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요즘엔 뭔가 텅 빈 것 같아
지금의 난 누군가 필요한 것 같아...♩♬
- 신해철 [일상으로의 초대] 중에서... - 음악을 감상하며...
그의 음악은 떨림(감동)과 울림(영감)이 있다. 우리는 이런 음악을 소울(Soul) 음악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노래는 리듬도 가사도 모두 영감을 준다. 따로 떼어 놓아도 각각 손색이 없는 예술성을 지녔다. 그의 노래는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언제 어디서도 반갑다. 이른 새벽 출근길에 흘러나온 그의 노래가 글감을 던져준다.
그의 [일상으로의 초대] 가사 첫 부분이 호주에서의 나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곳에 와서 독서와 사색이 시작되었다.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기분이 결핍(정신적)과 궁핍(물질적)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들로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과 나는 텅 빈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아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 텅 빈 세상 속 텅 빈 존재 안에 (자)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한다. 이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기 위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신해철 [일상으로의 초대]
“띠리리 지이이잉 띠리리 지이이잉”
새벽 4시, 핸드폰의 알람이 울린다. 일상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다. 몸이 무겁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더듬거리다 핸드폰을 찾아 소음을 차단한다. 다시 적막이 찾아들고 잠도 찾아든다.
“벌떡~”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다리를 방바닥에 내리고 핸드폰을 본다. 4:15를 가리키고 있다. 15분여 동안 육체와 정신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정신의 승리다. 화장실로 향한다. 바지를 내리고 좌변기에 앉는다. 오늘은 똥이 나온다. 적막 속에서 똥 떨어지는 소리만이 화장실 안에 울려 퍼진다. 어젯밤 늦게 먹은 라면이 원인이다. 야식을 먹은 날이면 다음날 몸이 더욱 무겁다. 밤새 위장은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육체와 정신의 공방전이 좀 길어진 모양이다. 보통 때면 5분여의 짧은 공방으로 끝났을 것이다.
변기에 앉아 핸드폰을 화면을 들여다본다. 전날 읽고 들었던 책(전자책)을 훑어본다.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해 놓은 것들을 빠르게 스캔하듯 읽어 내려간다.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아내고 핸드폰 사진첩을 훑어본다. 최근에 찍은 사진 중에 글귀와 잘 어울릴 만한 것을 찾아 사진 위에 글귀를 덧씌운다. 그리고 그 글귀를 영어로 번역한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한영 번역은 나의 유일한 영어 공부이자 스트레스이다. 오늘 문장은 좀 길다. 번역 시간이 길어진다. 똥은 이미 다 쌌는데 번역이 끝나지 않는다. 다리가 저리다. 오늘은 파파고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글귀를 인스타 스토리에 업로딩 한다. 영어 공부와 독서 리마인드의 콜라버레이션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양치와 세수를 끝내고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로션을 바르고 선크림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갖가지 비타민과 오메가 3 마그네슘등 갖가지 영양제를 입안에 털어 넣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현대인은 약에 의존해 연명한다. 100세 시대가 도래한 건 모두 이 때문이리라. 언젠간 약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도래할지도…
주방으로 내려가 일터에서 참으로 먹을 토스트를 만든다. 글루텐 프리의 곡물씨앗이 촘촘히 박힌 식빵을 토스트기에 구워내어 땅콩버터와 그날 기분에 따라 각종 잼을 발라서 랩으로 칭칭 감싼다. 냉장고에서 일할 때 마실 얼음물을 챙긴다. 콜라 한 캔도 잊지 않고 보온가방에 함께 넣는다. 오늘은 점심을 현장 근처에서 사 먹어야겠다. 외장 공사 일을 할 때는 도시락을 데워먹을 전자레인지가 없다. 이제 출근 준비가 완료되었다.
보통 집을 나서면 4시 반이 좀 넘어간다. 요즘 일하는 곳이 꽤나 멀어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까? 아니 들을까? 최근에 읽어왔던 페소아의 [불안의 서]의 여운이 오래간다. 그 여운을 이어갈 만한 책을 찾다가 우연히 보게 된 SKY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도서관 책 대여 순위라는 짧은 기사 글을 보게 되었다. 세 대학교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대여되는 책이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의 존재는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다.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교양서적(과학)인지 그 정체성이 모호한 책이다. 나랑 비슷하다. 그래서 이 책을 다음 책으로 정했다.
“외피란 주의를 분산시키는 위험한 것, 분류학자들을 속여 사실은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 생물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보게 하려는 술책일 수 있다….(중략) 신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부용 메스를 쓰는 것이다.”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
오늘은 다행히 귀가 솔깃한 문장이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인간 세계나 동물의 세계나 눈을 속여 자신을 실체를 감추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하다. 눈에 보이는 외피(외모)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출퇴근 시간마다 오디오 북으로 듣고 있는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 책이다. 이전 책(불안의 서)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일까 아니면 SKY학생들과 내가 결이 너무 달라서일까? 리뷰를 좀 찾아보니 책의 초반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많다. 작가가 뭔 말을 하려는 건지 서론이 긴 책인 듯싶다. 뭐 요즘 같은 시대에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뒤에다가 숨기고도 이 정도의 판매고와 호평을 받을 정도라면 끝까지 읽어볼 가치가 있을지도… 빠른 자극과 흥미에 익숙한 자들은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러고 보면 SKY 학생들의 인내와 끈기는 남다른 모양이다.
Why fish don't exist 차가 많지 않은 이른 새벽은 운전하기 좋다. 가사 없는 잔잔한 뉴에이지 배경음악을 깔고 오디오북을 들으며 어둠 속을 내달린다. 시드니의 중심에서 꽤나 떨어진 외곽 변두리의 맥도널드에 도착했다. 바로 2~3분 거리에 공사현장이 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1~2시간이 남았다. 호주에는 24시간 영업을 하는 카페나 음식점은 맥도널드가 유일하다. 내가 맥도널드와 친해진 이유이다.
“Good morning~”
“Good morning~”
보통 이 시간 맥도널드 매장에 도착하면 덩치가 커다란 백인 할아버지가 매장 청소를 마무리하고 있을 즈음이다. 인사를 건넸다. 그도 미소로 화답한다. 그가 대걸레로 매장 바닥을 닦고 있다. 나는 키오스크에서 플렛화이트 라지 사이즈를 주문한다. Customize(주문 설정) 메뉴를 이용해 extra hot(뜨겁게)를 설정한다. 뜨겁게 내린 커피가 차가운 우유와 만나면서 온도가 내려감을 안다. 롱블랙(아메리카노)이 아니라면 ‘뜨겁게’를 요청해야 글을 쓰는 동안 완전히 식어버림을 방지할 수 있다. 그리고 오전에 참을 먹기 전까지 필요한 칼로리를 위해 1/2 sugar(설탕 반스푼)을 추가한다.
“Half sugar Please~”
한 스푼은 부담스럽고 안 넣기는 아쉬운 자를 위한 배려인가? 달지도 그렇다고 밍밍하지도 않은 맛에 익숙해져 간다. 언제부터인가 커피를 주문하면 바리스타에게 습관처럼 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곳 맥도널드 매장은 시드니 외곽이라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이 백인들이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향하면서 하나둘씩 매장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대부분이 백인이다. 언제부터인가 시드니 중심부는 이민자들이 북적대고 외곽엔 백인들의 분포하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며칠 동안 이곳에 출근하듯 오면서 유일하게 마주치는 동양 여자를 한 명 발견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한눈에 봐도 눈에 띈다. 그녀도 처음 나를 보았을 땐 약간은 의아한 듯한 눈빛이었다. 이른 새벽 새로운 이방인의 등장은 그곳을 일상처럼 드나들던 사람에게는 조금은 이색적인 느낌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녀는 항상 새벽 6시쯤 등장하는데 그녀 옆에는 몸이 좀 불편해 보이는 백인 남자와 함께 온다. 배우자인 것 같아 보였다. 그 둘은 항상 커피와 팬케익을 시키고는 매장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신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녀는 항상 그 백인 남자의 무릎 위에 앉는다. 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다. 대화가 많지는 않은데 가끔씩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곤 한다. 그 모습이 나의 상상을 자극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에는 분명 둘만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매장 한쪽 구석에 긴 테이블에는 백발의 백인 할머니와 할아버지 무리가 새벽 마실을 나와 있다. 어르신들이 아침잠이 없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매한가지인가 보다. 나이가 적어도 70대쯤은 되어 보인다. 매일 그들은 이곳에 모여 서로 간밤의 안녕을 확인하는 모양이다. 머지않은 어느 날 누군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곳에 모이는 모두가 그의 집으로 찾아갈 것이다. 삶이 당장 내일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노년이 되면 하루하루가 지나감은 어떤 기분일까?
“106, flat white~”
“Thank you”
“Have a nice day”
금발의 소녀 바리스타가 영수증에 적힌 나의 order number를 외친다. 나는 커피를 받아 들고 그녀에게 미소와 함께 감사의 말을 건넨다. 그녀도 잊지 않고 내 맘처럼 ‘나의 좋은 하루’를 희망한다.
이제 노트북을 켜고 음악을 찾는다. 오늘은 [유키쿠라모토]의 피아노 연주 모음을 재생한다. 첫 곡은 Medition(명상)이다. 노이즈 캔슬링으로 주변 소음이 차단되고 감미로운 음악만이 귀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평안이 찾아들고 감성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어제 쓰다만 글을 드려다 본다. 글이 음악과 어울리지 않아서일까?!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워드 창을 띄웠다. 새로운 상념들이 밀려든다. 그것들을 거침없이 써내려 간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또 다른 시간 속으로 빠져든다. 이 순간 나를 둘러싼 현실의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현실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이 순간이 나에겐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헐~ 늦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출근 시간이다. 지각이다. 쓰던 글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고 가방을 챙겨 헐레벌떡 맥도널드 매장을 뛰쳐나간다. 그 순간에도 이런 나의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매장 직원의 시선이 느껴진다.
비가 내린다. 어제는 뜨거운 하루였고 오늘은 축축한 하루가 될 모양이다.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면 이제 행복하지 않은 시간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일상의 (맥)모닝이 시작된다.
새벽을 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