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세상과, 심지어 신과 하나라는 말은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자아를 확인한다는 의미다”
- 옌스 푀르스터 [클래식 클라우드 – 에리히 프롬] 중에서-
나치의 탄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온 미국의 뉴욕, 입항하는 배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그는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가져다줄 새로운 인연과 운명을 기대했으리라. 그는 후세에 자신이 ‘사랑의 전도사’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는 1980년 3월 18일 내가 태어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나 또한 나의 조국을 떠나 지구 반대편의 낯선 땅으로 온 것 또한 무언가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자유의 여신상
나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떠올리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살면서도 내가 그리 자유롭다고 느껴본 적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헌법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국민의 자유가 왜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이건 나만 느끼는 것일까? 그 자유라는 것은 그냥 법전에만 못 박힌 글자일 뿐, ‘자유’는 전혀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과거 성인(예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들은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일까? 인간은 구속 안에서만 자유를 느낀다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의 말이 받아들이기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구속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그것을 느끼고 그것이 자유라고 착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자유란 안전함과 편안함 그리고 익숙함을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에리히 프롬(1900~1980)
에리히 프롬은 고국(독일)을 떠나 미국에서 왜 독일인들이 자유를 포기하고 독재자(히틀러)에게 열광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했다. 그 고민이 [자유로부터의 도피 : Escape from Freedom](1941)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쓴 첫 번째 작품이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이후 [사랑의 기술 : The art of loving](1956) 그리고 [소유냐 존재냐 : To Have or to Be?](1976)가 대히트를 치면서 당대 가장 유명한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올라섰다.
그는 [사랑의 기술]로 인해 사랑의 전도사로 강한 인식이 박혀있지만 그가 가장 먼저 고민했던 주제는 ‘자유’였다. 나는 이전에 에리히 프롬의 또 다른 전기를 읽고 사랑에 대한 독후감[모성애와 이성애는 연결된다]을 썼다. 이번에 그의 또 다른 전기를 읽으며 '자유'에 대해 상념이 떠올랐다.
에리히 프롬에게서는 아주 색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철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이며 또한 영성학자 같기도 하고 또한 사회심리학자이고 또한 사랑을 전하는 에세이스트 같기도 하다. 정체성이 모호하다. 경계를 넘나드는 글을 쓰는 작가이다. 물론 그의 생각에 비견하긴 힘들지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나의 글과 닮은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그에게 끌린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유의 조건
자유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가 이 자유를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느냐 이다. 자유는 너무 추상적이다. 형체도 실체도 없으며 각자가 자유를 느끼는 방식 또한 다르다. 이상한 건 우리는 그토록 자유를 갈구하고 또한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 살고 있지만 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며 살아가느냐이다. 혹시 자유는 또 다른 상위의 개념 혹은 틀(프레임)에 갇혀있는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 거대한 틀이 잘못되었거나 문제가 있다면 자유 또한 온전치 못하리라.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 대한민국 헌법 제19조 –
그래서 헌법을 찾아보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고 그 발견은 지금부터 써 내려가는 글에 길을 열어주었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하는 자유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문제는 바로 양심이었다. 양심이 고장 난 것이었다.
*양심(良心) :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네이버 사전] 참조
최근 호주(시드니) 한인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 정치인의 도피 행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양심이 잘못된 한 인간의 일가족 엽기 살인극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정치를 논하면 혼탁해진다. 난 맑아지고 싶어서 글을 쓴다.
정치인과 살인자
이곳 호주에 온 이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난 이들보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종류가 더 많은 것 같다. 세계로 나가니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예측과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들이 적지 않다. 기존의 나의 상식과 관념을 벗어나는 인간들을 만나면서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되고 있었다.
현실과 가상을 뒤섞은 인간
그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사람은 현실과 가상의 삶을 완전히 뒤섞어 버린 사람들이었다. 이건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인간들을 적잖이 경험했다. 나 또한 현실과 가상(이상) 사이를 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왜냐 나는 허구(소설)를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분리시켜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뒤섞어 버렸다. 우리는 이런 류의 사람들을 허언증(리플리증후군)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이전에 몰랐지만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의 특징은 거짓을 진실로 포장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거짓들이 꽤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화려하며 관심을 끄는 것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빠른 호감을 얻어낸다. 그리고 그 호감이 믿음으로 이어질 즈음이면 조금씩 본색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걸 심리학 용어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하더라.
재밌는 사실은 인간이란 동물은 이 믿음(맹목적) 때문에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우리가 사이비 종교에서 벌어지는 믿기 힘들고 충격적인 행각들이 이해되지 않지만 사람은 맹목적이고 무지한 믿음 속에 갇혀버리면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흐려진다. 또한 그들은 자유롭게 그들의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려 한다.
두 가지 양심
이것이 바로 양심의 기준이 갈라지는 과정이다. 앞에서 양심은 선과 악을 판단을 내리는 기준이라고 용어적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이 판단 기준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오인하게 된다. 자신의 판단이 옳기 때문에 타인은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는 논리가 합리화된다. 자기 합리화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오류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고 이런 결핍은 바로 서지 않은 애정관계(사랑의 결핍, 모성애 혹은 이성애)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내가 이전의 독후감에서 언급했다. 우리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양심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양심은 기준도 뉘앙스도 없다. 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그 사람의 양심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문제는 그 양심이 선한지 악한지 모를 뿐이다. 무지이며 공감능력의 결핍이다. 공감능력의 결핍은 어찌할 수 없다. 왜냐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베풀 수밖에 없다. 공감 용량이 그렇게 형성되어 버렸다. 미움과 소외 속에 자랐는데 어찌 사랑을 베풀 것인가? 다만 우리가 이 미움과 소외의 족쇄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알고(知己) 자신을 극복하는 것(克己)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오고 경험한 자들을 보고 본받으며 과거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지를 극복해 내는 과정이다. 아주 힘들고 어렵고 어색할 것이다. 성장판이 닫히고 성장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부모와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연약한 존재는 주어진 환경에 우선 적응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 적응된 환경에서의 생존 방법이 나를 지배해 간다. 그것을 바꾸려면 또다시 괴로운 시간과 어색한 환경을 견뎌야만 한다. 훈련과 노력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화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자들이 있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루터와 칼뱅
“루터의 믿음은 완벽하게 복종해야만 사랑받는다는 확신이었고 (중략…) 칼뱅은 인간이 선하거나 악하게 태어나고, 선택된 자에 속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옌스 푀르스터 [클래식 클라우드 – 에리히 프롬] 중에서-
과거 기독교가 분리되던 그 시기 그 (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위대한 두 인물이 있다. 그들은 썩어빠진 종교지도자들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원했을 것이다. 신을 독점하는 자들을 비난하며 신을 만인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들의 순수하고 어진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신의 존재 또한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도 아직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이 말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관념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변화되고 구원됨이 이미 결정지어진 것 같은 뉘앙스의 문장은 결국 누군가를 정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사라지게 만든다. 자신만 구원받는다는생각은 타인의 구원을 포기한 자이다. 이기주의를조장할 수 있다.
오래전 [성선설과 성악설]에 관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이성적으로는 성악설을 믿지만 감성적으로는 성선설을 믿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마음이 끌린다. 우리가 냉혹한 세상 속에서도 마음속엔 항상 따뜻한 것과 아름다운 것들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이유는 분명 차가운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을 원한다는 것이리라.
"내가 말한 것이 내 양심에 따라야 하나니 이는 나의 양심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참하심으로 더불어 증거를 하는 바라"
- [고린도전서 10:29] -
우리는 모두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다. 다만 그 자유는 각자의 양심에 근거한다. 그리고 양심은 기준이 없다. 우리는 이제 그 양심의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다. 양심의 뉘앙스를 선한 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고 양심이 악한 쪽으로 기운다면 세상은 더욱 냉혹하게 변해 갈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함은 이런 방향성의 경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며 만물과 내가 연결되어 있으며 신이 내 안에 함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왜 서두의 문장으로 글을 시작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그리고 프롬이 왜 자유를 생각하며 결국엔 사랑을 얘기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