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 ep9
“Looks cute, isn’t it? This is my youngest daughter.”(귀엽지? 내 막내딸이야)
“Wow, it’s so adorable, How old is she?”(우아~ 너무 귀엽다. 몇 살?)
“Almost 1 year, this is my first daughter”(이제 곧 1년이야. 얘는 내 첫째 딸!)
“Wow~ she is all grown up, how old?”(와우~ 다 컸네 몇 살이야?)
“12 years old”(12살이야)
“Awesome!”(헐… 대박)
우리는 어느새 여행 가이드인 ‘카렉’과 친구처럼 친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녀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우리 또래였지만 이미 세 아이의 엄마였다. 첫째가 이미 초등학생이었다. 내년이면 중학교에 간단다. 충격이다. 그녀는 처음 우리를 만났을 때 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웬웬과 나는 오히려 너무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고 기른 그녀가 더 신기했다.
“Is there any photo for the second daughter?”(둘째 사진은 없어?)
“He’s was dead”(죽었어)
“Oh my god! Sorry.”(헉~ 미안…)
“It’s alright.”(괜찮아)
“How?”(근데 어떻게?)
The God took him away”(신이 데려갔어…)
“...”(….)
카렉은 핸드폰 속 둘째의 사진을 모두 지웠다고 했다. 있으면 보고 싶고 보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밭일을 위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화산이 폭발했다. 그때 둘째가 집에 홀로 남아 있었다. 이미 용암이 마을을 향해 빠르게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가지 못하게 그녀를 막았다. 그녀는 오열하며 그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는 그렇게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붉은 용암에 집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That’s why the youngest daughter is my blessing”(그래서 나에겐 셋째가 또 다른 축복이야)
카렉은 둘째 아이의 죽음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둘째의 죽음 이후 밖으로만 나돌던 남편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왔고 힘들던 가정의 형편이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가 들어섰다. 셋째가 생기기 전까지 그녀는 둘째를 떠나보낸 아픔과 죄책감에 매일 시달리며 살았다고 했다. 셋째가 태어나고 그녀는 조금씩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I wish you guys get hurry to get married and have baby”(너희들도 빨리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해야지)
“Please don't say that. 这也不是我们不想要的呀 ,这个世界都没有一个董事的男生啊”(너까지 이러기냐? 우린 뭐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겠니? 요즘 어디 남자 같은 남자가 있어야지 말이야)
“Getting married and having kids and making a family is the only way to make a decent man”(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가정을 만드는 게 제대로 된 남자를 만드는 길이야)
“hahaha”
웬웬은 카렉의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카렉의 말이 틀리다고 할 수 없었다. 남녀는 모두 사랑과 결혼을 위해 제대로 된 사람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제대로 된 사람은 없다. 모두가 불완전하며 결핍을 가지고 살아간다. 둘이 함께 하는 건 서로의 결핍을 이해하고 끌어안기 위함이지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함이 아님을 모르고 살아간다. 조금 더 제대로 되기 위해 서로의 결핍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배우는 것이 둘이 하나되는 과정이다.
“结婚就是恶事,不结婚就是这个世界的潮流”(결혼은 필요악이 되었지. 요즘은 결혼 안 하는 게 대세야)
“What is that mean?”(그게 무슨 말이야?)
“谈恋爱就够了干嘛结婚拘束对方自己找死呢”(연애만 하고 살면 되는데 굳이 왜 결혼을 해서 서로를 구속하고 스스로 고생의 길을 차초하는지 모르겠어)
“Peiyun, do you think really so?”(페이윈, 너도 그렇게 생각해?)
“Well… I don’t know yet”(글쎄…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무엇이 정상인지 헷갈린다. 자연법칙에 따르면 인간도 사춘기가 되면 생식이 가능하다. 아마 그 옛날 문명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는 분명 ‘카렉’처럼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고 순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화와 산업화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며 자연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원시화라는 다른 말로 바꾸어 놓았다.
중국도 이제 더 이상 인구가 늘어나지 않고 줄어드는 인구 소멸 국가로 접어들었다. 너무 많은 인구를 걱정해 산아제한(1 가구 1자녀)을 하던 때가 그리 오래지 않았는데 빠른 현대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이제는 아이를 낳는 것은 사치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새끼를 낳아 기르는 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지만 그런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바로 사회화였다. 그러나 이제 국가의 생각이 바뀌었다. 다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사회화라고 말을 바꾸었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인간이 인간을 생산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 사람들은 편리와 풍요를 얻었지만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은 이제 고착화되어 서로 멀어질 뿐 가까워질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자신이 후자에 속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생식 욕구로 인해 자녀에게 고통이 대물림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 생명의 탄생은 되돌릴 수 없다.
세상에 나오는 나의 자녀가 국가를 위한 세납자와 가진 자들의 부를 더 늘려주는 노동력이 될 뿐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면 과연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이 자녀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 없는 완전한 자연 상태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영속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위에 굴림하는 상태에서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은 더욱더 인위적임을 위한, 즉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자연법칙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기만 했지 자연을 위해 한 것은 별로 없다. 자연은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지만 자연에게 인간은 악일 뿐이다.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 발전 과정을 거친 나라의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를 경험하지만 그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과 정신의 빈곤을 느낀다. 그들은 이제 본능에 이끌려하는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점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져 간다. 인간은 스스로 소멸로 향해 간다. 어쩌면 이것이 자연정화의 길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줄면 자연은 되살아나니까.
“Who was that guy? “ (근데 그 남자는 누구니?)
“I was a trekking guide for Mt. Batur yesterday. Because I have no schedule yesterday as you know. I met a guy for trekking. That guy asked me like you“(어 아니. 내가 어제 너희들 하루 일정을 비워줘서 일일 바투르화산 일출 산행 트래킹 가이드를 했거든 거기서 한 한국 남자의 가이드를 했어, 그 남자도 너처럼 내 이름의 의미를 묻더라고)
나와 같은 질문을 한 그 남자가 궁금했다. 카렉은 어제 그 한국 남자와 함께 한 일출 산행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카렉은 그와 단 둘이 짙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헤드렌턴 불빛에 의지하며 산을 올랐다. 카렉은 그에게서 여태껏 만나온 관광객들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Do you believe in God?” (당신은 신을 믿어요?)
“Yes, I do.” (네 믿어요)
그는 자신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카렉도 물론 신을 믿는다. 대부분의 발리인들은 모든 곳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모든 생명과 사물에 신의 존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다신교이다. 발리에 사는 대부분이 힌두교를 믿는다. 이곳의 힌두교는 인도의 그것과는 또 다른 힌두교였다. 나는 그 다름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설명할 순 없지만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God is everywhere in everything”(신은 모든 곳에 모든 것 안에 있지)
“If so, the God in you too?” (그럼 너 안에도 있겠네)
“Yes, of course.” (물론이지)
“If so, you can be same like the God?” (그럼 넌 신처럼 될 수 있겠다)
“Well…” (음…)
카렉은 신이 어디에든 무엇에든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카렉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의 질문을 따라가다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질문에서 말문이 막혔다. 카렉은 이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얘기했다.
그들은 신께 기도하면서도 자신도 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신의 일부지만 신이 되기 힘든 존재. 카렉의 설명은 그런 거 같았다. 연결되어 있지만 분리된 존재이다. 그렇지만 완전히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과 인간의 관계 같아 보였다. 이건 마치 내가 창조한 작품이 나와 동일한가 아니면 나와 다른 존재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이건 ‘신이 창조한 세상이 신인가 아니면 더 이상 신이 아닌가’를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자신을 녹여내지만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가들이 그 작품을 만든 시점에 작품은 거기까지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작품은 계속 만들어진다. 그럼 과거 작품은 현재의 예술가를 완전히 대변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예술가는 시간 속에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보고 듣고 느낀 것들로 인해 다시 또 다른 생각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영감과 경험은 또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진다.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신이 나를 만들었다면 그 때 신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 [플래시백_ 과거 회상] ----
【起 初 , 神 创 造 天 地】
(맨 처음 신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 창세기 1:1 -
전 남자친구와 함께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기억이 난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첫 구절은 어느 신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뻔한 흔한 시작이었다. 난 그냥 따라 읽고 받아 적었다. 하지만 아무런 감흥은 없었다. 그냥 어느 판타지 소설을 읽듯이 세상의 시작을 따라 읽어내려갔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영어 공부를 위해 구입한 영어 성경에서 발견한 하늘은 하나가 아니었다. ‘heavens’ 분명 하늘에 ‘s’가 붙어 있었다. 나는 혹시 인쇄가 잘못된 것인가 싶어서 다른 영문 성경책에도 ‘하늘들’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땅은 하나인데 하늘은 여러 개였다.
“可为什么好几个天空呢?”(근데 왜 하늘은 여러 개야?)
“咦? 啥说呀”(뭐? 무슨 소리야?)
“英文圣经里有这么写着呀”(아니 영문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던데…)
“你又有老毛病发动了”(넌 너무 쓸데없는데 신경을 많이 써서 탈이야?)
전 남자 친구는 나의 호기심을 무시했다. 진리의 말에도 실수가 있을까 생각했다. 난 신은 하나의 세상만을 만들진 않았을 거란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 즈음 과학자들은 무궁한 우주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나의 상상의 우주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바로 ‘다중 우주 이론’이었다.
내가 썼던 세 편의 장편은 서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지만 분명 창조자인 나로 인해 세 가지의 이야기는 분명 연결되어 있었다. 그건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세편의 장편이 연결되는 각각의 지점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어쩌면 서로 다른 세계의 시공간을 이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 나의 세편의 장편을 모두 읽고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내 머릿속을 좀 더 많이 꿰뚫어 보는 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이다. 왜냐 나는 아직 두 편의 장편을 공개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나의 전 남자친구가 그 두 편을 봤다. 그리고 심지어 나는 그에게 그 세 편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려줬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마태복음] 11:15 -
그는 들을 귀가 없는 자였다. 말해줘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들었지만 모르고 그 이외에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신은 과연 얼마나 많은 하늘을 만든 것일까?
나는 이제 세 개의 하늘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