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그리스도로 분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그 가장(假裝 : 태도를 거짓으로 꾸밈)이 가장에서는 좀 더 멀어지고 현실에는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
책을 다 읽었다. 종이 책이라 전자책과 같이 듣기와 읽기를 병행하는 독서가 아닌 순전히 시간을 할애해서 읽어야 했다. 펜을 손에 들고 직접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정독했다. 기존에 일반인(무신론자)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와 내가 생각하던 기독교(남과 좀 다른)와 그리고 내가 생각지 못했던 기독교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책 속에서 볼 수 있었다.
C.S. 루이스는 기독교를 아주 냉철하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석은 변증법을 통해 설명한다. 분명 쉽지 않은 책이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이해가 된다. 그것도 100%가 아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소설(문학)을 제외하고는 항상 비판적인 시각으로 읽는다. 그래서 책의 내용에 100% 공감하는 경우는 드물다. 항상 작가의 생각과는 상반되는 혹은 다른 여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며 읽는다. 책을 완독하고 난 후 그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 100% 공감하기는 힘들다. 이건 그의 책을 100%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회의주의적 관점으로 모든 것을 열어놓고 생각하는 편이다. 서둘러 확정하고 결론짓지 않는다. 열린 결말을 생각한다. 그건 내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삶 속에서 또 어떤 새로운 생각과 경험을 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과 경험이 기존의 생각을 바꾸게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소질을 실제로 기르려면 그 소질이 벌써 생긴 양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
서두의 말을 기독교적 관점이 아닌 일반적인 정신분석학 혹은 심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이와 같지 않을까. 이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거나 그것이 되기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과 같다. 이미 그것이 이뤄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럼 그건 현실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커진다.
나는 비록 등단 작가(문단과 출판계가 인정하는)는 아니지만 나는 내가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려고 노력한다.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문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정말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그렇게 변해감을 지난 5년의 시간을 통해 느꼈다.
스스로를 작가로 여기고 살아가면 변하는 현상 중 하나는 항상 사물과 사람과 현상을 대할 때 그걸 글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서둘러 사물과 사람과 현상을 판단하고 정의하고 확정하지 않는다. 사물과 사람과 현상을 입체적(3D) 그리고 시간의 경과(4D)를 통해 바라보려고 한다. 그래야 글감이 생동감 있는 존재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보는 관점은 누구나 쓰는 뻔한 글감이 될 뿐이다.
경험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것이 비록 나쁜 상황과 사람일지라도 거기에 비난이나 불쾌한 감정적 소모를 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것에서 의미 있고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 무엇인지를 찾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상황들 속에서 찾은 깨달음과 의미가 나의 글 속에서 녹아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C.S. Lewis (1898~1963) 예수 닮기를...
C.S.루이스는 판타지 소설 작가이며 또한 평신도 신학자(기독교)이다. 그는 내가 위에서 설명했던 개념과 경험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찬양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예수를 찬양하고 숭배하며 그 대상을 항상 자신과 떨어져 있지만 연결된 존재로 외부의 대상처럼 경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말을 ‘예수를 닮기를' 바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리는 예수를 절대 닮을 수 없어 그는 신이야 신!”
얼마 전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목수님과 예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이 찬양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는 말도 안 되는 거라 말했다. 인간은 절대 예수를 닮을 수 없다고 했다. 그냥 그런 척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교회가 썩어가는 이유라고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예수를 신으로 믿으면 살아온 분이었다. 그는 그래서 예수 닮기를 포기했던 모양이다.
“그럼 예수가 떠나고 그의 길을 걸어간 제자들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래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지 그리고 순교했지, 하지만 그들이 예수를 완전히 닮았다고 할 순 없어.”
그는 누가 그렇게 죽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냐고 반문했다. 그렇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왜냐? 예수는 죽음을 자초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좀 다르다.
호기심, 호감과 의심 사이
난 솔직히 누군가에 기독교를 강권하지 않는다. 물론 호기심이 있다면 내가 아는 것을 알려 주고 도움을 줄 순 있어도 추천하고 싶진 않다. 이 길은 알면 알수록 죽음으로 다가가는 길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신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선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아주 큰 반전의 의미를 품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보고 나서야 그의 길을 따라갔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이 길로 안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나는 얘기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서 입으로 설명하려 들지 마세요 그냥 그들에게 호기심 가는 사람이 되세요”
무슨 헛소리냐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냥 예수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된다. 그렇다고 '내가 예수다'라고는 외치고 다니시진 마시길...' 왜 예수를 따르는 군중들이 늘어났는가? 그 시작은 모두 그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호감과 의심이다.
그의 선한 말과 행동 그리고 기적이 누군가에겐 호감을 불러일으켰고 누군가에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팔로워들이 계속 늘어난 이유였다. 그리고 의심으로 그를 따르던 자들도 결국 의심이 믿음으로 바뀌었다. 그건 예수가 행한 모든 일들이 신이 하고자 한 말과 행동이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가 관계를 가질 때도 비슷하다. 말로 조언과 충고를 하는 자들 보다는 말없이 평소의 삶의 모습에서 보이는 것들이 타인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번져가는 것이고 어느 순간 가속도가 붙는다. 이건 복리의 원리와도 닮아있다. 불씨 하나가 다른 곳으로 옮겨 붙으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 앞에서 신앙을 연설하는 자보다 내 옆에 삶으로 보여주는 한 사람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은 나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켜야만 하고 그 궁금증을 스스로 풀어가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게 다가왔던 사람도 그랬다. 초라하고 보잘것 없었지만 그가 보여줬던 일관성 있고 변함없는 말과 행동이 나에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고 나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스스로 그 이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 많은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문득 지금 글을 쓰면서 알게 된다. 변화는 자신도 모르게 온다.
“전 어제부터 새롭게 태어(변화) 났습니다.”
난 솔직히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자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난 그 사람이 지나온 시공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은 절대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냥 남일 보듯 뉴스 보듯 볼 뿐이다.
나의 변화의 불씨를 던져준 것은 궁금증과 호기심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사람을 만났고 그 이상함이 비현실적이고 이해되지 않았지만 불쾌하지 않고 부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기독교적으로 보이는(그 당시로서는) 경험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
내가 처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러했다. 호기심이었지만 의심을 품은 호기심이었다. 나는 인내심이 꽤나 강한 편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두고 지켜본다. 그래서 오래 지켜봤다.
‘그래 언제까지 예수 행세를 하나 지켜보자’
그때부터 나는 성경과 관련된 서적들과 자료들을 찾아보고 그것들을 아주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반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지식을 통해 그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다른 세상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그게 내가 성장하는 방식이었다. 그 방식은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계속 변화하는 방식이었다. 항상 열린 생각과 판단으로 이곳저곳을 들여다보고 다녔다. 그런 것들을 그에게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그에게 진리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더 이상 바뀔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 난 그에게서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하기보다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다. 그렇게 그의 삶을 관조했다.
그가 하는 예수쟁이 행세는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그는 크게 변함이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책을 보고 뒤통수를 치는 깨달음이 왔다.
“당신을 예수처럼 분장하라”
“You make up like Jesus”
이것이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 신(하나님)은 자신의 분신인 예수를 보내 그들로 하여금 그를 따라 하도록 하게 하심이었던 것이다. 이건 아기가 부모를 흉내 내고 따라 하며 커가는 방식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멘토를 찾고 그 멘토를 따라서 삶을 바꿔가며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이 다시 인간과 연결되고 하나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마음에서 우러나고 정신이 정화되어 말과 행동이 바뀌는 아주 이상적인 변화를 꿈꾸는가? 당신이 그런 이상적인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 당신은 현실에 몸담고 있다. 말과 행동을 먼저 바꾸고 지속하며 훈련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마음과 정신도 그와 같이 변해간다. 어렵고 힘들며 또한 어색하고 나답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이 되고 싶은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된 것처럼 가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된다. 위선과 가식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안하느니만 못하다. 진정성과 간절함으로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모두가 예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일 것임이 부인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분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순전한 기독교 " We are so accustomed to disguise ourselves to others, that in the end, we become disguised to ourselves."
- Francois de La Rochefoucauld -
글짓는 목수(Carpenwritre)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KtobPTEXd0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