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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Sep 29. 2024

삼각형의 꿈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스물여덟 번째 -

“공간 자체의 구조 안에서, 평면과 유사하게 이차원인 사물들 간에 형성된 어떤 독특한 상관관계가 소리, 빛, 색채가 공간을 이용하는 양식을 변화시키고 파괴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삼각형을 떠올려 보자. 왜 우리는 삼(3, three, 三)이라는 숫자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을까? 승부도 삼세판, 도원결의도 3명, 기독교도 삼위일체, 관계도 삼각관계가 언제나 흥미롭고 스릴 있다. 세상은 마치 삼각형의 피라미드 속에 갇혀있는 것 같지 않나? 3개의 점이 만든 도형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삼체 (三體, 3 Body Problem)

삼체(三體, 3 Body Problem)를 아는가? 류신츠의 SF 소설이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화제가 되었다. 그 소설의 제목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세 개의 동등한 힘을 가진 물체가 가진 문제를 파고든다. 이건 물리학적으로도 아주 예측하기 힘든 문제이다. 예측 불가능의 영역이다.


물리학은 언제나 물체의 질량과 속도와 거리와 시간등의 요소들을 통해 벌어질 물리적인 현상을 예측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 물리적인 추론은 증명이 가능해야 한다.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증명해 내는 과정이 과학(수학을 포함)이 발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증명된 사실들은 더 많은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문제는 세상엔 과학이나 수학이나 아직 증명해 내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증명할 수 없는 명제들 때문에 과학과 종교, 즉 인간과 신의 대립은 팽팽하게 이어진다.

삼체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증명해서 알아내길 원한다. 종교는 신과 인간의 분리를 전제하지만 과학은 이것을 부인하기 위해 인간이 신과 같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창조주인 신만 안다는 것이 종교가 말하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 영역으로 끊임없이 다가간다. 인간은 신과 분리되고 다시 신과 하나 되려는 숙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세 개의 태양


 만약 세 개의 동일한 질량을 가진 태양이 같은 시공간에 존재할 경우에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이건 물리학을 좀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마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하다. 뭐 이젠 이런 궁금증이 생길 수 만 있다면 AI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궁금증이 생길 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예전에는 그것이 몽상에만 그쳤지만 이젠 그 생각을 설명해 줄 혹은 그 생각을 구체화시켜 줄 지식과 정보를 손쉽게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떠올릴 수 있는 자만이 그걸 알 수 있다. 남다른 질문은 남다른 호기심과 탐구심에서 비롯된다. 아이와 같아져야 한다.

새 개의 태양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지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마태복음] 18:3 -


두 개의 태양이 있을 경우는 여러 가지의 경우의 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Chat GPT참조) 서로가 서로의 궤도를 도는 쌍성계가 형성되거나 서로가 가까울 경우 서로의 강력한 중력파로 인해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서로 충돌해 초신성 폭발로 인해 주변의 모든 물질을 날려 버리고 새로운 천체가 형성될 수 있다. 이건 마치 우주의 시작, 빙백 이론과 흡사하다. 그럼 두 개의 동등한 태양이 존재하고 이것이 가까워지면 모든 것은 소멸되고 다시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다고 예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을 종교적으로 접근한다면 인간이 신과 동일에 지는 순간 세상의 종말로 이어지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빛으로 다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이런 나의 생각이 너무 비약적이고 과대망상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런 생각을 즐긴다. 이런 나의 생각이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다. 난 AI에게 주제나 조건(프롬프트)을 던져주고 몇 초 만에 튀어나오는 그럴싸한 감동과 지식을 가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세 명의 신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은 신들이다. 둘이나 하나가 있는 곳에, 나는 저 하나와 함께 하노라.”


- [도마복음] 30장 -


그리고 이런 나의 생각이 도마 복음 속에 한 구절과 연결되었다. 예전에 이 구절을 읽고 도대체 무슨 말인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좀 더 많은 배경 지식들과 영감 있는 글들을 접하면서 베일에 싸여 있던 그 이미지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다. 물론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상상이다. 증명할 수도 없고 증명할 이유도 없다. 왜냐 문학은 증명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냥 느낌과 상상을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일 뿐이다. 이건 직관과 통찰의 영역이다.


세 명의 동등한 신이 존재 하는 세계는 질량이 같은 세 개의 태양이 있는 것과 같다. 예측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건 기독교의 성삼위일체와 맞닿아 있다.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이 삼위일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성부(하나님), 성자(예수), 성령(바람, 불, 물 등 만물에 깃든 영혼?!)이 동등한 힘들 가지고 상호작용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힌두교의 삼위일체 (브라흐만, 비슈누, 시바)와 발리의 렘푸양 사원의 3개의 삼위(三位)

이건 비단 기독교에서만 드러나는 특징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세 가지의 존재의 연결성과 융합을 강조한다. 힌두교에서도 브라만(창조), 시바(파괴), 비슈누(보호)의 삼위일체를 강조한다. 불교에서 삼법인(三法印 – 제행무상(변화), 제법무아(무아), 일체개고(고통))이라는 핵심 교리가 있다. 물론 각각이 삼위(三位)가 가지는 의미와 해석과 명칭은 각각 다르지만(종교가 다른 이유?!) 이상하게도 세 가지를 제시함은 동일하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그렇듯 각 종교에서 제시한 이 세 가지의 상징(법칙)과 존재들의 균형과 융합과 일체를 강조한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조화란, 예측 불가능이다.


세 개 중 무엇 하나가 빠질 수 없고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화(調和, Harmony)이다. 그런데 조화는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세 개의 태양이 존재할 때처럼 세 개의 동일한 질량(= 동일한 힘, 에너지) 가진 존재가 공존하면 그 어떤 것도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 [마태복음] 6:34 –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가? 인간은 언제나 내일 일을 예측하고 계획하며 살지만 절대로 내일 벌어질 일들을 알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예측하고 계획하는 걸 멈추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모순이다. 그 말인 즉, 예측은 조화가 거리가 멀다. 인간 세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유이다. 인간은 계획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이 세 개의 힘의 균형이 깨어지거나 둘 만 존재한다면…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소멸(종말 =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로 향해간다. 완전한 균형만이 우주의 지속적인 공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더욱 불가능한 건 완전한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소멸로 가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 아닐까?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 상태는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 미지의 상태가 아닐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섭리인 것이다. 인간은 예측할 수 없음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과학과 논리와 통계를 앞세워 끊임없이 그것을 알아내려 하지만 그 과정이 조화를 파괴하고 균형을 흔들어 놓는다.


보이지 않는 삼각형의 세계 (삼위일체)


삼위일체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증명할 수 없지만 믿어야 하는 것이 신앙이다. 증명할 수 없기에 불신하는 것이 과학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사이에 존재한다. 불신하면서도 믿는 존재이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대립한다. 과학자가 맹신한다면 그 자는 증명을 포기한 자다. 과학자의 사명을 저버린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요한복음] 20:29 –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보고도 의심스러워 직접 그의 육체를 물리적으로 만져보고서야 믿음을 가졌다. 그렇다. 신앙이란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증명과 논리와 합리적인 사고를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이 가지기 쉽지 않은 것이다.


내가 성경 속에서 도마라는 인물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기꺼이 그런 자에게도 몸을 내어주고 자신을 증명시켜 주었다. 어쩌면 신앙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일 수 있다. 의심도 관심이다. 관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의심이 풀리면 확신이 된다. 믿음이 견고해진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의심에서 시작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1602)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나는 회의주의(義, Skepticism) 자이다. 회의주의는 열린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탐구하는 자세이다. 성경 속 도마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묻지 않고도 올바른 것을 믿고 따르는 자는 복된 자가 분명하다. 왜냐 그는 의심을 가지고 어려운 증명의 과정을 통해 확신과 신념을 가지는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들은 빨리 행복해진다. 모든 행복은 믿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행복은 선택이지 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는 조건을 만족될 때까지 구하는 자이다. 사랑을 믿어야 행복이 찾아든다. 하지만 사랑을 의심하는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하지만 의심이 풀리면 사랑은 더 깊어지고 견고해진다.


증명할 수 없는 신앙인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어진 상태를 경험했다면 그 자는 이제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의심의 모든 과정을 직접 거쳤다는 것은 그 과정을 자신의 입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적잖은 종교인과 신앙인들이 현대인들에 왜 믿음을 심어주기 힘든지는 이와 연관이 깊다고 생각한다. 그냥 단순이 자신이 믿어온 방식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 강요는 자신이 그 방식 밖에 모르기 때문 아니던가? 자신이 의심 없이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그들은 의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못하기에 그들을 이해시키고 다가갈 방법을 모른다. 무지한 자는 나와 다른 자에게서 유익을 찾기보다 유해함만을 찾는 법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신앙에 접근하는 자들을 색안경과 답답함으로 힘들어한다. 나와 다른 것은 이단이고 나쁜 것이다. 왜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자는 이미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와 뭐가 다른가.

 

교회에서 오랜 시간 적잖은 신앙인이라 말하는 자들을 지켜봤다.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믿음이 없는 자를 위해 헌신하고 노력했건만 그 자들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 풀에 자기가 쓰러진다. 이건 헌신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신앙을 전하는 것이 성취와 성과가 되어버린 자이다. 마치 다단계 회사처럼 더 많은 이들을 물어오기 급급하다. 자신의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닌지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가 빨리 믿지 못함만을 탓하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마치 희생양인 양 자기 합리화와 자기 위안에 빠지는 자들이다.


물론 방법론적으로 접근법이 틀리지 않았더라도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변화의 속도는 모두 다르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빠른 자도 있고 느린 자도 있다. 대체적으로 내가 본 사람들은 빠르게 달아오르면 빠르게 식더라. 느리게 서서히 달아오르는 사람도 있다. 천천히 두드리고 보고 나아가는 자들이다. 그 과정이 스스로 공부하고 알아보고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자가 그것을 답답해하더라. 한국인은 언제나 속도와 효율에 목매어한다. 때론 목회자들이 마치 다단계 회사 사장처럼 사람을 물어오라고 푸시하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걸음이 느린 아이를 나무란다고 걸음이 빨라지진 않는다. 넘어지지 않고 따라옴에 감사해야 한다.


내 평생 단 한 사람만 만이라도 내가 알게 된 것을 제대로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섣부르게 다가간 자들에게 더 많은 상처와 실망을 남기고 신앙에 대한 더 나쁜 인식을 남겨주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시절인연, 時節因緣)이다. 내가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씨를 뿌린다고 내가 거두는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이 신앙이다. 내가 뿌리고 거두지 못했다면 그것은 신이 계획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럼 나도 분명 누군가가 뿌려서 열린 과실을 얻어먹었음이라.

알브레히트 뒤러, '삼위잎에 하나님을 경배함' (15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하나님의 사랑성령의 교통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린도후서] 13:13 -


세 개의 동등한 힘들 가진 존재가 상호 작용하며 그 균형을 이루고 교통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조화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알려주려는 진리일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인간이 이 진리를 아는 것이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아닐까...


하나님은 빛이요, 빛은 색채(예수)로 보이며, 소리(말씀)로 그것들은 교통(交通) 하며 전달된다.

과거 페소아는 그것을 삼각형의 꿈이라 표현했다.  


“삼각형은 소리, 빛, 색채가 공간을 이용하는 양식이다”

- 글짓는 목수 -


우리는 신이 만든 이 삼각형의 시공간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

불안의 서 in 보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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