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 ep6
“헉! 허억~”
또 하얀 바둑알과 눈이 마주쳤다. 어제 보단 덜 놀랬지만 또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 년은 왜 자꾸 내 눈앞에서 쓰러져 자는 걸까? 방이 무려 네 개나 딸린 최고급 호텔 객실에 꼭 굳이 내 침실 그것도 이 넓은 퀸 사이즈 침대 위 나의 눈앞에서 말이다.
오늘은 시각적 충격과 함께 후각적 충격까지 선사한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도대체 간밤에 얼마나 마신 걸까. 다행히 카렉이 나의 부탁을 완수한 모양이다. 분명 간밤에 그녀를 데려오기 쉽지 않았으리라.
전날 밤 나는 카렉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어떻게든 웬웬을 호텔 방에 데려다 놓아 달라고. 적잖은 후사(厚謝: 후하게 사례하다)를 약속했다. 어젯밤 웬웬이 술에 취해 발버둥 치며 카렉에게 끌려오는 모습이 상상된다. 돈이 좋긴 좋다. 내가 원하는 물리적인 변화를 내가 아닌 다른 이의 힘을 이용해 할 수 있다는 것이.
커튼을 걷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발리의 새벽 바다를 바라봤다. 아직 여명이 없는 어둠 속 바다는 비바람과 함께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동공이 수축하며 가까운 곳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물 방울에 초점이 멈췄다. 멍하니 그 빗물 방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빗물이 눈물로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 (드라마 속으로) -----
마리는 혼자 울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붉어진 눈시울에 자신도 놀랐다. 방음 연습실의 조명빛 아래 반짝이는 플룻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눈물이 은빛의 플룻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눈물 방울이 은빛 구슬로 변했다. 은구슬이 플룻을 타고 또르르 굴러내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나 버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들었다. 낯선 환경에 홀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은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눈물에 시야가 가려지며 지나온 설움과 외로움의 시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리는 뛰어난 감각을 가진 소녀였다. 그리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부족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녀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큰 부모 덕분에 많은 체험 학습을 하면서 자랐다. 부모는 그녀의 감각적인 재능이 어떤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지를 항상 고심했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그녀에게 많은 시간과 돈과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녀는 방과 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과외활동은 모두 그녀의 재능을 찾기 위한 부모의 노력이자 탐색 과정이었다. 그녀는 학교가 파하면 매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과외와 학원을 돌아다녔다. 과학, 미술, 음악, 체육 등등 할 수 있는 건 다 시켜보았다.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우면 그중 뭐 하나는 걸리게 마련이다. 그중 그녀가 가장 뛰어난 소질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그녀가 도내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면서 부모는 그녀의 미래를 확정 지었다.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었다. 그렇게 마리는 국내에서 꽤나 명성 있는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보통 어중간하게 가진 부모들은 부와 성공에 대한 갈망이 크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부와 성공을 일궈내기 힘든 시기가 도래한다. 시작점이 틀어져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어지면 그 못 다 이룬 꿈을 자녀에게 투영하려 한다. 부모는 그렇게 자녀를 통해 대리만족이라는 꿈을 꾼다. 마리도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야 할 운명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 선택이 가져올 가슴 아픈 미래를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싫어! 가기 싫단 말이야!”
“그럼 어쩔 건데, 음악 그만둘 거야?”
“왜 내가 가야 하는 건데 왜~? 쟤네들이 날 괴롭힌 건데 왜 내가 나가야 하냐고?”
“그렇다고 애 얼굴을 그 지경을 만들면 어떡해!? 내가 못살아 정말! 한두 번도 아니고”
마리는 학교에서 외톨이였다. 그녀는 예술학교에서 남다른 플롯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입학한 첫해에 국내음악 콩쿠르 플룻 부문에서 심사자 전원에게 찬사를 받으며 우승을 거머쥐었고 다음 해에는 체코 프라하에서 개최한 음악 콩쿠르 플룻 부문에서 2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사실상 1위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관중들의 기립 박수와 찬사를 받았지만 개최국 출신의 여학생에게 간발의 점수 차이로 2위가 되었다. 모두가 개최국 어드벤티지가 적용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떠돌았다. 이후 부모와 학교 측에서는 마리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마리는 친구들의 인정은 받지 못한 듯 보였다. 뛰어난 음감을 가진 대가였을까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대인 감각은 부족했다. 물론 음악가가 음악에 심취하는 건 당연하지만 현실의 삶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그녀는 현실의 삶과 관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무관심은 뭇사람들의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그런 모습이 다른 이들에겐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학교 내 친구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항상 그녀의 플룻 독주의 들러리가 되어 반주를 넣어주는 신세로 전락한 친구들은 항상 그녀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가 홀로 방음 연습실에서 플룻을 연습하던 날이었다. 갑자기 연습실 조명이 꺼졌다. 친구들이 어둠을 틈타서 기습을 감행했다. 한 여학생이 물바가지 퍼부으며 방음실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습실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검은 물체를 향해 플룻을 휘둘렀고 쏟아지는 폭포수를 가르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플룻의 가장자리가 그 친구의 얼굴을 강타했다.
“끼아아~악!”
친구는 비명소리와 함께 얼굴을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놀란 다른 친구가 다시 불을 켰을 때 물벼락을 맞은 마리는 연습실 문 앞에 서 있는 그들을 향해 플롯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빛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얼굴을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 친구를 데리고 도망쳤다. 그 친구는 몇 시간에 걸친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 학교에선 ‘학폭위’가 열였고 그녀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주변에 알만한 예술고에 다 퍼져버렸다.
문제는 이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플룻을 휘둘러 같은 반 빌런 학생의 이빨을 날려버렸다. 또 한 번은 휘두르는 그녀의 곤봉질 아니 플롯질을 손목으로 막으려던 또 다른 빌런 학생이 손목뼈에 금이 간 적도 있었다. 그때 마리는 이 얇고 긴 관악기가 아주 좋은 호신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 덕에 그녀는 호신 무기를 자주 바꾸어야 했다. 아무리 내구성이 좋은 실버나 니켈 실버 재질의 플룻도 그녀의 강력한 곤봉질에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그녀의 부모는 부서진 악기비와 피해자 치료비 그리고 그녀의 과외비를 메꾸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다. 빚이 계속 쌓여갔다. 결국 마리의 아버지는 회사에 해외 오지로의 파견을 자청했다. 그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아프리카 오지로 가족 없이 홀로 떠나는 대가는 현재 그가 받는 연봉의 두 배였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은 때론 가족을 위해 떨어져 살아야 한다. 몇 달이 멀다 하고 부서지는 플룻 때문에 결국 마리는 가장 저가의 플라스틱 재질의 플룻을 쓸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건 그녀의 플룻 연주는 플룻의 재질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절대 음감은 재질에 따라 다른 호흡과 섬세한 손가락의 강약조절로 그 음악 본연의 음질과 음색을 찾아내었다. 그래서 그녀의 연주는 선생들의 감탄과 놀라움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마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예무가(藝武家)’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유인즉 예술에 무술을 접목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에 통달했다는 뜻에서 지어진 별명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긴 팔다리 때문에 꽤나 넓은 반경의 타격 거리를 가졌다. 그녀가 플룻을 휘두르기만 하면 악당들은 손을 쓸 틈도 없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그때마다 마리는 항상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표면적으로 봤을 때, 멀쩡한 모습의 피해자와는 달리 성한 곳이 없는 가해자 같은 피해자의 모습은 누가 봐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꿔놓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선제방어이며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결과는 실질적인 피해자에게 손을 들어주는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그 가해자 친구들은 모두 빵빵한 부모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피해가 눈에 보이는 신체적 피해자에게 당해낼 재간이 없다. 앞전에 몇 번의 작은 사고 때는 그녀의 부모가 학교 교장과 학부모들에게 무릎 꿇고 빌고 또 빌어서 퇴학만은 면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합의금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학교는 그녀에게 퇴학을 선고했다. 그리고 국내에 좀 이름 있는 예술학교 어디서도 그런 그녀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예술과 무술의 융합을 받아주는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리는 음악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현실의 보이는 세계를 살아가는 법에는 너무나도 젬병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깨닫게 되었지만 덕분에 보이는 세계를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현실 세계에는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 인간이 만든 세상에는 질서가 있다. 이건 우주의 질서와는 또 다른 것이다. 강제적이며 배우고 익히고 따라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익히는 것이다. 이것을 익히지 않으면 세상과 그것을 익힌 사람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미 이곳 한국이란 현실에서는 멀어질 데로 멀어져 버렸다.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또 다른 세상의 현실을 기대해 볼 수밖에...
“호주로 가!”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비용적인 문제와 연고가 없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호주에는 그녀의 엄마를 대신할 이모가 있었다. 그렇게 마리는 홀로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또 다른 현실을 찾아서… 그렇게 마리의 가족은 모두 뿔뿔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서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아프리카로, 어머니는 미취학 아동인 동생을 케어하기 위해 한국에, 마리는 호주로. 함께 하는 것이 가족이라 생각했는데 가족을 위해서 흩어져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너무도 아이러니했지만 그녀는 그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홀로 비행기의 창가에 앉아 멀어져 가는 한국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을 꺼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렇게 독하게 홀로 참고 삶을 견뎌내고 있었지만… 그건 그저 연약한 껍데기가 딱딱해지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속살을 파고드는 내면의 상처에는 한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문어가 조개를 감싸 안아서 서서히 조여가며 속살을 파먹고 사라지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 포근하고 따뜻한 포옹이 자신을 지켜주는 거라 믿었다. 그 따뜻함에 속아 껍질을 열고 속살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문어가 사라진 자리엔 빈 껍데기만 남았다.
이젠 상처받을 속살마저 없어져 버렸다. 텅 빈 가슴을 달래려 플룻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또다시 울었다. 엉엉 울기 싫어 그 울음소리를 플롯 소리로 대신했다.
♩ ♪ (샤콘느 g단조 Vitali – Chaconne) ♫ ♬ [음악과 함께...]
방음실에는 플룻이 소리 높여 울고 있었다.
그 플룻 소리는 한 남자의 꿈속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