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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26. 2019

성선설과 성악설

악에서 선을 만드는 교육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 중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의 얼굴에서 악마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중 전자를 맹신해 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기억이 가물하지만 윤리 수업 시간에 순자보다는 맹자가 더 비중 있게 다뤄졌었기 때문일까? 선생님도 맹자를 강조했지 순자는 존재감이 미약했다. 시험에도 잘 나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출제빈도에 맞춰진 주입 교육이 오랜 시간 우리의 뇌를 지배한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은 바뀌었다.   

   물론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경험한 것도 있겠지만 최근에 읽었던 책 [아버지라면 유대인처럼],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성악설을 믿고 있다.  그들의 기본적인 교육방식은 악에서 태어난 아이를 교육을 통해 선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을 악으로 몰아세우는 게 조금은 비약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게 죄'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나온 존재는 죄를 범하기 쉽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부모와 학교를 통한 사회화 과정이 필요하다.
   
   악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무섭고 흉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런 악마는 하일 뿐이다. 진정한 고수는 선한 모습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한국인은 외면과 내면을 동일시하는 관습적인 오류를 범한다. 외모와 지위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화려하고 권위 있는 모습만 추종하고 열광한다.  그것이 나의 내면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웃으면서 뺨 떼리는 사람을 생각해 봤는가? 그런 사람은 무섭다. 화를 내며 폭력을 행사하면 감정표현이 솔직한 인간이지만 감정표현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정신이상이거나 악마이다. 이런 성향을 보이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웃으면서 다가와 다른 아이를 밀치고 부모의 얼굴을 때린다. 모르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제재가 없으면 뇌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그럼 진짜 악마가 될지도 모른다. 그냥 놔둘 것인가?  
   
   악마는 사회화가 되지 않은 사람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하고 고귀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무시하고 깨뜨리는 자들이다.  인간 사회는 수많은 규범이 존재한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부터 각 사회문화별로 규정한 규범 그리고 사회법까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배우고 익히면서 사회화되어 간다.  사회적인 약속을 어기는 자는 사회에서 존재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심할 경우 사회와 격리된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사람 인(人)의 글자가 두 사람이 기대고 있는 형상이듯이 서로 의지하며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한다.

   자녀 교육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주변에 자녀 교육을 두고 다투는 집안을 많이 목격한다. 취학 전 아동은 엄마와 아빠를 롤모델로 세상을 학습한다. 부모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제 학교는 더 이상 학생에게 인성교육을 하지 않는다. 힘들게 얻은 교사 자리를 학생 인성을 바로 잡으려다 내 밥그릇까지 날려버릴 용기를 가진 교사는 그리 많지 않다. 선생님한테 뺨 맞던 시절에서 이젠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뺨 맞는 시대가 되었다. 성적지상주의 한국에서 교사는 그저 성적관리 공무원로 전락하였다.

 

  이제 아이의 인성은 전적으로 부모로부터 완성되는 것이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요즘엔 아이의 자존감과 창의력을 키운다는 명분 아래 황제 떠받들듯이 원하는 데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주면서 키우는 부모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부모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세상 밖에서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세상은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그들을 맞이하진 않는다. 생각보다 냉혹하며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 배워야 할 필요 있다.

  통계에 의하면 3살짜리 아이가 가장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다고 한다. 부모의 얼굴을 때린다던지, 다른 아이의 발로 차고 물건을 빼앗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강력한 제재(훈육, 체벌 등)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아이는 이 행동의 지속하게 된다. 물론 한 번의 제재만으로 그런 성향이 없어지진 않는다. 그런 제재가 반복되면 아이는 행동을 하기 전에 제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행동이 고통과 아픔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지하면 그 행동을 망설이게 된다.
   
  부모의 얼굴을 때리는 아이를 계속 받아주면 커서 다른 사람의 얼굴에 손 데는 것에 죄의식을 덜 느끼게 된다.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결국 부모가 나에게 허락한 자유가 어디까지인지 테스트하는 것이다. 부모의 인내심을 테스트한다. 아이는 간사하다. 부모의 눈치를 보며 그 수위를 넘나들며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려 든다.

   그런 성향을 부모가 바로 잡지 않으면 그 성향은 커서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5살이 될 때까지 부모 밑에서 이런 사회성이 길러지지 않으면 공동체 생활로 넘어가는 청소년기와 청년기 때 사회의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일은 더욱 커지고 돌이키기 힘들어진다.

  어느 부모가 자녀에게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주고 싶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훈육과 처벌을 통해 두려움과 고통을 인지시켜야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받을 두려움과 고통을 줄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온실 속에서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그릇된 사고방식이 악마를 키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 사회와 나라를 병들게 한다.  철학이 없는 전문가들이 넘쳐나는 세상은 위험천만하다. 현재 한국은 그렇게 자라나신 고매하신 어른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국민앞에선 선한 미소를 보이지만 가면 뒤 악마가 있다.

   제대로 된 온전한 선한 인간부터 만들어져야 한다. 바로 부모들의 육아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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