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면 알 수 없는 흥분과 용기, 주체할 수 없는 비이성이 우리를 지배한다”
- 허연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
당신은 비이성적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다. 그 대신 당신은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그리 쉽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그토록 갈구하며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쉽게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진실된 사랑 하려면 이성을 놓아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놓고 살아가면 당신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미친 짓이다. 미치지 않으면 사랑에 빠질 수 없다. 우리는 미치지 않으려 하기에 사랑과 멀어진다.
'허연', 나와 비슷한 글을 쓰는 작가를 만났다. 책의 행간에서 뽑아낸 상념들을 채워서 책을 만들었다. 주옥같은 글귀들이 만들어내는 주옥같은 생각들이 자신을 만들어 간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이며 타인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타인은 가식의 포장과 위선의 가면을 벗겨낸 사람(작가)을 말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타인은 가식과 위선으로 우리를 대하고 있기에 우리 또한 가식과 위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가 여러 가지 페르소나(Persona)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나는 책에서 타인을 들여다 보고 그 속에서 나를 찾는다. 글이란 가식과 위선으로는 계속 쓸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가 읽었던 수많은 책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책 속에 남기고 간 글귀들이 삶을 살아내고 글을 써내려 가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책에서 사랑에 관한 글귀들이 나에게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을 얘기해보려 한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Love! like you’ve never been hurt”
- 알프레드 디 수자 (Alfred D'Souza) -
누구나 한 번쯤 보고 들어본 글귀가 아닐까? 예전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글귀가 이성(理性)과 관계가 있다는 작가의 해석에 불현듯 시공을 초월하는 공감이 밀어 들었다.
첫사랑 (The first Love,初戀)
누구나 첫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당신의 첫사랑을 기억해 보라. 그 사랑은 이성적이었는가?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그건 첫사랑이 아니었다. 다시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시길…. 아마 첫사랑의 감정이 비이성의 대표적인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보통 첫사랑은 추억을 남기지만 또한 상처를 남기고 지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첫사랑은 오랜 시간 뇌리에 남아 이후에 다가오는 사랑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내 맘 같지 않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물론 상대는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그런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저 자신의 상대에 대한 기대가 만든 실망이 가져다준 상처일 경우이다. 그 기대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그 상상과 현실의 괴리가 만들어낸 상처이다. 마치 드라마(비현실) 속의 삶을 현실에서 기대하는 것 같은.
“전에 함께 했던 사람은 어땠어요?”
과거 이성 친구를 사귀면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물어보던 질문이 있었다. 항상 하고 나면 후회를 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에 뇌를 거치지 않고 던졌던 질문이었다.
과거 연인과의 이별 후에 찾아온 또 다른 사랑은 항상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결국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서 현재를 판단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경험들이 이성을 일깨우고 작동시키며 또 강화시킨다.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성도 없다. 이성은 경험의 산물이다. 그래서 처음 했던 사랑은 이성이 개입하지 않았다. 왜냐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열렬했으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비교될 수도 없는 사랑이었다.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이 ‘사랑’이라는 단어의 (자신만의) 관념을 심어준 사랑이었다. 모두가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과 방식이 다른 것은 바로 내가 했던 첫사랑의 경험이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에 다가오는 사랑도 사랑의 관념에 영향을 미치지만 처음 만들어진 사랑의 첫 관념, 즉 처음 세워진 프레임은 꽤나 오랜 시간 나를 지배한다. 알다시피 프레임(골조)이 바로 서지 않으면 집이 기운다. 그렇게 사랑도 기울어진다. 하지만 과연 우리 중에 누가 기울지 않은 완전히 바로 선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모두 동시에 첫사랑이었다면 가능할 수 있을지도. 그 사랑은 아마도 서로를 미는(주는, Give) 힘이 평형을 이룬 사랑이 아니었을까? 서로가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상황이다. 함께 하는 시간이 모두 아름답고 행복하다. ‘이성’과 ‘논리’와 ‘합리’라는 단어는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감성만이 충만하며 서로에게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때에 아담이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 [창세기 2:23] -
아담이 첫사랑인 이브(하와)를 만났을 때의 그 느낌과 같지 않을까? 그런 사랑은 반드시 현실의 벽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성경 속의 이야기처럼… 이제 그 어디에도 에덴동산은 없다. 신은 우리에게서 에덴동산을 앗아가 버렸다. 아담과 이브가 처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사랑을 나누었을 때 둘은 서로를 내 몸처럼 사랑했다. 하지만 현실의 유혹은 그들을 갈라놓았다. 사랑은 사라졌고 에덴동산도 함께 사라졌다.
이건 마치 우리가 첫사랑이 끝나고 난 후 더 이상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상대를 현실의 그 어떤 조건도 생각하지 않고 비교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롯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가. 사실 이 말은 이미 첫사랑을 지나온 우리가 다시 경험하기란 너무도 비현실적이며 어려운 사랑이다. 강력한 성적 유혹에 눈이 멀어 그것이 그와 같은 사랑인 줄 착각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사실 기만된 사랑일 뿐이다. 현실의 사랑은 어쩌면 기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원하는(조건에 부합하는)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갖가지 현실의 많은 것들을 이용해 자신을 가리고 포장하는 것처럼…
아가페(Agape)
상대가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줄 수는 있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그런 사랑(아가페)은 과거의 첫사랑으로만 추억하고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의 기만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상대가 받아줄 수 있을 만큼만 드러내고 보여주며 서로가 그 영역을 확장하려 드는 줄다리기 사랑을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들 얘기하는 ‘밀당(Give&Take)’이다. 우리는 이제 이런 밀당 없는 사랑에는 더 이상 흥미도 관심도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극과 스릴과 득실이 없는 사랑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우리가 첫사랑을 거치며 그런 사랑이 현실에서는 상처가 된다는 것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는 ‘피해 의식’과 ‘방어 기제’라는 이성(理性)의 듀얼코어(Dual-core)가 멀티 태스킹(Multi-tasking)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상처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지나간 사랑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그 상처 때문이다.”
- 허연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
어쩌면 우리가 점점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모두 이 상처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 이성과 합리와 논리를 내세워 현명하고 이상적인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사실 열정적인 사랑은 현명함과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다.
기억해 보라. 일과 수업을 제쳐두고 잠시라고 상대를 보기 위해 달려갔던 기억, 비가 내리는 대로변에서 우산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또 키스했던 기억, 함께 있을 땐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인지되지 않던 그런 기억, 그게 바로 사랑에 빠진 상태 아닌가. 하지만 우린 이제 더 이상 그러지 못한다. 보고 싶어도 일과 수업을 완수하는 것이 먼저이고 아무리 반갑고 사랑스러워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을 찾아서 포옹하고 키스해야 한다. 함께 있다가도 다른 약속과 일을 위해 수시로 시계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미치지 않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아마 당신은 아마도 사랑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도… 당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현명하게 사랑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족함은 없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주는 사랑이 아니라 받는 사랑에만 익숙해진 것이리라. 그리고 그건 사랑이라기 보단 당신의 지식과 지혜와 노력에 대한 타인들의 존경과 관심을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당신은 존경과 관심에 목말라 있는 것이다. 그것들로 과거 경험했던 그 사랑을 대신함이리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미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아주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되어 갈수록 더욱 매정하고 메마르고 차갑게 변해가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는가….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 허연 -
https://youtu.be/8AVJxMohGx8?si=Tg_0Nvmvdq9U8J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