음란한 영상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의 이런 죄를 고백합니다, 용서하옵소서”
언젠가 교회 예배당에서 한 청년의 간증을 들었다. 아마 적잖은 사람들이 속으로 당황했을 것이다. 남자들은 ‘헐~’하며 당황했을 것이고 여자들은 ‘헉!’하며 속으로 당황했을지도. 남자면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지만 그것을 만인 앞에 고백하는 그 남자를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여자들은 어땠을까? 나는 여자가 아니라 확언할 수 없지만, 성욕이 남들보다 좀 더 강한 여자라면 공감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속으로 그를 쓰레기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자신의 더러움보다 타인의 더러움만 먼저 보는 게 인간이다. ‘똥 뭍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생긴 이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는 건, 이런 상황을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굳이 왜 자신의 어둡고 음흉한 속마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자신을 깎아내리냐는 것이다. 다들 자신을 끌어올리고 높이기도 바쁜 세상에서 말이다. 그냥 성스럽고거룩한 표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자신을 좀 더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말이다.
난 그런 류의 이야기는 이젠 재미도 감흥도 없다. 그래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직도 그 청년의 간증을 기억하는 건 나의 편도체(감정을 품은 기억)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편도체를 자극한 기억은 해마 속에 오래도록 저장되고 수시로 나타난다.
이런 행위는 그 개인에도 우리에게도 모두 의미가 있다. 다만 그 의미가 시차를 가지고 나타날 뿐이다. 당장 이 행위는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변화를 의미하고 타인에겐 불편한 자극을 선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타인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다자이 오사무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
고해성사같은 문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 속 양심을 자극한 것 때문 아니던가. 읽을 때 불쾌한 공감이 밀려온다. 작가를 이해하더라도 공감할 순 없다. 왜냐 자신은 이해관계에 얽혀서 자신을 도저히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숨어서 보고 들으며 위로를 얻는 과정이다.
죄를 고백하는 것, 여기서 말하는 죄는 인간 세상이 정의하는 죄의 개념이 아니다. 이건 이상 세계가 지향하는 죄의 개념이다. 현실세계의 죄는 타인에 의해 밝혀진 죄이고 이상세계는 마음속에 품은 것조차도 죄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세상에 죄인이 아닌 자가 없다.
글쓰기 (Writing)
글쓰기는 죄다.
나 또한 죄인이다. 어찌 보면 상상을 하는 자는 모두 죄인이다. 글을 쓰고 예술을 하며 자신의 상상을 표현하는 자는 더 큰 죄인이다. 다만 표현하지 않는 자들 보단 그 죄가 덜하지 않을까.(개인적으로다가...) 죄를 고백하되 허구와 상상을 뒤섞어서 고백한다는 것뿐이다. 이야기를 쓰는 자는 자신의 글 속에 담긴 선악을 타인들이 보고 그들 또한 자신의 그것을 들여다보게 하려 함이다. 다만 여기서 어린 아이들이 하는 상상은 예외이다. 그들의 상상에는 악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있다 해도 그들은 아직 선악을 구분할 줄 모르기에 악을 알면서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른은 알면서도 상상한다. 악의적인 상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상상을 하는 것이고 상상은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것을 글이라는 형태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예술 또한 형태만 다를 뿐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을 소리와 그림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모든 예술은 선과 악의 품고 있다. 이 말은 이것을 표현하는 예술가들은 악을 상상하고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훌륭한 예술가일수록 이 표현은 리얼하며 강력한 악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은 이것을 통해 선을 지향한다. 악을 통해 선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과 문학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만약 이게 아니라면 이건 고전이 될 수 없다. 협화음과 불협화음,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조화와 모순, 음과 양을 모두 품고 있는 이야기만이 고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이야기는 언제나 선을 지향하는 것을 그린다. 비록 그것이 악으로 끝날지라도(비극).
그런 점에서 이야기를 쓰고 예술을 하는 자는 죄를 범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내가 매주 교회에 나가 성경을 읽으면서 항상 뜨끔한 마음을 가지며 자극받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