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좀 더 작가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상대가 아무리 악질이라고 해도 말이다”
-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
나는 작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한다. 작가는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 [네이버 국어사전]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글을 창작한다. 글 작가이다. 그리고 작가는 지속성을 지녀야 한다. 한두 번의 글과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작가라 할 수 없다. 계속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글) 작가는 ‘계속 쓰는 사람’이라 정의하고 싶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글쓰기가 밥 먹기와 같아야 한다. 한두 번의 끼니를 거르는 건 견디지만 계속 굶으면 죽어가듯이 계속 쓰지 않을 수 없어야 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쓰고 있다. 내가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건 글을 쓰고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난 이후 깨닫게 된 사실이다. 이건 또한 소설을 쓰는 방식이다. 소설이 여타 다른 글쓰기와 가장 다른 점이기도 하다.
글쓰기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일기부터 에세이, 칼럼, 독후감(서평), 감상문 등 나는 다 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글쓰기는 뭐니 뭐니 해도 소설 쓰기이다. 다른 글들과 달리 소설은 타인을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물론 나를 중심으로 쓰는 소설(자전적 소설 =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도 있다. 하지만 소설은 나에서 타인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를 들여다보는 1인칭에서 타인의 관점 혹은 모든 관점을 들여다보는 3인칭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를 먼저 알고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일기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이야기는 읽어 보면 그것이 마치 일기나 에세이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 일기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글이고 진정성이 있다면 독자로 하여금 강한 몰입감을 선사할 수 있다. 만약 작가와 같은 경험과 느낌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일기는 어디까지나 일기이다. 자기중심적인 글이다. 글이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글을 나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글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글이 나에게만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연결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구체화시키고 시각화시키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글이 그림과 영상의 기초가 되는 이유이다. 타인이 공감하는 이야기가 되려면 다른 인물(타인)들의 말과 행동과 감정들에 집중해야 한다. 특히 3인칭 시점(전지적 or 관찰자)에서 소설을 쓴다면 더욱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한다.
“안톤 체호프는 소설과 희곡을 통해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게 엄청난 치유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
안톤 체호프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뒤를 이어받은 러시아의 대문호로 손꼽히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원래 직업은 의사였다. 그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을 치유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가난과 가정의 불화 속에서 씻기 힘든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지고 성장했다. 그리고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하고 소설과 희곡을 쓰면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과거와 그 기억을 만들어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을 상상했다. 그 상상들이 글이 되고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람들이 악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악마에게서 상처를 받았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미움과 증오는 동정과 연민으로 바뀌게 된다. 악의 대물림이 끊어지는 순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와 악마의 이분법적 사고 체계가 너와 나를 나누고 분리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악마라고 생각했던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겐 천사였을 수 있다. 당신 또한 누군가에겐 악마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천사였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존재하는가? 이건 상황과 시간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사 속에 악마를 악마 속의 천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낙인찍을 권리가 없다. 우리는 말이나 개 돼지처럼 품종과 혈통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안톤 체호프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 우정, 존경보다 사람들을 더 뭉치게 하는 것은 어느 대상을 다 함께 미워하는 것이다"
-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
어떤 선한 이가 사랑과 우정을 설파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얻었다. 그렇게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 앞에 자신보다 더 선한 사람처럼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그곳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미움과 시기가 샘솟기 시작한다. 그 존경과 관심을 되찾기 위해 더 선한 자를 악으로 몰아간다. 선과 또 다른 선이 만나 악이 탄생했다. 과거 예수도 그렇게 신을 모시는 제사장들에 의해 악마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신이 보낸 자를 신을 모시는 자들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신도 황당했으리라 아직 올 때가 아닌데 돌아와서?! 그래서 신은 그를 다시 살려 보냈나 보다.
영화 [Son of God] 중에서.. 예수와 제사장들 그리고 간음한 여인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이 존경의 관심을 되돌릴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왜 정치인들이 그렇게 서로를 공격하고 비난하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가? 다가오는 심판의 날(선거)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제한된 시간 안에 더 많은 내 편과 내 표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 D-DAY가 되면 진실된 자가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자가 정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용서와 관용보다 미움과 혐오를 조장한다. 신속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미움이다. 그래서 정치판은 혐오가 만연하고 정치인은 더러워진다.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읽고 쓰며) 타인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바로 내 안에 그리고 타인 안에 서로 다른 선악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선과 악이 충돌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선과 악의 두 세계가 충돌하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그 둘을 융합할 수 있다면 미움이 연민으로 더 나아가 사랑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상처를 준 사람은 절대 너를 치유해 주지 않아, 너를 치유하는 건 너의 몫이야.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네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느냐가 아닐까"
누군가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가족과 연인과 친구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사실 낯선 이들이 우리에게 남길 수 있는 상처는 외상(겉으로 보이는) 뿐이다. 또한 외상도 가해자가 아니라 의사가 치료한다.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가까운 이들이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를 주는 사람은 상처를 치유해 주지 않는다. 상처는 받은 자만 기억한다.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밖에 없다.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그 상처를 준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상대방 또한 분명 자신이 받은 상처만 기억하며 살아온 자 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 받은 상처만 기억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기억은 무의식에 깊이 뿌리 박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원하는 것이고 자신이 그렇게 악마가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상처 입은 피해자로서 되물림의 반복을 합리화할 이유와 명분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을 상처 입은(날개 잃은) 천사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의 아저씨 (My Mister)
1인칭과 3인칭의 융합
내가 가장 명작으로 꼽는 드라마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나의 아저씨]이다. 작년에 그 드라마의 극본을 읽어 내려갔다. 드라마 장면들이 떠오르며 극본에 적힌 인물들의 대사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각기 다른 모든 인물들이 품었을 만한 생각과 행동과 말들을 한 작가의 머리에서 모두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이 드라마는 연출도 기가 막혔지만 그 극본이 없었더라면 가능할 수 없었다.
더 놀랄만한 사실은 그 극본의 작가는 여성(김해영 작가) 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주인공인 중년 직장 남성의 삶과 생각과 심리를 그토록 깊이 꿰뚫어 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내가 남이 되어 보는 것 그것이 바로 타인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그것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말이다. 3인칭 시점(타인)을 1인칭 주인공 시점(나)과 뒤섞어 버렸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섞어버리면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은 1인칭 시점인데 그 1인칭이 주인공 혹은 관찰자, 즉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 혹은 인물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꽤나 쉽지 않은 작업이다. 왜냐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는 쉽게 내뱉은 말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매일 연습해야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된다.
너의 이름은. (your name., 君の名は)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을 기억하는가.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여러 번 봤다. 남녀가 뒤섞이며 두 시점과 관점에서 생각하는 글쓰기가 명작을 만들었다. 그는 분명 남자와 여자의 관점에서 서로가 이성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오고 가며 남자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었다 하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남자가 여자가 되어 여자가 남자가 되어 생각해 본다는 것만큼 기발하고도 어려운 상상이 있을까. 하지만 이 과정이 바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남녀를 이해하려는 가장 아름다운 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도 요즘 그런 상상을 해본다. 여자 주인공이 되어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본다. 그렇게 1인칭 시점을 남자가 아닌 여자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상상을 한다. 어렵지만 신비롭고 재미있다. 설사 그것이 실제 여자가 전혀 이해하기 힘든 말도 안 되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이런 시도가 계속되면, 즉 관심이 가면 찾아보고 알아보고 관찰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 이 글쓰기는 결국 내가 타인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하는 것보다 노력하는 자가 더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법
나는 상처 주고 아픔을 주는 사람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자신이 그 상처와 아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꿔보는 것에 대한 조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처를 상처로 아픔을 아픔으로만 기억하고 되뇌는 것은 아주 힘든 삶을 예고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상처를 주는 사람은 절대 상처를 치유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한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처와 아픔을 동정과 연민의 감정으로 변환할 수 있다면 나는 치유될 수 있다. 그럼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가 긍정적이라면 그건 당신의 삶이 변화되고 있는 것이고 그 변화는 자신이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이의 삶을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면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