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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미 Oct 26. 2020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에 대한 단상


1995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전국의 상고에서 전교 1, 2등씩 했던 고졸 신입사원들이 대기업 말단 직원으로 일하면서 기업의 내부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생산관리3부 자영(고아성)은 보고서면 보고서 청소면 청소 뭐든 완벽하게 해내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인물이다. 삼진그룹의 8년차 말단 사원인 그에게는 친한 동기 둘이 있는데, 인문학적 지식에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신문과 탐정소설을 열심히 읽는 마케팅팀 유나(이솜)와 수학올림피아드 출신으로 회계장부를 귀신같이 정리하는 회계부 보람(박혜수)이다.


고졸 출신으로서 회사가 지정해준 자주색 유니폼을 입고 자잘한 업무만 맡던 이들은, 토익 600점만 넘으면 대졸 신입사원과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주요한 업무를 맡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아침 일찍 회사 차원에서 여는 토익 수업을 듣고 출근한 뒤, 귀신같이 잡무를 하던 세 주인공은 우연히 회사의 비리를 알게 되는데, 생산관리3부 자영이 자사의 공장 중 하나인 옥주 공장에 들렀다가 독극물인 페놀을 무단으로 방류하는 모습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자영은 회사에 이를 보고하지만, 회사는 투명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증거 조작, 합의금 지급을 통한 입막음으로 대처한다. 대기업에서 가장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이들은 페놀 방류 사건을 사회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유나는 인문학적 지식을 동원해 언론사에 제보하고, 보람은 수학 실력을 발휘해서 방류의 근거를 뒷받침한다.


대처는 재임 기간에 대내외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에서 매번 핸드백을 팔에 걸고 등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상이 탁자 위에 '탁'하고 핸드백을 올려놓으면 회의에 참석했던 고위급 각료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녀의 핸드백은 정적과 무능한 각료들에게 대항하는 무기라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핸드백하다'라는 동사를 등재하여 '여성 정치가가 타인이나 아이디어를 공세적으로 대하다'라는 정의를 제공하게 된다.

-메리 비어드, 「여성, 전적으로 권력에 관한」, 104쪽

여성의 쿨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남성이 도맡는 일을 여성이 해내는 것일까. 주류의 남성 사회에 끼기 위해 관행을 잘 받아들이고 혹은, 남성보다 더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메리 비어드는 그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들은 여성의 나약함으로 간주되는 상징을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모시키는 능력이 있다고.(대처의 보수 정책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대처의 핸드백’ 같은 영화다. 실제로 벌어졌던 페놀 방류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성실한 시대 재현 정도로 납작하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대처의 핸드백’과 같은 스펙트럼에서 살펴봐야 한다. 영화가 주인공으로 삼는 세 사람은 여상 출신 말단 사원이다. 삼진그룹에서 가장 ‘약한 고리’에 해당하며 세 사람 모두 여성이다. 이들의 양심과 일에 대한 열정, 심지어 옷차림까지 모두 여성이기 때문에 기민하고 섬세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또 사내의 기존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들과 여러모로 대비를 이루며 빛난다. 상고 출신에 여성이란 이전 기준에서 단점인 모든 면이 오히려 이들의 쿨한 지점, 멋진 지점으로 전치되면서 영화가 쌓아나가는 승리의 서사에 더욱 쾌감을 실어준다. 요컨대 대처의 핸드백처럼, 여성만의 독립된 문화와 영토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이 영화가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게 아닐까.


덧1. 이종필 감독이 전작 <도리화가>의 실패를 딛고 정말 능수능란한 영화를 만들어냈더라구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9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여상 출신 말단 사원들의 내부 비리를 이야기하지만, 영화 전체의 톤은 정말 산뜻합니다.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여럿 있는데요. 특히 이종필 감독이 정말 유쾌하게 연출했다고 생각한 장면은 자영이 사과밭에서 페놀에 노출된 옥주 주민을 만나는 씬인데요. 큰 눈을 동그랗게 뜬 고아성 배우의 걱정 어린 표정과 함께 예스러운 통기타 연주곡이 들리다가 느닷없이 흐름을 끊고 연주가 끊어지는데요. 배경에 맞는 논디제시스 음악(배경음악)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통기타를 연주하는 주민의 연주였고, 디제시스 음악이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공포 영화의 대가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이 공포스런 상황 속에서 논디제시스, 디제시스를 오가면서 기묘한 단절과 묘한 웃음을 만들어내듯, 이종필 감독의 연출도 엉뚱하고 유쾌해서 웃음이 터졌었네요.


덧2. 요즘 출퇴근길에, 기사를 마감하면서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배우들이(일명 '삼토반즈') 부른 노래를 듣는데요. 배우 고아성, 이솜, 박혜수가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등장해서 김현철의 ‘왜 그래’를 부른 영상을 연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음성, 분위기, 기세가 모두 달라서 이들이 부른 '왜 그래'를 듣고 있으면 덩달아 씩씩해지고 신납니다. 이미 보셨을 수도 있지만, 안 보신 분들이 있을까봐 살포시 링크를 남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_N8q-9mh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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