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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y 12. 2024

증오와 연민 사이

[감정 조절] 권혜경

“방어기제가 작동하면 더 이상 인간의 뇌인 대뇌피질은 작동하지 못하고 우리는 동물의 왕국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한 마리 동물이 된다.”


-  권혜경 [감정 조절] 중에서 -


최근 호주 사회에 사람 간에 공포와 불신이 퍼져가고 있다. 최근 연이어 발생한 잔혹한 (일가족) 살인 사건부터 불특정 대상을 공격하는 묻지 마 테러 등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해간다. 이렇게 사회에 불신과 증오가 만연해지면 사람들은 피해의식과 방어기제라는 듀얼코어가 멀티태스킹을 작동한다. (이 표현이 마음에 들어 또 쓰게 된다.) 그렇게 CPU(두되)는 지속적으로 열을 발산한다. 핸드폰으로 치면 상시 작동되는 앱(App)으로 인해 배터리 소모가 가속화되고 발열이 지속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건 분노와 스트레스의 증가로 설명할 수 있다.


시드니의 테러 살인 사건들

쿨다운(Cool down : 냉각)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뇌는 열변형으로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과거 이런 분노와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뇌손상에 관한 에세이(독후감 [Anger is DAnger])를 쓴 기억이 있다.  과거 나 또한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상시 분노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분노를 드러낼 순 없기에 속으로 그 열을 계속 품고 있다 보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열손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찾은 최후의 선택은 냉각수에 머리를 담그는 것이었다. 출근 전 혹은 퇴근 후 그리고 수시로 수영장을 찾아 열받은 머리를 물속에 담가 식히곤 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나의 차 안에는 항상 젖은 수영복과 수건이 널려 있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집 없이 차에서 생활하는 줄 오해하기도 한다.


영구적인 열손상


불신과 불안 그리고 혐오로 가득 찬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영구적인 열손상을 입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길거리를 걷다가도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불필요한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받은 상대 또한 불쾌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의 빈번함이 내 안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나는 결국 부정적인 인간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 감정도 전염된다.


충격적인 테러와 범죄 사건들이 빈번해지고 사람들이 이런 뉴스를 접하면 접할수록 더욱 폐쇄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 그럼 피해의식과 방어기제는 전에 없던 풀가동 시스템을 작동한다. 나와 나의 가족을 제외하곤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 간에 사랑과 믿음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미움과 불신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인간은 아무런 감정상태가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그래서 모든 순간 호불호가 나뉘는 그런 감정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애매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을 호(좋은지)인지 불호(나쁜지)인지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려 한다. 내편 아니면 적, 흑백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요즘 전에 없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ADHD) 증상을 보이는 현대인들이 많아지는 이유가 이 때문 아닐까?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명상과 비움이 시간이 절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잡념들을 비우고 물결치는 감정을 평형상태로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바쁜 일상과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며 그곳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한다.


“나쁜 사람이 내 앞에 있으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방어기제가 발동해 그 사람과 싸우거나 도망가겠지만, 아픈 사람이 내 앞에 있으면 연민이 생겨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열리고 이해하고 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   권혜경 [감정 조절] 중에서 –


최근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분노가 스며드는 일들을 경험했다. 분노의 감정이 스며드는 이유는 상대가 나쁜 사람으로 생각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올해 초 나는 이직을 했다. 이동식/조립식의 새로운 주거 형태의 하우스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한국인이라곤 나를 포함한 3명으로 구성된 목수팀 밖에 없었다. 모두 호주 백인들 아니면 다른 나라(유럽, 인도, 중동 등)에서 온 이민자들로 구성된 회사였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하우스의 내 외장 프레임과 인테리어를 모두 한국 목수팀이 전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내가 입사하기 2달 전쯤 호주 백인 목수가 플러머(배관공)인 자신의 동생과 함께 이 회사에 들어온 뒤 적잖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는 나와 동년배의 목수였는데 젊어서부터 목수일을 했다고 한다. 목수 경력이 20년의 넘는 베테랑 목수였다. 다만 경력에 비해 실력이 다소 부족해 보였다. 물론 내가 모든 그의 능력을 판단하기 힘들지만 내가 보아왔던 한국 목수 기술자들에 비해 아는 것과 디테일한 스킬이 부족해 보였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는 미성년에 애를 낳아 딸이 4명 딸린 딸부자 아버지였다. 첫째 딸은 이미 성인이 되어 독립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증손자까지 볼 수 있겠다.


“You’re full of success already in your life.”

“What do you mean?”

“Because You’re already rich of children.”

"Haha"


그와 처음 나눈 대화에서 했던 나의 말을 들은 그가 멋쩍은 웃음을 보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부터 회사에선 백인과 황인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장은 오랜 경력의 호주 백인 목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인 우리의 언어 소통능력이 그에 비길 수가 없었고 또한 그는 항상 사장에게 붙어서 우리가 한 일들에 대해 좋지 않은 험담을 하는 것 같았다. 주변의 다른 외국인 동료들을 통해 전해오는 그의 우리팀에 대한 뒷담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더 이상 동료가 아닌 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뒤에서 우리의 험담을 했건 하지 않았건 이미 생겨난 그에 대한 적대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커져갔다. 우리와 전혀 소통이 없이 사장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좋지 않은 기분은 그를 완전히 나쁜 인간으로 낙인찍어 버렸다. 서로 직접적인 감정적 충돌 없이 이렇게 감정이 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때 나는 소통이 부재하면 그 자리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사회가 증오와 불신으로 가득한 이유 또한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던가. 어쨌든 우리가 그로부터 직접적으로 들은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돌아서 들려오는 험담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더욱 우리를 분노케 만들었다.


며칠 전이었다. 그의 와이프가 마치 인형 같이 생긴 태어난지 1년된 막내딸을 데리고 공장으로 찾아왔다. 백인 목수는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우리가 만들고 있는 대형 하우스 내부를 구경시켜주고 있었다. 나는 사실 그의 와이프가 아이를 데리고 공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눈치채고도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 때문에 내가 그의 와이프와 아기에게 다가가는 것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잠시 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백인 목수는 내가 그의 아내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행동에 다소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Wow~ so adorable”

“You like children, aren’t you”

“Absolutely, May I take a picture with her”

“Of course”


그는 아기와 함께 사진을 찍자는 나의 말에 잠시 당황스러워했지만 밝은 표정의 아내가 그를 내 쪽으로 밀치며 같이 찍으라는 시늉을 했고 그렇게 나와 그와 그의 아기가 카메라 앵글에 담겼다. 아마 그는 내가 이렇게 다가와서 살갑게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대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왜냐면 나 말고 다른 동료들은 아무도 그의 가족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행동이 그에게 어떻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날 이후 내가 뭘 찾거나 물어보면 무심한 척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주고 알려주었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고 물어오지 않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물어오는 내가 이상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나쁜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가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가 우리 뒤에서 했던 말과 행동은 아마도 그가 살아남기 위해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4명의 자녀를 가진 가장(家長) 어디서 일을 하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찾은 일자리, 이곳에선 아마도 좀 더 빨리 입지를 다지고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방법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스스로가 만들어낸 불안과 질투와 경쟁심이 좀 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만들었음이리라.


함께 올라가는 건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누군가를 밟고 낮추며 자신이 올라가는 방법은 찝찝함과 뜨끔함은 있지만 확실히 빠르고 효과적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밟힌 자가 서슴없이 해맑게 다가오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밟힌 지도 모르는 멍청이 아니면 밟히고도 다가오는 또라이 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를 아픈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아픈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분노보다는 연민이 생겨나고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더라.

Jesus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나이다.’”


- [누가복음] 23:34 -


예수도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내려다 보았다. 자신을 죽이고 해코지하는 자들을 분노와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두 죄수와는 달랐다. 그는 그들을 아픈 사람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몸이 죽어가는 자신보다 정신이 죽어가는 그들을 더 불쌍히 여겼던 것이다.


당신을 화나게 하는 누군가가 있는가? 그럼 그에게 다가가 그의 삶을 관조하는 자세로 좀 더 드려다 보라. 그럼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닌 아픈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아픈 사람일 수도 있음을 염두해야 한다.  그럼 증오가 연민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지도…


증오와 연민 사이에서


[감정 조절] 권혜경 in Mcdonald Waterl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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