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 한 번쯤은 이런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구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이 엇비슷해지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은 이전과는 달랐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만 그런가?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
-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중에서 -
삶이 무의미해지는 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사물(시각화된 것)을 통해서 만족을 얻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이 계속 더 많은 것들을 사물화 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이것을 멈출 수는 없다. 이것을 멈추면 우리가 말하는 발전과 성장 그리고 풍요(경제, 부 그리고 물질)가 멈추고 줄어들기 때문이다. 딜레마에 빠진다.
변화가 필요하다.
관성의 법칙
문제는 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을 잡아두고 있어 그 변화는 쉽지 않다. 이걸 과학에서는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더라. 브레이크를 밟고 싶지 않다. 멈추고 다시 출발하려면 또다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힘들다. 그걸 감수하고 싶지 않다. 앞에 있던 것들을 따라잡고 쭉쭉 나아가는 이 속도의 쾌감을 놓을 수가 없다.
사물이 주는 쾌락 속에서 취해서 살아간다. 사실 그 쾌락은 사물이 주는 것 같지만 그 사물은 사람이 만든 것(물질)이다. 그리고 그 쾌락은 그 사람 자체(정신적)가 주는 경우도 포함된다. 그래서 사람도 사물로 여기게 된다. 사람이 쾌락을 얻는 도구(사물)로 전락해 버린다. 나의 물질적 부와 정신적 쾌락을 채워주는 도구인 것이다. 이제 스스로 쾌락을 찾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하이브리드
하지만 당신이 ‘하이브리드(Hybrid)’라고 생각해 보자. 일반 가솔린 차량은 브레이크를 밟을 때 운동에너지가 열 에너지로 전환되며 그것들이 모두 손실 에너지로 날아가 버린다. 우리는 이 손실 즉 상실감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당신이 하이브리드 라면 회생 제동 시스템을 이용해 그 손실되는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전환해서 저장할 수 있다. 물론 100% 모두 저장할 수는 없다. 분명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감수해야만 한다.
세상에 100%의 효율은 없다. 방향을 틀고 싶다면 속도를 줄이고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시간당)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상당 부분이 전기에너지로 충전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가장 효율적으로 전기에너지를 충전하고 방향을 전환하고 속도를 줄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법) 당신은 그걸 간과하고 있기에 잃는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멈추고 늦추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구원’, 불교도는 ‘해탈과 깨달음’, 인문주의자들은 ‘사랑과 타인과의 합일’ 혹은 ‘자기 내면의 조화와 온전함’의 의미와 가능성을 물었다.”
-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중에서 -
그리고 그 눈에 보이는 속도와 쾌감이 줄어들고 나면 주변에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빠르게 달린 땐 시야가 좁아지지만 느려지면 시야가 넓어진다. 그때 당신은 인생에서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얻게 된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구원이나 해탈(깨달음) 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사랑이나 조화 같은 것일 수 있다. 당신이 인생의 중반부를 넘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기만 한다면 당신은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삶의 목적만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그 끝이 무엇일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Authentisch Leben
또다시 에리히 프롬의 책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의 미발표 원고를 그의 조교였던 라이터 풍크가 그의 사후 편집해서 출판한 책이다. 작가들의 서랍 속에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원고들이 잠자고 있다.
요즘 난 내가 임마누엘 칸트가 된 것 기분이다. '뭔 소리냐' 할 것이다. 누군가가 되고 싶다면 누군가가 했던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된다는 말을 믿는다. 생전 칸트의 일과를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칸트는 아주 규칙적인 일과를 지키는 철학자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그가 무언가를 하고 또 나타나는 시간이 너무 정확해서 그를 시계라고 부를 정도였다.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4시 반)이다. 기상과 동시에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진다. 어제 읽었던 책 구절들을 다시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때 나는 한글로 된 구절을 영작하면서 되새김질을 한다. 그리고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선다. 집 근처 가까운 맥도널드로 향한다. 이렇게 이른 새벽 문을 여는 곳은 맥날 밖에 없다. 커피 한잔 가격으로 무료 와이파이와 전기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
A old man who is studying early in the morning in Mcdonald
역시 오늘도 어김없이 그 백인 할아버지가 보인다. 항상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있다. 이사를 한 이후 새벽마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사람이다. 그 할아버지는 항상 작은 태블릿 화면에 무언가를 보며 수기로 무언가를 공책에 적고 있었다. 필사를 하면서 무언가를 골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몰입하는 모습이 저럴까 상상해 본다. 나도 그를 따라 노트북을 켜고 글 속으로 빠져든다.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을 소설을 쓰는데 할애하고 있다. 짧게는 1시간 길게는 2~3시간까지 소설을 쓴다. 그리고 한 편의 초고가 완성되면 보상으로 나에게 맥모닝을 사준다. 보통 때 같으면 쓰다 말고 일터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그것을 이어가며 쓰거나 이어지지 않으면 다른 주제 혹은 이야기로 넘어가야 했다.
지금은 분주하게 챙겨서 떠날 필요가 없다.
천천히 소지품을 챙겨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 산책로로 향한다. 읽고 싶은 전자책을 골라 오디오 북으로 보고 들으며 한참 동안 공원을 산책한다. 이때 많은 상념들이 떠오른다. 칸트가 왜 매일 같은 시간 이렇게 산책을 즐겼는지 이해가 된다. 인간은 걸으면서 사유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그렇게 산책 간에 에리히 프롬의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근처의 도서관 개장시간에 맞춰 입장한다. 독후감을 쓰고 있다. 오래 기억하기 위해.
Taking a walk in Castle Hill Heritage Park Reserve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은 아직 AI(인공지능)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이 본질을 찾고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Erich Fromm (1900~1980)
이제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은 필요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교사가 해야 할 일과 의무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론 교사는 이제 학생들의 심성과 인성을 지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질문을 유도하는 심리적 혹은 행동분석학적인 자질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 교사를 교과목의 관련 지식 많고 적음(점수)으로 선발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이제 교사는 인성과 심성으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평가하기가 더욱 어렵다.
교육과 훈련 사이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아는가? 내가 생각하는 두 단어의 의미는 이렇다.
교육은 다양한 잠재력을 찾아주는 것이고 훈련은 다양성을 획일화 규격화 평준화(상향)를 통해 효율성을 강화 시키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훈련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교육이 선행되고 그 뒤에 발견된 다양한 재능이 각자의 훈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은 반대였다. 학교에선 획일화시켜 놓고 사회와 기업에 나오니 다양한 생각과 창의적인 생각을 내놓으란다. 앞뒤가 바뀌었다. 이미 소멸시킨 다양성을 뒤늦게 찾으란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내뱉는 자들은 이미 획일화된 자들이다. 몸과 뇌가 따로 노는 자들이다.
이제 칠판을 바라보며 교사의 지식을 받아 적고 외우는 시대는 끝났다. 어쩌면 나는 이런 주입식 교육의 희생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주입식 학습이 나에게 가장 맞지 않는다는 것을 불혹의 나이가 다 되어서 깨달았다. 그리고 감히 단언컨대 그 당시 수많은 학생들이 이런 주입식 교육의 희생양이 되어 사회 소외계층으로 전락했다고 믿는다. 그 당시의 학교는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국가와 기업이 필요한 정형화된 인간을 생산하는 훈련기관과 같았다고 본다. 군인을 양성하는 훈련소처럼 그 목적에 맞는 인간을 정해진 시간(교육기관) 동안 생산해 내는 것이다. 당시 학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답을 가장 빨리 찾는 것을 오랜 시간 견디며 훈련하는 곳이었다. 누군가에겐 어울리는 곳이었고 누군가에겐 소외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성적(훈련결과)으로 공식적인 소외를 경험한다.
이제 모든 지식과 해답은 언제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단지 원하는 해답을 얻기 위해 어떻게 질문을 해 나가야 할지 모르는 인간들만 존재할 뿐이다. 사실 이런 류의 해답은 정답이 없는 모호한 것이기에 질문을 해 나가면서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 해답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과거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정답 맞히기로 나의 등수와 서열 그리고 사회적 계급이 나눠진 세상을 살아왔다면 이젠 그 시대는 저물어갈 듯 보인다. 이젠 어떤 질문을 어떻게 던질 수 있느냐가 인간이 AI와 대비되는 우월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인간 vs AI
인간 vs AI
우리는 언제나 인간이 좀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에 의해 평가되고 판단되는 세상을 살아왔다. 물론 아직도 그러하다. 권위 있는 인간에게 평가받는 것이 그나마 인간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인간은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판단은 항상 소수 권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이제 너무 잘 알고 있다.
인맥과 학벌과 혈연지연 그리고 눈에 보이는 유혹은 둘째 치고라도 자신이 보고 배우고 경험해 온 것들이 과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기준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 모든 개인의 판단 기준은 어디까지나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인 판단[객관과 주관 사이](칼럼 참조)이다.
이 모든 조건을 배제하고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비교 대조해서 가장 순수하고 (독)창의적이며 발전적인 생각을 구별해 내는 것은 어찌 보면 AI가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나의 가치를 AI가 평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류는 AI를 더욱더 발전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럼 AI가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더 생겨나야만 가능하다. AI는 모든 존재하는 정보와 지식들을 찾아주고 알려주지만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알려줄 수 없다. 그 없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존재, 정확히는 그 없던 생각과 그것에 관한 실마리와 힌트를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간의 프롬프트(Prompt)이다.
Open AI
AI를 오픈하는 이유?
왜 ‘Open AI’ 인가? 이건 머신 러닝을 위해 더 많은 질문을 접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AI를 더 많은 이들에게 오픈하고 더 많은 질문을 받으면서 AI가 더욱 발전해 가는 형국이다. 우리가 AI를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AI가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불특정 하고 예상치 못한 질문이 누구로부터 언제 어떻게 접수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누군가는 AI가 더 복잡한 연산과 연상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한 층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존에 없던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자들만이 인공지능의 지능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플랫폼은 항상 더 많은 이용자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네이버나 다음에서 정보를 검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로컬 플랫폼은 구글(유튜브)이나 메타(인스타, 페이스북), MS(Bing), ChatGPT 등의 하위 소스에 불과해져 버렸다. 그들도 상위 플랫폼에 연결되고 노출되어야만 사용자를 유입시킬 수 있는 구조이다. 블랙홀처럼 거대한 플랫폼이 모든 것을 쓸어 담는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없다”
-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중에서 –
이제 우리는 타인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고 타인의 노동력을 통해 사물을 생산하는 시대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이젠 타인과 비교되는 물질과 지식의 차이를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각자가 가진 목적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가지고 더 알아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용해서 목적을 이루려 하기 때문에 서로를 억압하고 조종하고 지배하려 한다.
'자신의 삶의 의미가 그것인가?' 자문해 보라. 만약 그것이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AI와 로봇이 완전히 결합되면 기존의 우리의 삶의 방식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지식정보를 축적하고 사물(상품)을 생산하는 존재로서는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중에서 -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먼저 자신에게 구체적인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에 답을 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지식에 답하는 시간이 아닌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철학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철학은 정해진 답이 없다. 다만 철학은 계속 자신과 삶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만물에 대한 이해와 사랑까지도 닿을 수 있다. 우리는 여태껏 타인이 던지는 문제(지식과 논리)에만 답해 오며 살아왔다. 이제는 자신에게 질문해야 하고 그 질문을 또 타인과 함께 나누고 고민해 봐야 한다. 정해진 답은 없다. 이것만이 AI가 영원히 답할 수 없는 답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삶(인생)을 살아갈 이유이자 의미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경쟁해야 할 이유보다 서로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