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irl who is waiting for someone on the subway platform.
2004년 8월 나는 중국의 베이징의 무더위를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베이징 대외무역경제대학의 어느 한 기숙사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선풍기 바람을 쐬며 귀에는 유선이어폰이 끼워져 있었다. 그 선을 따라간 곳은 테이프 카세트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귀속으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창밖의 캠퍼스에는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고 있었다. 학교 앞 리어카 자판에서 구매한 최신가요 카셋 테이프에는 최신가요의 가사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가 함께 들어있었다. 나는 그 가사가 적힌 종이를 보면서 이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그 리듬과 가사를 음미하며 현실이 아닌 다른 곳에 잠시 머물고 있는 듯했다. 지금처럼…
遇见 (Encounter, 우연한 만남)
遇见(Encounter, 우연한 만남), 당시 중국의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이었다. Turn Left, Turn Right (向左走·向右走)의 영화 OST로 발매됐던 노래가 대륙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음악이 영상과 조화를 이루면 그 시너지효과는 배가된다. 타이완 출신의 싱가포르 싱어송 라이터인 손연자(孙燕姿, Stefanie Sun)는 이 노래로 중화권의 떠오르는 스타로 등극했다.
서두에 내가 쓴 시 같은 이야기는 이 노래의 가사를 내 맘대로 번역하고 각색해서 만들어 본 이야기이다. 번역과 각색을 하는 동안 나는 2008년의 8월의 뜨거운 베이징의 여름에 잠시 머물다 왔다. 물론 떠오른 기억들은 편집된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먹고 변형된다. 다만 그 기억을 어떻게 추억하느냐에 따라 나의 뇌가 느끼는 것이 달라진다. 그리고 뇌에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리 중요치 않다. 뇌는 똑같이 반응한다. 아름답게 혹은 의미 있게 추억하는 것은 건강상 정서상 여러모로 이롭다. 비록 힘들고 괴로운 기억도 그 속에서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면 아픈 기억과 슬픈 기억도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극악의 상황이라고 여겨지면 그건 더 좋은 글감이 될 수 있다. 왜냐 그런 최악의 상황을 경험했다면 그것을 더욱 리얼하게 서술하고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즐기는 긍정적 리마인드 글쓰기이다.
과거 역사에 남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작가의 경험에 상상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런 작가들은 다작보다는 역작을 위해 삶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다작 속에서 역작을 만들어내는 작가도 좋아하지만 역경 속에서 역작을 만들어 낸 생텍쥐페리나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을 존경한다. 전자를 선망하지만 후자를 동경한다.
나는 당시 베이징의 거리 곳곳을 누비며 또 버스 안에서 항상 테이프 카세트를 가방에 넣고 이어폰 줄을 밖으로 빼어내어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사실 그때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매혹적인 리듬 때문에 계속 듣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이 리듬도 좋지만 이 노래가 품고 있는 가사의 의미가 더 매혹적으로 다가오며 나에게 영감을 던져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음악을 들을 때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가사를 음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랩 가사의 리듬을 쫓아가며 빠르게 따라 부르는 쾌감으로 음악을 즐겼다면 지금은 눈을 감고 노래의 리듬과 가사를 함께 음미하며 음악(소리)과 가사(글)가 융합되며 머릿속에서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즐긴다. 이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연결되면서 나의 머릿속엔 희미하지만 개연성 있는 의미 있는 영상이 재생된다. 나는 그 영상들을 다시 글로 토해낸다. 그럼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우연 or 인연, [스즈메의 문단속] 중에서
우연이라는 수수께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는 수많은 사람들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미움과 상처도 남기며 스쳐간다. 우리는 단지 당시(현재) 느끼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미움과 상처라는 감정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연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상 미래에 다가올 운명 같은 사랑을 꿈꾼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항상 우리의 눈에 익숙해진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게 나타날 거란 꿈을 꾼다. 하지만 사실 잊히지 않는 운명 같은 인연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것이 운명의 인연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운명의 인연이 반드시 인생의 반려자나 삶의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삶에서 스쳐가는 우연 같은 인연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 운명 같은 인연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때 당시의 현재를 벗어나 이어진 시간의 파노라마를 시간의 밖에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만약 당신이 머무는 시간의 길에서 벗어나서 모든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당신이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오해했고 무엇을 간과하고 있었는지를 모두 알게 된다.
그럼 당신은 뜻밖의 놀라운 수많은 진실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 당신이 걸어온 시간은 다른 이들, 즉 당신의 다른 우연의 인연들이 걸어온 시간을 모두 다 드려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스쳐온 우연 같은 인연들 중에 당신의 운명이 있었다는 것은 시간의 바다를 모두 건너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건 마치 작가가 3인칭 전지적(全知的)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모든 인물의 모든 시공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후회하는 동물
시간의 개념을 인지하지 못하는 3차원만 살아가는 동물과 모든 시간을 볼 수 있는 존재(4차원의 신 or 외계인)에게는 후회라는 것이 없다. 3차원과 4차원 사이[서평참조]를 살아가는 인간만이 ‘후회’를 하며 살아간다. 동물들도 실망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먹잇감을 코 앞에서 놓친 사자는 실망의 감정상태를 경험한다. 외모에 반한 상대방에게서 외모와는 다른 언행에 실망하는 것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실망의 감정을 느낀다. 실망은 발생한 현재의 사건과 상황에 대한 기분과 감정 상태이다. 하지만 후회는 실망과는 다른 것이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와 그때의 감정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이건 인간만이 하는 유일한 행동이다.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하고 기록을 남기는지는 바로 이 후회와 연관이 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우고 타인의 과거(기억과 생각)를 읽는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후회를 반복하는 것일까? 그건 우리가 항상 미래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현재 선택의 기준이 항상 미래를 향해 있다. 내가 주식을 사고 땅을 사고 이성을 선택하는 것 또한 앞으로 그 주식과 땅값이 오를 것이고 그 이성과 함께할 시간이 나에게 가져올 행복과 유익함을 기대하기 때문 아니던가? 하지만 항상 주식과 부동산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성이 나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은 내 맘같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는 항상 후회를 불러온다.
만약 우리가 동물이나 신(or 외계인)처럼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그럼 우리는 현재를 가장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현재 내 앞에 있는 상대와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미래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대하고 대처한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전에 썼던 에세이[시간에 갇히다]에서 나는 인간은 ‘시간에 갇힌 존재’라고 정의했다. 시간을 볼 수 없지만 인지한다는 건 아주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苦海 : 고통의 바다)라고 하지 않던가. 인간은 시간이 흘러가고 살아갈 시간이 줄어들어감에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을 더해가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해되지 않는 상대와 상황들로 당황스럽고 괴로워하고 있는가? 왜 이런 상대와 상황이 나에게 닥친 것일까? 우리는 당장 그것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다. 그건 우리가 현재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다려야 한다. 시간을 견디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그때 그 상대와 그 상황이 이해될 날이 올 것이다. 서두에 각색한 노래 가사의 이야기처럼 모든 우연의 인연과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