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 ep8
“Karek, What is the meaning of your name?“(카렉, 너 이름은 무슨 뜻이야?)
“hahaha“(하하하)
“Why are you laughing suddenly?“(갑자기 왜 웃어?)
“Nothing, Actually some guy ask me that too yesterday” (아니 어제도 어떤 남자가 내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거든)
우리는 발리의 또 다른 관광지 우부드(Ubud)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발리는 바다도 멋있지만 내륙의 산속에도 볼 것들이 많다. 발리를 오면 우부드는 꼭 들려야 할 관광지이다.
사실 우부드 여행은 계획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웬웬은 우부드를 여행 코스에 넣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렉이 우부드와 발리 북부 지역에 볼거리와 액티비티가 많다는 추천에 내가 가자고 웬웬을 설득했다. 그녀는 발리의 해변에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더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지 우부드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It means the second.” (두 번째라는 뜻이야)
그녀는 6형제 중에 둘째였다. 그녀는 발리의 북부의 유명한 화산인 바투르 화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방언으로 첫째는 ‘부뚜’, 둘째는 ‘카렉’, 셋째는 ‘꼬망’, 넷째는 ‘끄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선 일반 명사가 고유 명사인 이름처럼 사용된다고 했다. 그 마을은 아이를 많이 낳아서 그냥 순서대로 이름을 부른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에는 동명이인(同名異人) 많다고 했다.
그들은 밖에서 자신 만의 다른 이름을 만들어 친구들 사이에서 그 이름을 부른다고 했다. 자신은 새라(Sarah)라는 본명 같은 이명(異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나중에 성인이 되고 마을을 떠나게 되면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본명처럼 되어버린다고 했다.
“But I usually introduce as Sarah to tourists.” (그런데 보통은 관광객들에게 ‘새라’라고 나를 소개해)
“Why did you tell us you are Karek?” (왜 우리한텐 카렉이라고 말한 거야?)
나는 왜 우리에겐 ‘카렉(Karek)’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는지 물었더니 공항에서 처음 우리를 만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본명을 얘기했다고 했다. 그녀는 한 번도 우리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자신과 또래인 나와 웬웬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마을 친구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보통 발리를 찾은 관광객들은 한 번 만나고 헤어질 운명이기에 굳이 본명까지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발리에 온 관광객들에게 보이는 새라의 모습은 한 가지뿐이다. 그녀 또한 ‘카렉’으로서의 삶을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고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사실 자신의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줄 일은 없다. 이건 내가 본명과 필명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본명으로서의 나의 삶은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필명만 떠도는 극작가이다. 본명으로서의 나의 삶은 또 다른 삶의 영역이다. 독자들은 그저 필명으로서의 나를 알 뿐이다. 그들은 내가 만든 작품을 통해서만 나의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필명(작품)과 본명(자신)은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분리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주어진 자신의 모습과 세상이 원하는 혹은 세상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분리시킨다. 무엇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이도 있고 그와 반대로 그것과 멀어지는 자도 있다. 그것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이도 드물다.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왜냐 세상에 오감을 자극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그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진정한 자신과 멀어져 간다. 세상의 욕망에 이끌려 다니며 자신을 찾지 못한다.
---- 플래시백 [과거 회상] -----
[하나님이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었느냐?]
- [창세기] 3:11 -
신도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고 신과 인간을 분리시켰다고 하더라. 그 분리의 원인은 인간의 타락이었다. 전 남자친구는 나에게 세상이 타락한 이유를 성경 속 구절을 읽어주며 알려주었다. 신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여자가 저질렀고 남자는 그 여자가 건넨 유혹의 과실을 함께 먹고 타락해 버렸다고 말했다.
“你就把我变成这个样子了”(네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什么?这都是我的错吗?”(뭐!? 그게 내 탓이라고?)
“是!如你早跟我结婚顺从现实过日子就不会有了这结果的”(그래! 네가 그때 일찌감치 나와 결혼해서 힘들지만 현실의 삶에 순종하며 살았다면 이렇게 까진 되지 않았을 거야)
“那我成为编剧就是你堕落的理由吗?”(그럼 내가 극작가가 된 게 네가 타락한 이유라는 거야?)
“你都不知道这几年我都么苦恼孤单"(넌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외로웠는지 모르잖아)
그는 나를 비난했다. 자신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간 이유를 나에게서 찾고 있었다. 성경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와 나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하와)처럼 서로를 헐뜯기 시작했다. 그는 왜 이제야 나와 함께 한 과거가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것일까. 나에게 그와의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이었지만 그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극작가가 되어 그에게 건네준 물질의 풍요가 그에게는 죽음의 과실이었단 말인가? 그렇게 본다면 그 죽음의 과실의 대부분은 그가 먹었다. 나는 극작가가 된 후 내 계좌에 들어온 돈이 총 얼마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가 얼마를 썼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가 내 곁을 떠나고 나서야 그가 나의 현실의 모든 것들을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극작가가 된 이후에도 나의 생활은 그 옛날 궁핍하던 시절과 별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입는 것 먹는 것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더 이상 생계비를 벌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글을 쓰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게 가장 행복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쓰지 않을뿐더러 돈을 쓰는데도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내가 극작가가 되고 내가 누린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시간보다 돈이 더 중요했다.
극작가가 등단 후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언제라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일하게 달라진 내 삶의 변화이자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빛나는 새벽 별 네가 어찌하여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여러 나라를 정복하던 네가 이제는 어찌하여 땅에 던져졌느냐?]
- [이사야서] 14:12 -
난 그와 헤어진 후 그가 항상 가르쳐주던 성경을 내가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와 이별 후 읽은 성경 속 내용은 너무 가슴에 와닿는 구절들이 많았다. 내 삶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성경은 책처럼 읽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읽는 거구나’
그전에 성경이 잘 읽히지 않았던 것은 분명 삶이 아직 덜 익었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예전에 예배당에 앉아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억지로 읽어 내려갈 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던 것들이 이제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극작가가 되기 전 그는 항상 마치 자신이 신의 천사인 것처럼 성경 구절들을 나에게 알려 주곤 했다. 난 정말 그가 천사라고 생각했다. 매일 서로의 일상을 얘기하고 나의 소설을 공유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매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웃음이 넘쳐났다. 맛있는 것을 먹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과 함께 먹어서 모든 것이 맛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의 고된 현실의 일과가 끝나면 둘만의 이상 세계에서 머물며 내일의 현실 세계를 견딜 힘을 얻었다.
[你在哪儿](어디야?)
[今天我在电视台摄影结束后正在去跟他们吃聚餐](오늘 방송국 스텝들이랑 촬영 끝나고 회식 가는 중… 늦을 듯)
[那你明天干吗呢?](내일은 뭐 해?)
[明天嘛。。 对了明天我有个出版社关于你小说开个会议,怎么了有什么事吗?] (내일은 출판사 사람이랑 네 소설 출판 관련 미팅 있어, 왜 무슨 일 있어?)
[没有。。] (아냐…)
극작가로 현실의 성공을 이루고 난 후 더 이상 나와 이상세계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어졌다. 그는 항상 모든 시간을 현실세계가 가져다주는 분주함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그 현실세계는 내가 그에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는 내가 건네준 내 명의의 통장과 신용카드를 자신의 날개와 바꾸어 버렸다. 나와 함께하던 천국의 이상세계를 떠나 현실의 지옥세계로 떨어졌다. 그렇게 나와 그 그리고 신의 삼위일체의 고리가 끊어졌다.
성경에도 타락한 천사가 세상에 떨어져 신이 만든 작품인 세상을 그들의 욕망으로 바꾸어가기 시작한다고 말하더라. 인간은 그것이 자유의지를 통해 발전과 번영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변해감이 번화하고 풍족하며 또한 편리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나는 재앙의 씨앗 또한 모두 인간의 자유의지가 만든 결과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만약 성경의 내용이 진리라면 이 재앙의 씨앗이 결실을 맺을 날이 올 것이다.
자유의지는 신이 준 것이지만 신과 분리되면서 그것은 욕망이라는 다른 단어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욕망을 먹고 발전해 가고 있다.
자유의지와 욕망은 같은 본질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자유의지가 타락하면 욕망이 된다. 욕망은 선한 것을 그릇된 방법으로 추구한다. 위선이다.
본디 악마는 없다. 천사가 타락해서 변한 것이다.
신의 곁을 떠난 타락한 천사인 것이다.
“好像天使下凡了吧。”(나는 네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것 같아)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는 나에게 천사였다. 하지만 그는 타락한 천사였다.
그 모든 게 위선이었다.
결국 나를 떠났고 신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