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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맨 Aug 03. 2019

아귀찜을 혼자 먹다

쓸데없는 배려를 놓으며 센티해진 식사 한 끼

그다지 크지 않은, 약간은 허름하던, 고만고만한 식당이 다닥다닥 자리 잡은 언덕. 그중의 한 식당. 콩나물이 많았고 매웠지만 너무 맛있었던 찜요리. 식당을 나와서 보이던 커다란 녹색의 후지필름 전광판 간판.


네. 80년대, 기억도 어렴풋한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을 따라갔던 신사동 아귀찜 골목의 기억입니다.

어렸을 때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던가요? 그래서 그런지 저의 최애 음식 중의 하나가 아귀찜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습니다. 퇴근 후 왠지 혼자 저녁 시간을 보내고 싶은 기분에, 아직 해가 많이 남은, 무더운 여름 저녁거리를 혼자 낭만(보다 정확히는 궁상)을 느끼며 걷고 있었습니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며 걷는 동안 많은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치찌개, 순댓국, 돈가스, 냉면,... 소주 한잔 반주를 하기에 적합한 저녁 메뉴를 생각하다가 부대찌개 간판이 눈에 띄었네요. 

그런데... 휴가 중. 음... 딱이었는데... 싶은 순간! "아귀찜"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귀찜, 아 정말 먹고 싶은데... 보통 아귀찜은 여럿이 먹는 음식 아니었던가요. 양도 양이고 가격도 가격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번 저한테 쐈습니다. 그래.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귀찜 혼자 맘껏 즐겨보는 거야.


식당에 들어섭니다. 몇 분이세요...? 1명 이요... 탕 드실 거죠? (식당에서 대구탕과 아귀찜을 함께 하고 있었거든요. 자리 배치 때문에 여쭤보신 듯) 아니요. 아귀찜 1인분 되나요?... 당연히 안되죠(약간 당황하며)... 아귀찜 '소'짜리 하고 소주 하나 주세요. 아 네...


먼저 여러 반찬들과 미역국을 내어주십니다. 소주 한 병과 함께... 출출하던 차에 소주 한잔은 완샷... 아 좋습니다. 한여름이지만 뜨끈한 미역국을 안주로 한술 뜨니 시원~하기 이를 데 없네요. 어느덧 소주 몇 잔과 미역국을 먼저 비우니... 멀리서 지켜보시던 이모님. 혼자 와서 아귀찜 먹는 게 흔한 광경이 아닐진댄 왠지 안되어 보이셨나 봅니다. 다가오시더니, 미역국 한 그릇 더 드릴까? 아 네 감사합니다...


곧 기대하던 아귀찜 한 접시가 나왔습니다.


집게로 콩나물을 앞접시에 덜어와서... 소주 한잔과 함께 시작합니다. 캬아~...


가만. 덜면서 먹다 보니... 내가 왜 덜어야 돼? 나 혼자 먹는데... 그래서 그냥 젓가락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뭐라 그럴 거야. 흥.

아구를 집게와 가위로 잘게 썰어 놓습니다. 습관적으로... 가만. 잘게 자르다 보니 또 내가 왜 이래야 돼? 나 혼자 먹는데... 그래서 그냥 큼지막하게 놔두었습니다. 


대부분이 그러시겠지만... 전 주로 콩나물을 먹었습니다. 아구는 양도 적지만 살도 얼마 안 나오니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좀 강한 편이었습니다. INFP의 성향을 가진 저는 여럿이 먹는 음식 중에 하나가 남으면 차마 제가 다 가져오지 못하고 꼭 반을 자릅니다. 다음에 그 반을 또 자르고... 다음에 그 반의 반을 또 자르다가 제 친구로부터 "그냥 다 먹어!"라는 호통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니 아귀찜은 어떻겠습니까. 살 부분은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를 하거나, 하나를 다 가져다 먹지 못하고 잘라서 약간만 가져오는 행태를 보입니다... 뭔 주변 사람에 대한 쓸데없는 배려인지... 인생을 살다 보니 그렇게 딴에 배려를 해도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별로 고마워하거나 기억 조차 하지 않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예외입니다. 제가 온전히 아귀찜에 있는 모든 살을 다 먹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필요 없습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한 끼가 되네요. 


한때 아구는 별로 먹을 것도 없고 맛도 없어서 잡자마자 다시 물에 던져버렸다고 '물텀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귀찜을 딴에는 '만끽'하며 먹었지만... 어째 그동안의 제 삶을 돌아보니 '물텀벙'같은 삶을 산 것 같기도 하고... 소주 한 병과 아귀찜 한 접시를 거의 비워가니(대식가입니다) 세상 센티해지는군요. 

'물텀벙'이 아귀찜으로 변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듯이, 남은 시간 동안 내 삶도 변할 수 있을까... 한여름날 채 해가 지지 않은 저녁, 막 잔을 비웁니다.


By Do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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