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Jun 02. 2024

창의와 창조 사이

[열두 발자국] 정재승

“창의성은 발산하는 것, 창조성은 끝까지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정재승 [열두 발자국] 중에서 –


창의성(創意性, Creativity)과 창조성(創造性, Creativeness)에 대해서 구분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책을 읽다가 비슷한 단어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창조성이 없는 창의성은 금방 잊히고 퇴색된다.


*창의(創意) 

- 네이버사전 : 새로운 의견을 생각하여 냄. 

- ChatGPT : 새로운 아이디어나 개념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나 과정에 중점을 둔다.


*창조(創造) 

- 네이버사전 :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듦.

- ChatGPT : 새로운 아이디어나 개념을 실제로 구현하는 행위에 중점을 둔다.


사실 사전적 의미로는 둘의 차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아서 AI에게도 여쭈어 봤다. 창의와 창조는 모두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자를 뜯어봐도 알 수 있다. 비롯할 창(創), 이 한자는 시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이 시작에서 비롯된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earth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1 -


성경도 창세기(創世記 : Genesis)로 시작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처음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신이 세상을 창의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창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창의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창조의 과정이다. 창의는 새로운 결심(보이지 않는)이고 창조는 결심을 보이도록 구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해마다 혹은 매달 혹은 매주 새로운 결심과 다짐을 한다. 하지만 그 결심과 다짐이 모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어지더라도 며칠을 가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생각과 결심으로 환승한다. 물론 그 새로운 생각과 결심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나와 맞지 않는 직장을 만나면 이직해야 하고 맞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다른 상대로 갈아타야 한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수 없이 환승을 반복하며 좀 더 새로운 생각과 상대를 찾아 헤맨다. 창의의 시간만 지속된다. 보이지 않는 생각과 결심만 반복하며 그것들을 세상에 보이게 만드는 기나긴 노력의 시간은 감내하질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신도 7일간의 창조를 위해 분명 세상을 만들 기발한 생각, 즉 창의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다만 신의 창의에 관한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다. 창의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완성은 창조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 방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신의 새로운 생각에 비롯되었지만 그 과정은 시간의 지속성을 거쳐서 창조된 것이었다. 내가 쓰고 있는 장편 소설 또한 그와 같다. 보통 소설가들은 장편소설에 아주 큰 집착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견디고 탄생하는 방대한 세계가 가져다주는 환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기분이 그렇지 않았을까.


그래서 소설가들은 일생의 역작을 만들기 위해 세상과 잠시 떨어져 칩거하며 그 세계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기도 한다. 물론 그럴 수 있으려면 글만 쓰고도 생계를 이어가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현실의 조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자들을 그리 많이 허락하지 않는다. 현실은 냉혹하리만치 현실을 떠나 있는 자들을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나 또한 어느 날 일상 속에서 혹은 책을 읽다가 아니면 여행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새로운 생각이 장편 소설의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문득문득 떠오르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모두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아이디어들과 생각들은 A4지 한 장을 채우지 못하고 멈춰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쓰다만 이야기가 노트북 안에 수두룩 하다. 그리고 지금 써나가고 있는 장편 소설 또한 끝까지 완성될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미완성으로 서랍 속으로 들어가 버릴지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기도합니다. 끝까지 쓰게 하소서”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쓸 수도 없고 무엇을 쓰게 될지도 모르며 계속 쓸 수 있는 상황이 허락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창의가 창조가 되려면 긴 시간을 견디고 인내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매일 양치를 해야 하는 습관처럼 나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그 습관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작지만 소소한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 기쁨은 세상과 타인이 바라보는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 내가 정의하고 나만이 바라보는 기쁨이어야만 지속할 수 있다. 즉 직접적인 금전적 혹은 물질적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지속할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빌립보서] 4:4 –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듯이 나는 글(이야기) 안에서 기뻐한다. 내가 생각하고 만들고 스스로 기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기뻐해 주길 바라며 하는 일은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 세상의 보이는 것들에서 기쁨을 찾아가는 이들은 그것들에 얽매이게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보이는 것은 더 좋은 것으로 더 빠른 것으로 더 편리한 것들로 계속 바뀌어간다. 그럼 당신은 그 세상의 것들을 계속 쫓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항상 무언가를 쫓고 또 쫓기듯 바쁘기만 하다.


“최근 들어 과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미지, 비주얼리제이션(Visualization)이에요. 예를 들어 논문을 쓸 때도 실험에 대해 글로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핵심을 요약해 한 장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이미지는 추상적인 개념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요”


-  정재승 [열두 발자국] 중에서 -


최근에 나도 글쓰기에 AI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AI에게 글을 써달라고 하진 않는다. 그럼 나의 글쓰기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생각하면서 기뻐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글을 감상하며 기뻐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글을 쓰며 생각을 확장하고 연결하고 이미지화시키면서 기뻐한다. 


Vivid Visualization (생생한 시각화)


ViVid(생생한), 지금 시드니는 생생한 볼거리들로 가득하다. 해마다 열리는 Vivid Show (24 May – 15 June)는 정말 눈을 현혹하는 화려한 색채의 조명들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상상을 빛으로 구현해 내는 빛의 향연이다.

Vivid show in Sydney

나 또한 상상의 이미지를 글로 구현한다. 내가 글을 쓸 때, 특히 소설을 쓸 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바로 상상을 이미지화시키는 것이다. 해마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기억을 상상과 융합하고 그 다음 전전두엽에서 그것을 이미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좌반구 측두엽의 언어영역을 통해 가장 적절한 단어와 서술어등을 찾아내고 다시 전두엽의 운동피질의 명령을 통해 손가락을 움직여 글자로 단어로 문장으로 또 문단으로 보이게 한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내가 한 편의 글(이야기)을 만들고 나면 꼭 하는 작업이 바로 이 이야기를 한 장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이 작업이 꽤나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한 장의 적절한 이미지를 찾아내는게 쉽지 않다. 그래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인터넷 서핑 혹은 내가 찍은 사진 중에서 가장 알맞은 사진이나 이미지를 찾는데 적지 않는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그런데 최근 나는 AI의 도움으로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서 삽입한다. 여러모로 편리하다. 더 이상 서핑시간을 낭비하고 저작권 침해 같은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야기의 핵심 키워드 혹은 장면을 영어로(영어 공부를 병행하기 위해서 ^^;;;) 서술하면 AI가 여러 가지 이미지로 변환해 준다. 이 과정을 단어와 서술어들을 바꿔가며 몇 번 돌리다 보면 내가 원하는 이미지가 튀어나온다. 그럼 나는 그 이미지를 나의 글 마지막에 삽입해서 소설의 이미지화 작업을 완료한다. 내가 시간적 여유가 많고 AI 영상 기술이 더 발전하면 그것들을 AI 영상으로 전환해서 내가 직접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을 거침없이 구현해 주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지금 모든 IT기업들이 향해가는 방향이다. 

'Jensen Huang '  President of NVIDIA


“컴퓨터 공학 전공하지 마세요”


- 엔비디아 CEO 젠슨 황 -


누구나 알만한 반도체 분야의 유명한 CEO가 말했다. 더 이상 코딩을 공부하지 말라고.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코딩을 몰라도 코딩을 할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 말은 기존 우리가 쓰는 대중적인 언어를 통해 모든 온라인상의 개발과 창작과 이미지화 그리고 영상화를 할 수 있는 AI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인간이 집중해야 할 것은 이제 창의와 그것을 지속하는 창조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다. 남과 다른 창의력 그리고 남과 다른 끈기(Grit)로 무장한 창조력이 인간이 차별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언어의 제약, 프로그램의 제약, 제도(시스템)의 제약, 신체의 제약등 상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AI 기술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문제는 이런 제약 없는 AI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AI를 제약하는 법안이나 법률 등을 만들어 이것을 제약하려고 한다. 


신과 같은 AI를 향한 도전과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 기술의 발전을 막을 순 없다. 기술우위에 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지금의 글로벌 IT 산업 생태계이다. 이것을 선도하는 국가만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각 나라들은 표면적으로 우려를 나타내지만 뒤로는 할 거 다 한다. 핵이 필요악이란 걸 알지만 핵개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와 같다. 


앞으로 AI의 대중화와 보편화에 역행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미래가 밝지 않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젠 남과 다른 생각(창의성)을 남과 다른 의지와 인내로 지속할 수 있는 능력(창조성) 만이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창의보다 더 중요한 건 창조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창의의 순간과 창조의 시간 속에서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당신은 창의적으로 창조하고 있는가?


열두 발자국 in Library


이전 11화 우연이라는 수수께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