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낳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고, 창조한다는 것은 만든다는 뜻이지요”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
당신은 만드는 것(造 만들 조: making) 낳는 것(生 날 생, begetting)을 완전히 구분하는가? 우리는 실제로 창조와 탄생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성부)과 신의 아들(성자) 그리고 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내가 낳은 것과 내가 만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면 영적인 생명(Zoe)과 생물학적인 생명(Bios)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어렵다.
신학을 통해 신앙에 접근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다. 신앙을 지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어려운 걸 알지만 그걸 머리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면 이것을 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C.s루이스는 그런 생각에서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새로운 곳(집) 그리고 새로운 것(책)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호주에 온 이후 12번째 이사이자 13번째 보금자리였다. 정말 기구한 운명이다. 내 조상은 몽골 유목민였을지도...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유난히도 이사를 많이 다녔다. 그리고 청년이 되어 일자리를 찾아서 또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고 이곳 호주로 와서도 계속 이사를 다녔다. 해외에서는 더 빈번해졌다. 6년 동안 12번의 단기간 가장 많은 이사를 다니는 내 인생의 기네스북을 썼다.
이제 유목민의 삶을 이해를 넘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집 없는 설움'이라고들 말한다. 정착할 곳이 없이 떠도는 삶은 고달프지만 그것이 고달프다고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삶은 피폐해지고 더욱 고달파질 뿐이다. 유랑을 여행으로 생각한다면 어떨까? 언제부턴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든 게 추억을 담은 기행문의 글감으로 변하더라. 그래서 힘들지만 이사를 할 때면 또 다른 새로운 인연과 환경이 가져다줄 새로운 경험에 대한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더 커진다.
오래된 붉은 벽돌집이었다. 겉만 번지르한 벽돌집이 아니었다. 집의 모든 내부 프레임이 벽돌로 만들어졌다. 이 말은 프레임과 벽이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보통 일반 집은 프레임에 벽을 세운다) 처음 봤다. 집은 벽돌도 모두 다 색깔이나 생김새가 조금씩 다 다른 가마에서 구워진 벽돌이었다. 집을 구경하고 10분 만에 무조건 이 집으로 들어와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이유였다. 숨기기가 편안하다. 가마에서 구워진 벽돌은 공기를 순환시킨다. 주변의 숲과 어우러진 벽돌집, 꿈에서나 보던 집에 살게 되었다. 좀 비싸긴 해도 호주에서 이전까지 살아왔던 집과는 완전히 다른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그 집의 거실 책장에서 우연히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발견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났다.
[책장에 책을 좀 빌려가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집에선 뭐든 편하게 이용하세요]
집주인에게 문자를 남겼다. 마음껏 이용하라는 답변이 왔다. 집주인은 친절했다. 무례함과 무관심 그리고 불편함과 불쾌함을 가져다주는 많은 동거인들을 만나왔다. 삶의 방식이 다른 타인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간에 많은 배려와 양보가 필요하다. 이것을 계속 유지하며 산다는 게 어렵다. 그래서 연애와 결혼은 별개의 문제인지도... 따로 살 땐 좋았지만 같이 살면 나빠지는 이유일까? 시간만 함께하는 것과 시공간을 함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번엔 서로의 양보와 배려가 오래가길 바라본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 Lewis -
새로운 사람과 환경을 만나는 것처럼 책도 인연이 닿아야 만날 수 있다. C.S 루이스의 말을 좌우명처럼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가면서도 그의 저서를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서 여기서 인연이 닿았다. 이것도 운명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이 그동안 기독교에 대해 풀리지 않던 의문의 갈증을 많이 해소해 주었다. 그의 책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여러 번을 정독했다. 정말 그는 신앙을 이성적이고 지적으로 이해하려고 부단이 도 노력한 흔적이 느껴졌다. 그는 비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신앙과 신학적인 내용들을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쓰려고 노력한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부인은 내부를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우물 안에 개구리는 우물을 볼 수 없는 이치이다. 그래서 기업이나 조직을 진단하는 컨설팅도 외부인이 분석한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보인다.
무신(無神)에서 유신(有神)으로
그는 무신론자였다가 크리스천으로 회심한 자이다. 그는 무신과 유신의 사이를 지나오면서 둘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신이 있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나도 사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제는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아니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다.
일반인(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인이 일반인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를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쌍방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사실 이건 일방의 문제이다.
기독교인이 일반인의 입장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왜냐 일반인에서 기독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한 일은 모두 그 과정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문제는 대부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못하거나 혹은 그냥 모태신앙으로 일반인(무신론자)들의 삶과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온 때문이라고 본다.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이해시키려면 당연히 그들의 관념과 관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과 표현과 예시를 들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수십 년간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보고 듣고 느껴왔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고 행동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할 때도 그러하다. 그럼 그 복음은 일반인들에게는 개 짖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보고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그런 개 짖는 소리에 귀 기울일 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다.
서론이 또 길었다. 하지만 본론은 또 얼마나 길어질지…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들 수 없듯이 말입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
이 구절이 나의 머리를 때리는 상념을 던졌다. 만약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날이 온다면 이 말은 거짓으로 판명 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거짓이 되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은 인간을 낳을 수는 있어도 인간을 창조할 순 없다. 생명공학으로 남녀의 결합이 없이 자궁이 아닌 곳에서 수정시키고 완전한 인간의 형체와 인지능력(감성과 이성)을 갖춘 존재가 탄생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믿고 싶다. 이게 가능해지면 인류는 전에 없던 상상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So God created mankind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the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 [창세기 1:27] -
창세기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Create)했다고 말한다.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구체적으로 티끌(dust)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신이 인간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성령으로 잉태)는 신이 낳은 존재이고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이다. 여기서 신과 인간의 분리를 설명할 수 있다.
이걸 다르게 설명하자면 내가 소설 속에서 인물을 만들어(Create) 내는 것과 내가 성관계(biologically)를 통해 나의 유전자를 가진 생명을 낳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다른 점은 후자의 생명을 낳을 때 오로지 하나님의 유전자만 들어갔다는 개념이 추가되어야 한다. 왜냐 성령으로 잉태된 즉 여성(성모 마리아)의 유전자는 없다는 점이다.
소설 속 내가 창조한 인물은 나의 피조물로 나와는 분리된 존재이다. 물론 내가 창조한 인물은 나와 분리되지만 또 완전히 다를 순 없다. 나의 창의(상상, 경험, 기억의 융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본 따서 인간을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상상을 하고 소설을 쓰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인간이 신의 속성을 지닌 것 때문이지 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이 영적인 보이지 않는 영역(상상, 무의식, 몰입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걸 기독교에서는 ‘성령’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통해서 설명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이 삼위일체가 이렇게 성립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지녔지만 하나님과는 다른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신의 유전자를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고 신과 하나 된 존재로 나신(낳아진) 것이다. 그럼 이건 신과 동일한 존재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하나님(성부)과 그의 아들(성자)의 개념이 가장 기본이며 또한 핵심이다. 예수를 신(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 [마태복음] 24:4-5 -
이것이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 다신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생겨난 대부분의 사이비가 유일신을 설명하고 난 후 그 유일신의 존재를 자신과 연결시키는 세뇌 과정을 통해 자신이 신이 되는 다신교로 이어진다.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물론 또한 이건 성경에서 다시 재림하는 ‘메시아’라는 존재의 여지를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타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며 아무나 될 수 없다. 부처가 많지 않은 이유다. 부처가 되는 길은 아무나 견딜 수 있는 고행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몇몇의 영적으로 아주 높은 경지에 오른 자들을 보면 그들은 인간이 견디기 힘든 수행과 고행을 거친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선 그들을 하나님(신)이라 일컫진 않는다. 이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과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 자연 세계 전체를 만들어 낸 생명은 조에(Zoe)입니다. 바이오스(Bios: 생물학적 생명)는 어떤 그림자나 상징처럼 조에를 닮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
오랜 전 영화[Zoe]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난 왜 그 영화의 제목이 조에였는지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달았다. 인간이 신처럼 생물학적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였다. 그럼 인간이 신이 된 것이다. 영화는 그 세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이 바이오스적 존재에서 조에(Zoe)의 존재로 변해가길 바란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변화)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신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신과 분리된 존재가 다시 신과 연결되어 과정을 그리스도인으로 향해가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그 길을 인도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것이다.
인간은 만들어진 것(인간)과 낳아진 것(예수) 사이에서 신과 연결된다.
글짓는 목수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Z4i9u0O5tX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