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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 Mar 15. 2021

파도는 순간이고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

파도리의 바다와 자갈으로부터

철썩, 치는 파도를 보면서 순간에 대해서 생각했거든. 

뭔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 결정적인 타이밍. 매 순간. 같은 것으로.

파도리의 파도는 어떤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의 이전과 이후를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메아리처럼 내가 외치는 말 다음에 그 말이 어떻게 퍼지는지, 사라지는지를 말이야.


조효에게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어. 

그게 여행이었다는 게 새로웠지.


부제 : 조효과 태안과 파도리와 안면도와 집과 환대에 대하여(1)


 우리 태안에서 만난 첫째날 진짜진짜 날이 좋았던 거 기억하지? 아니 너무 좋아서, 늦어서 허둥지둥 조급한 마음으로 가는 차 안 풍경도 너무 예뻤다. 하늘은 어떻게 그런 색일 수 있지 싶을 정도였고, 대중교통을 타고다니는 나, 뚜벅이인 내가 네 차를 타고 부우우웅 달려가는 건 내가 많이 겪어보지 않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6시 20분 즈음이었나? 바다로 뛰어갔을 때의 그 일몰은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태안에서 3일을 보내고 난 뒤에 쓰는 지금, '황홀하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내 눈으로 담아서 내 뇌에만 그려지는 이 풍경을 다른 사람들한테도 자랑하고 싶다. 전해주고 싶어.

 하늘 색은 하늘색, 핑크색, 노란색, 보라색으로 겹쳐지기도 하고 풀어지기도 해가 지는 순간순간 미묘하게 달라졌고. 해가 비추는 바다는 영롱했다. 빛깔이라는 단어는 이런 바다를 보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해가 비추는 빛이 바다가 울렁거리고 파도가 칠 때 부서지면서 정말 면면마다 다른 색으로 반짝였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런 걸 잘 표현한 작가가 있다면 얼른 글을 빌려오고 싶다. 디깅도 하고 나도 내 머릿속 이 풍경을 어떻게 쓸지 다시 한번 고민해볼게.

 하 어떻게 바다 색이 그렇지? 하늘 색은 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사람 손에서 나온 멋지고 힙한 디자인들도 자연에 비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내 눈은 빛깔, 빛과 깔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귀는 또 어땠니. 시각적으로 환상적이었으니 나는 그 풍경을 그냥 바라보기만 했어. 가만히 있으니까 그제야 들려오는 소리가 있더라. 파도는 철썩, 치잖아. 펑, 치고 스스스스스. 모래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는데 이곳은 파도가 그렇게 치지 않았다. 파도리는 아주 작은 자갈들이 깔려있어서, 파도가 치고 나면 자갈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자갈자갈자갈 하고 빠져나갔어.

 강릉의 파도가 '쳤다'면 태안의 바다는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모양이었어. 한 순간 치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파도가 부서지면, 바다의 일부인 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걸,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한테 알려줬어. 나는 강릉에서 철썩, 치는 파도를 보면서 순간에 대해서 생각했거든. 뭔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 결정적인 타이밍. 매 순간. 같은 것으로.

 하지만 파도리의 파도는 어떤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의 이전과 이후를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메아리처럼 내가 외치는 말 다음에 그 말이 어떻게 퍼지는지, 사라지는지를 말이야. 파도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소리로 자갈들 사이를 빠져나갔어. 들어오면 빠져나간다는, 빠져나가는데에도 각자의 속도와 시간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또 들려주었네. 

 나는 파도를 보고 들으면서 또 한 순간의 결정적인 장면만으로 파도를 생각했던 내가 파도가 치는 장면 이후에는 그 물들이 또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내가 분절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이 파도가 들어왔다 나가는 소리가, 자갈자갈자갈이 너무 귀엽고 아름다워서. 그냥 들었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일은 진행 중이고, 정신은 종종 나가고, 해내야 할 과업들은 나를 무겁게 만드는데 파도리의 파도를 생각하면 가만-해진다. 가만히, 그 그냥 먼 바다를 보고 수평선을 한번 눈으로 따라 보고 수평선에서부터 펼쳐진 바다를,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서 내 발치 앞으로 시선을 거둬온다. 울렁울렁울렁 거리는 파동에서 차근차근 하나씩 레이스처럼 피어오르는 파도. 그리고 왔다가 가는 파도의 뒷모습에서 자갈자갈자갈,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치는 것 만으로 끝나지 않고 또 어떻게 이어지고 연결되고, 돌아가는지를 들려주는 소리까지.

 나는 이 흐름을 생각하면 평화로워져. 저 먼 것, 큰 것, 거대한 것을 두고 내 발치, 앞의 작은 레이스 파도와 자갈들 사이의 소리를 듣는 나를 떠올려. 그래 나는 여기에 있고 또 파도는 오고 가고. 언제든지 이 파도를 내 마음속에 불러올 수 있다면 나는 평안할 수 있겠다고. 나는 언제든지 나만의 섬을, 나만의 안위를, 나만의 안온함을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해. 숨을 쉬어본다. 여전히 명상이라는 걸 모르지만 말이야. 나는 이런 순간이 잠시 지금을 사는, 그 어떤 생각의 폭포수안에 들어가지 않고 나를 위해서 시선을 옮기는 순간 같아. 

 이번 여행에는 목적과 컨셉이 없었으므로. 그냥 너를 보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나는 너무 큰 보너스로, 파도리의 일몰과 파도, 자갈과 빠져나감의 소리를 선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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