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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06. 2024

진실에서 멀어지는 이유

[모순] 양귀자

여행이 끝났다.


내 생애 가장 긴 여행이었다. 아니 아직 가장 긴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니 나중엔 이 여행은 두 번째로 긴 여행이 되지 않을까? 아직까지는. 하지만 인생이라는 가장 긴 여행은 끝나면 더 이상 기록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여행은 항상 현재 진행형의 형태로 기록된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나트랑에서




“내게 있어 ‘진실’은 좀 식혀서 마셔야 하는 국물과 같다”


- 양귀자 [모순] 중에서 -


오랜 시간 글을 써온 사람이라면 아마 공감하는 말이 아닐까? 글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같은 글이라도 그 와닿는 느낌은 달라진다. 이건 시간의 경과에 따른 축적된 경험과 변화한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일까? 아니 뭐라고 딱히 해석이 불가능하다. 나는 이걸 인지하지만 논리적 혹은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건 인간이 설명 불가능한 영역인지도 모른다.


인생이 끝나면 나는 그것을 식혀서 다시 마실 일은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의 진실은 내가 알 수 없다. 이건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나도 모르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간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과거 어둠 속에서 빛을 품고 살아간 자(성인과 위인등)들은 생명의 불씨가 꺼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다시 서서히 빛을 발한다. 이건 마치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이 꺼지고 바람이 불어와 숯불이 다시 달아오르는 것과 같다. 그렇게 숯불의 열기는 은은하게 오래간다.


지나온 역사는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유이다. 역사를 잊은 자는 진실을 가리고 싶은 자이다. 왜냐 진실은 누군가에겐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선악의 대결구도였다. 문제는 언제나 승자가 선이 된다는 것이다. 승자 입장에선 미화이고 패자 입장에서는 왜곡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더 지나면 진실이 드러난다. 패자가 살아남기만 한다면 말이다. 자세를 낮추고 힘을 키우고 어느 순간 역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는 날이 다. 그러면 가려졌던 진실들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진실은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 진실을 불편해하는 많은 이들이 그것을 안간힘을 다해 막고 있기 때문이다.

숯불은 바람을 불어주면 다시 불이 붙는다

진실을 품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흐르면 보는 글도 쓰는 글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세월은 느낌을 바꾼다. 하루하루가 가르쳐 주지 않던 것을 한 해 한 해가 알려준다. 그래서 같은 책도 다른 책이 될 수 있다. 여러 번 읽게 된다. 읽을 때마다 그 깊이를 더해간다. 글짓기도 그렇다. 쓰면 쓸수록 새로운 것들에 점점 다가간다. 아마 진실(진리)에 다가가는 과정일 것이다.


또다시 공모전을 준비하며 과거 썼던 소설 초고들을 끄집어내어 퇴고를 하고 있다. 새롭다. 빠져든다. 내가 쓴 글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세상에서 완전하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은 자신이 쓴 글 밖에 없다. 과거 내가 쓴 글을 보고 있으면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과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들 또한 눈에 들어온다. 퇴고이다. 글도 농사처럼 때가 되어야 수확이 가능한 그런 것이다. 시간을 견디고 익어가며 본질을 헷갈리게 하고 영양을 뺏어가는 잡초들도 거둬 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쓰지만 뭘 쓰는지…


나는 내가 쓰는 글이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저 받아쓰는 것이리라.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서.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할 것이다. 자신이 경험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쓰면서 무슨 알 수 없는 존재가 글을 쓴다고 헛소리를 하냐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 난 묻고 싶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모두 내가 의도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인가?”


오늘 아침 내가 이 카페에 들어와 앉아서 이 글을 쓰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사실 좀 전 카페에 걸어오면서 오늘 오전에 한 달 동안의 배낭여행을 되돌아보며 기행문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가 나오기 전까지 어제 찍은 핸드폰 사진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어제 서점에서 잠시 읽은 양귀자 [모순] 속 글귀 사진 한 장이 지금의 에세이를 써내려 가게하고 있다.


물론 나는 이 영감을 무시하고 쓰려던 기행문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강렬한 영감이 가져다준 상념들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쓰려던 기행문은 쓰려고 해도 써지질 않더라. 하얀 화면에 커서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아직 때가 도래하지 않았음이리라. 여행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법이다. 여행의 기억은 머릿속 그리고 사진 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다시 되새김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번뜩 떠오른 이 영감은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초고는 첫 문장이 주는 영감에서 시작한다. 초고를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초고는 입에 넣는 것이고 퇴고는 넣은 것을 소화하는 과정이다. 입에 넣지 않으면 소화시킬 것도 없다.


이 모든 건 내가 의도한 것인가? 아니지 않은가? 그럼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게 벌어지는 이 모든 상황과 만나게 되는 인연들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는 어떤 존재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세상에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천명관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중에서 -


어느 누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인생을 살다 가는가? 어느 누가 죽음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에 100% 만족하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는가? 있다면 그 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을 살다간 자이다. 마치 잠시 지구별에 들렀다가 여행 왔다가 떠나가는 외계인처럼… 그냥 잠시 구경만 하다가 떠나는 이방인 같이…


소설은 허구를 통해 진실로 연결되는 과정


소설가는 허구를 만드는 직업이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소설가가 진실을 만드는 직업이라면 소설가라는 직업은 없어질 것이다. 진실을 만드는 직업은 권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권력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다. 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다. 그래서 소설가는 진실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의 말을 맹신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프면 의사의 말을 맹신하고 문제가 생기면 법조인의 말을 맹신하며 돈이 궁하면 부자의 말을 맹신한다. 소설가는 허구를 쓴다. 우리는 허구를 맹신할 수 없기에 소설가를 맹신할 수 없다. 만약 소설가가 힘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 자는 더 이상 허구를 쓰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믿게 된다. 위대한 소설가들의 소설은 대부분 그들이 유명해지기 전에 쓰였고 그들이 죽고 난 후에 힘을 가진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현재 유명한 소설가가 유명해진 이후에 쓴 소설은 손이 잘 가질 않는다. 유명(有名)한 자가 유명(有命: 목숨이 붙어있는) 한 상태에서 쓰는 소설은 힘을 가진 상태이기에 의도와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물론 모든 글이 의도와 목적을 가진다. 하지만 소설은 그것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설정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쓰다 보니 생기는 그런 것이다. 만약 문학이 계획서를 만들고 쓸 수 있는 것이라면 이건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그럼 AI가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유명한 작가는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영향력을 발휘한다. 때론 필력이 무력보다 강하다. 그들이 유명해지기 전에 썼던 작품들은 분명 진실에 가까운 허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해지면 허구에 가까운 진실을 쓰게 된다. 이것이 문학(글짓기)과 다른 글쓰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문학이 아니라면 죽든 살든 유명하든 안 유명하든 상관없다. 비문학은 살아있고 유명(권력, 전문성, 지식적)해야 그 가치가 더 올라간다.


장편(소설)의 로망


소설가들은 장편에 대한 강한 로망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장편을 쓰지 못한다면 진정한 소설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소설가는 많은 소설을 남길 수 없다. 장편은 긴 호흡이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혹자는 평생 동안 쓰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요즘처럼 극단적으로 단편적인 콘텐츠에 빠져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이건 AI도 해줄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어떤 주제로 AI에게 글을 부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글이 A4지 수백 장에 달하는 소설로 만들어 줄 수는 있겠는가. 쓴다 한들 당신은 그것을 자신이 쓴 것이라 말하고 다닐 수 없다. 왜냐 당신의 손이 쓰지 않은 것은 당신의 입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Ai가 쓰는 소설은 길어봐야 A4지 3~4장 정도의 짧은 단편일 것이다. 물론 언젠간 AI가 수백 페이지의 장편소설까지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AI는 인생을 모두 이해한 것이리라. 인생은 긴 호흡이다. 장편 소설은 그와 같은 것이다. AI가 인간처럼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아니 평생 동안 질질 끌며 묵혀가는 한 편의 이야기를 쓸 수 없다. CPU와 GPU는 시간을 단축해서 결과물을 만드는 장치이지 시간을 끌며 결과물을 만드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뇌와 다른 점이다. 인간의 뇌는 기억들이 시간을 거쳐서 융합되고 연결되는 곳이다. AI반도체는 흩어진 정보들을 순간적으로 그럴듯하게 짜깁기(편집) 하는 것이다.  반도체가 인간의 뇌와 같아질 수 없는 건 생명이 지닌 무의식의 세계를 분석해서 패턴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석영 [철도원 삼대]

어제 서점에 갔다가 매대에 놓인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를 봤다. 2024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비록 최종 수상작이 되진 못했지만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성이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656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이다. 그는 이 소설을 탈고하는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2020년에 출간되었으니 1990년에 이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묵히고 나서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진실에서 멀어지는 이유


나는 이해한다. 장편은 오래 묵히면 묵힐수록 진실에 다가가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이어지는 소설은 뼈대에 붙어지는 살과 떨어지는 살들이 반복되며 가장 완전한 상태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인간의 세포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바뀌어가는 과정과도 흡사하다.


소설을 퇴고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첨가되고 흐름을 방해하거나 자질구레한 것들은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표현의 부자연스러움은 자연스럽게 전개의 부적절함은 적절하게 바뀌어 간다. 그러면서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이 온전하게 완성되어 가는 것과 같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우리가 장편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적잖은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것도 아주 긴 장편을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짧은 릴스(Reels)와 쇼츠(Shorts)의 60초도 견디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우리가 진실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이다. 진실은 그렇게 쉽게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견디고 인내해야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뜨거운 국물은 후후 불어가며 식을 때를 기다리며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해야 한다.


인생처럼…


모순, 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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