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땐 몰랐다. 828일이나 걸릴 줄은..
쳇바퀴
수수료를 제외한 인력소 하루 일당은 하루 9만 원, 어려운 작업을 한 날은 10~14만 원이었고 최고로 많이 받아본 건 연장근무까지 18만 원이었다. 열흘만 일해도 90~100만 원이 생기는 꼴이니 18살이었던 나에겐 남부럽지 않은 직업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인력소에 줄줄이 모여가서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받고 녹초가 된 채로 집에 들어오면 발에 물집은 왜 이리 잘 잡혀있고 허리는 왜 이리 쑤신 지, 목은 왜 이리 따가운 건지 참 하루가 길었다. 그래도 서랍 한구석에 일당을 차곡차곡 쌓는 재미가 있었고 포개진 현금다발의 두께가 날이 갈수록 두꺼워짐에 위안을 삼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매일 밤 잠에 들기 전, 서랍 속 돈다발을 보며 '잘하고 있는 거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빠져들어서 몇 시간 사경을 헤매면 노동의 고됨이 조금이나마 씻겨 내려갔고, 잠시 후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됐다.
전국일주 계획 세우기
인력소 퇴근을 한 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전국 모든 시와 군을 방문할 수 있는 주행 계획을 세웠다. 우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이라는 리스트를 웹에서 다운로드했고, 네이버에 'OO시/군 가볼만한 곳' 키워드로 전국 모든 지역들을 검색해서 리스트를 보완했다. 구글에서도 자투리 정보들을 많이 얻어서 리스트를 계속 수정하고 확장해나갔다. 그렇게 약 3천 곳의 명소들이 추려졌다. 그 뒤엔 route editor라는 루트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3천 곳의 명소들을 GPS 프로그램상에 경유지로 도식했다. 이제 3천 곳의 경유지들이 빨간 포인트로 프로그램상에 띄워졌다. 남은 작업은 그 경유지들을 어떤 경로로 경유할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프로그램이 알아서 해주면 참 좋으려만, 자동모드를 사용해도 딱 내 맘에 들도록 설정되진 않았다. 그래서 여러 지도들을 비교하면서 도로의 상태를 확인했고, 도로가 간선도로인지 이면도로인지 자동차 전용도로인지 구분하고 언덕의 경사나 코스의 난이도를 고려해서 최적의 루트를 선택했다. 중간중간 섬에 가는 일정이 있을 땐 '가보고 싶은 섬' 페이지에서 배편 정보를 얻고 출항 가능 항구를 찾아서 표시했다. 파일이 워낙 커지다 보니 일정 키로수 이상부턴 제작 프로그램에서 렉이 걸렸다. 그래서 제작 파일에 렉이 걸릴 때가 되면 거기까지만 만들고 새로운 파일을 새롭게 시작해서 이어갔다. 결국 파일은 여러 개로 쪼개어졌고, 이 파일들은 gpx viewer라는 어플로 연동하여 구동할 수 있는 파일이기에 자전거 휴대폰 거치대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내비게이션 파일을 띄우면 마치 자동차 내비게이션 경로를 보는 것과 동일하게 내가 설정한 경로로 손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결국 두 달 정도의 기간이 걸린 끝에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전국을 갈 수 있는 나침반이 완성된 것이었다.
파일 1. 3286.46km 파일 2. 1373.17km 파일 3. 1497.91km 파일 4. 675.59km
파일 5. 1659.33km 파일 6. 691.83km 파일 7. 1583.22km 파일 8. 1236.64km
파일 9. 707.46km 파일 10. 1482.83km 파일 11. 1124.33km 파일 12. 1514.76km
파일 13. 1124.95km 파일 14. 1195.66km 파일 15. 1260.35km 파일 16. 1389.88km
파일 17. 1531.91km
치명적인 실수를 한 가지 했다면, 배로 이동하는 거리까지 포함하여 총거리가 23336km나 되는데 이 거리를 400일 만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단 점이었다. 400일 만에 23336km를 거리를 주파한다는 것은 사람들도 만나고 명소도 탐방하고 밥도 먹고 일도 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60km씩을 달려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이는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자전거 여행에 맞지 않는 계산법이자 나의 치명적인 실수였고, 잘못 꿴 첫 단추였다.
후원 촉진제
여행 중간중간 사람들에게 나눠줄 명함과 후원해준 사람들에게 리워드로 전해줄 깃발과 팔찌를 제작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도 오픈했다. 슬로건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Let us change the world'라는 슬로건을 만들었고, 이미지 파일을 제작했다. 이 준비과정을 페이스북에 업로드했는데 흥미를 느낀 한 페이스북 친구분이 이 슬로건으로 본인 차량 랩핑을 해서 돌아다니며 광고를 해주셨다.(해창이형 감사합니다.)
응원의 메시지
페이스북 페이지와 개인 계정으로 온 응원의 메시지들이다. 여행 계획을 하나 둘 올리기 시작하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응원해준 분들 중 몇 분은 택배로 여행 아이템을 보내주셨다. 양말, 수저, 깔창, 먹거리, 모기기피제 등... 물건도 물건이지만 누군가 날 응원해준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다. 어떤 분은 기프티콘을 보내주기도 하셨다.(하상욱 님, 박대교 님, 김민웅 님 등 많은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때부터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계획한 건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신감이 슬슬 붙기 시작했다.
여행 준비물
인력소를 다니면서 자금을 비축하다가, 여행 출발일이 가까워왔을 무렵에 그동안 생각하고 찜해놓은 장비들을 일괄 구매했다. 100만 원 초반대의 사이클 자전거와 리어/프론 트랙과 패니어, sealline 115L 방수가방, 버물린이나 소독제 같은 여러 여행 필수품들, 정비용품들, 자전거 신발과 의류, 액션캠 등 쿨하게 모두 구매했다. 200만 원 정도가 나왔지만 사전에 계획한 소비였기에 크게 후회하진 않았다. 그저 내가 벌어서 만들어낸 것이란 생각에 흐뭇했다. 일괄구매를 하니 한동안 집에 택배 기사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찾아오셔서 택배를 전달해주셨다. 매일 택배를 뜯고 세팅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숨이 멎을 뻔했다.
400만 원 공중분해 사건
우체국에서 이용할 수 있는 전자우편 서비스는 편지 내용을 한글파일로, 주소 파일을 엑셀로 정리해서 우체국에 주면 우체국이 내용 인쇄부터 봉투에 넣는 작업, 우표 작업까지 해서 발송해주는 서비스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전자우편 서비스를 통해 전국에 있는 1만 곳의 교회에 후원 요청 편지를 보냈는데, 이러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니 후원으로 참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전자우편 서비스의 단가는 편지 한 통에 400원이고, 1만 곳이니 총 400만 원이라는 거금이 소요되었다. 한 교회에서 1만 원씩만 도와줘도 1억이라는 기금이 조성되기 때문에 400만 원쯤이야 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후원금이 적게 들어와도 학교를 적어도 수십 개 지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법적으로 20% 정도의 금액을 합법적으로 후원금 관리나 진행 경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후원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법적 테두리 안에서 여행을 부족함이나 차질 없이 다녀오려고 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400만 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18세 소년의 야심 찬 계획이 0%의 달성률을 기록하면서 탐욕의 바벨탑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단 하나의 답장도 받지 못하고 10원의 후원도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30%의 편지들은 수취인들이 이사를 했거나 주소가 불분명하여 줄줄이 집으로 반송됐다. 반송량이 너무 많다 보니 우체국 직원이 전화해서 반송된 편지가 많으니 배달 전에 폐기를 원한다면 폐기해주겠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결국 대부분의 편지들은 집으로 반송되기 전에 폐기됐다. 출발 하루 전 날이 되었음에도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고, 단 한 푼의 후원도 없었다. 그렇게 여행 출발 직전에 400만 원이 공중분해됐다. 심지어 그 400만 원은 모두 나의 돈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던 돈에 아빠에게 빌린 200을 더한 것이었는데 그게 공중분해된 것이었다. 나중에 목회를 하셨던 지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런 편지는 어떤 교회던 수시로 받기 때문에 대게 교회 행정실 선에서 폐기 처분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브로~ 그걸로 후원을 받았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그 사람들이 널 뭘 믿고 후원을 하겠어."
그 형님의 말이 정확히 맞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그래도 경험해봤으니 값진 경험인 거지!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너무 안쓰러워서 한 번 안아주고 싶을 정도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도시락을 싸서 다니면서라도 뜯어말리고 싶다. 짱구는 못 말렸어도 이건 말렸어야 했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모든 걸 잃어버렸다.
여행 출발
때는 바야흐로 2015년 7월 27일, 여행 출발 당일이었다. 몇 달이 얼마나 짧은지 벌써 400일 여행의 출발일이었다. 날씨는 폭염이어서 아침부터 스트레스 지수가 팍팍 올라갔다. 옷이고 자전거고 빛깔 좋게 여행 준비는 다했는데 400만 원 공중분해 사건 덕에 자본이 땡전 한 푼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내뱉은 말을 무르기가 싫다며 '고'를 선택했다. 수중에 한 푼도, 쥐뿔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부모님과 함께 4층에서 엘리베이터로 자전거와 패니어를 1층으로 내렸다. 짐은 많은데 엘리베이터가 비좁아서 두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다. 가방의 개수만 9개, 빈 가방들의 무게만 해도 10kg였고 그 안에 들어있는 짐의 무게까지 더하면 50kg에 육박했다. 내 몸무게가 60kg였으니 얼추 사람 몸무게만 한 걸 옮긴 것이었다. 내려와서 낑낑거리면서 리어랙과 프론트랙에 패니어를 설치하고, 자전거 프레임을 두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공용주차장에 구석에 섰다. 그리고는 마치 전쟁에 참전하기라도 하는 듯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잘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라 아들아."
그때 부모님이 10만 원의 용돈을 손에 꼭 쥐어주셨다. 자산이 0원에서 10만 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페달을 밟으려고 하는 순간, 외갓집에 잠시 들리라는 외할아버지의 전화를 받게 됐다. 외갓집과 우리 집의 거리가 상당히 가깝기도 하고, 어차피 가는 길목에 외갓집에 있기 때문에 들리기로 했다. 외갓집에 가니 외할아버지는 며칠을 다녀올 거냐고 물으셨다. 400일쯤 다녀올 거라 말씀드리니 왜 이렇게 오랫동안 밖에 있으려고 하냐며 호통을 치셨다. 난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내가 그렇게 꿈꾸던 거다', '이걸로 학교를 지을 거다' 라며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드렸지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무작정 한 달 안에 돌아오라고 버럭 화를 내셨다. 한소리를 거하게 들으니 기분이 상했고, 이제 그만 가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멋쩍은 인사를 드리고 출발하려고 했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뒤따라 나오셔 선 14만 원을 손에 꼭 쥐어주셨다. 10만 원도 아니고 15만 원도 아닌 애매한 금액이라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니 닭장사를 하시는 외할아버지 지갑에 있던 모든 돈을 털어서 주신 것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빈털터리였던 나의 수중엔 30만 원 정도가 생겼다.
천리길의 한걸음
여행을 처음 기획할 때부터 고향의 명소들을 먼저 둘러보고 출발하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동굴엑스포, 장미공원, 번개시장, 맹방해변 등의 삼척 명소들을 여행 핑계로 다시 둘러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인구 7만의 삼척은 역시 조용하고 예뻤다. 그 뒤로 성대결절을 유도하는 명곡 중 하나인 Tears를 틀어놓고 미친 듯이 따라 부르고, 친구여를 틀어놓고 비트에 맞추어 페달을 밟았다.
"이 예아~ 하리수 트랙 오브 더 예 유노 왓 타임 이즈 롸잇나우 롸잇 히어 요 크즈암 백 어겐!"
짐이 밤새 새끼를 친 건지 자전거가 심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50kg의 짐을 달고 다니니 핏줄이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튀어나왔고 호흡도 딸렸다. 특히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은 체력을 깎다 못해 영혼까지 갉아먹었다. 무더운 여름 햇살을 직격으로 맞으며 맥반석 위 오징어처럼 몸을 비틀었다. 땀샘은 마치 저수지의 수문이 개방되듯이 활짝 열렸다.
'땀샘들아.. 지금은 아니야..'
쭈욱 달리다가 시골길 도로에 멈춰 섰다. 더 이상 이대로는 갈 수가 없었다. 너무 덥고, 오랜 시간 동안 먹지 못해서 힘이 들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밥을 먹게 됐다. 취사도구를 꺼내고, 끓는 물에 햇반과 미트볼을 넣어서 익히고 슥슥 비벼먹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날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갔고, 지나가시던 마을 할머니가 여기서 뭐 하는 거냐며 야단을 치셨다.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지만 애써 능글맞은 척 전국일주 중인데 배가 너무 고프고 먹을만한 장소가 없어서 그랬다고, 이것만 빨리 먹고 쓰레기 잘 치우고 가겠다고 말씀드리니 구시렁거리시면서 가셨다. 얼마나 민망하던지. 알고 보니 그곳은 사람의 왕래가 꽤 있는 도로 한복판이었다.
잠깐의 여유
삼척 해양 레일바이크가 지나다니는 게 보이는 원평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아까 정비하면서 기운 다 뺀 것도 있고, 첫날이라 긴장한 탓에 힘이 풀린 것도 있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재출발하기로 하고는 나무에 해먹을 설치했다. 해먹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는데 레일바이크를 타고 헛둘헛둘 거리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빠이팅!! 같은 말을 한마디씩 하고 가서 계속해서 잠에서 깼다. 위치 선정도 참.. 하필이면 거기다가 해먹을 친 내가 잘못이었다. 잠에서 덜 깬 나를 사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진을 찍히니 기분이 나빠서 얼른 자리를 정리했다.
후원자의 이름으로 사진 촬영
조금 더 가서는 후원자분의 성함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런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어서 굉장히 쑥스러웠다. 타이머를 맞춰놓고 후다닥 뛰어가서 한동안 멈춰있는 채로 사진을 찍었는데 자전거 앞에서 남자 한 명이 종이를 들고 서있으니 어떤 차량은 내 옆으로 지나갈 때 속도를 낮춰서 창문을 열고 뭘 하고 있나 쳐다보고 가기도 했다. 원래 논두렁이 아닌 멋진 관광명소에서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사람들에게 첫날에 뭐라도 찍어서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논두렁에서 급박하게 촬영했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서 후원자에게 전송했고 SNS에 게시했다. 정성 덕인지 초반 버프 덕인지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달팽이, 집을 짓다
50kg 무게에 적응을 못해서 고작 3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장호까지밖에 이동하지 못했다. 해변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질 무렵이었다. 해 지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일몰 구경을 했다. 지금이면 원래 퇴근을 했을 시간인데 인력소가 아닌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참 여행을 잘 떠나왔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장호. 항구 안쪽 끝으로 들어가니 주차장이 있었는데 자리가 없나 한참을 찾았다. 다행히 구석 쪽에 한 자리가 남아있어서 설마 이 시간에 오는 사람은 없겠지 하면서 타프를 쳤다. 타프 치기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타프의 사이즈가 너무나도 컸고, 타프 치는 방법조차도 숙지하지 못한 상태여서 결국엔 내 마음대로 타프를 설치했다. 그 결과 타프의 천이 팽팽하게 펴지지도 못했고, 바람이 불면 타프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였다.
모기를 막기 위해 침낭처럼 뒤집어쓰는 버그 넷이라는 장비는 피부에 그대로 달라붙어서 모기가 언제든지 피를 쪽쪽 빨아먹게 피부를 노출했다. 그리고 모기가 계속해서 달려들어 무는 바람에 에프킬라를 10분 간격으로 칙칙 거리며 뒤척여야 했다. 지금껏 정말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여행지에 와보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모기 방지라던지, 우천 대비라던지.. 지금까지 여행 준비를 수박 겉핥기로만 했었단 걸 깨닫게 됐다. 앞으로 어마어마하게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 찾아올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부부를 만나다.
잠자리에서 5미터쯤 떨어진 곳엔 버스가 한 대 서 있었고, 버스 앞에서 한 부부가 테이블을 설치해놓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자전거 여행 중이세요?"
그 부부는 타프가 이상하게 쳐져있는 내 자리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엔 타프 하나도 못 치고 모기에게 뜯기도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괜찮다고, 밥을 먹고 왔다고 했지만 부부는 끈덕지게 어떤 경험을 했는지 들어보고 싶다며 밥을 먹자고 해서 끝내 콜을 외치며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마치 어디론가 피난 온 사람처럼 음식을 흡입했다. 배가 조금 차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구나..'.
말주변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그제야 떠듬떠듬한 말로 운을 뗐다.
"그러니까.. 음.. 제가 어떻게 여행을 떠나게 된 거냐면요.."
술잔은 기울었고, 밤은 깊어져 갔다.
하루 일과
매일 아침, 근처 할인마트에서 생수 2리터를 구입했다. 물은 씻을 때, 마실 때, 요리를 할 때 모두 사용되기 때문에 자전거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물을 선택하고 나선 하루 동안 먹을 식량으로 스위트콘이나 핫바, 에너지바, 구운 계란, 다이제, 껌 따위의 주전부리를 구입했다.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로 끼니를 해결했던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혼자 식당에 들어가는 것도 민망했고 식당에 가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의 시간과 식비를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유가 되었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400만 원 사건 이후로 빈털터리라서 아껴야겠다는 결심을 했기에 그랬다. 아마 누군가와 같이 갔다면 백 프로 동료를 힘들게 하고 욕 얻어먹었을 짓이었을 테지만 혼자라서 정말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주전부리와 물까지 구입을 한 이후엔 저녁노을이 보일 때까지 자전거 투어를 했다. 관광지가 있으면 들리고, 멋진 풍경이 나오면 사진을 찍었다. 바다가 보이면 물에 풍덩 빠져서 수영을 하고,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아이스크림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기분 좋아했다. 어떤 날엔 SNS로 댓글을 주고받던 팔로워 분들과 만나기도 했다. 주로 만나면 식사를 했고, 에티오피아에 학교 짓고 싶다는 꿈을 다들 알고 계셨기에 다들 미리 준비해놓으신 후원금을 주셨다. 그걸 받아서 통장에 넣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후원자분의 성함과 후원금액을 기재해놓고 여행을 다니다가 예쁜 곳이 보이면 노트에 'ㅇㅇㅇ님 후원 감사합니다!' 문구를 적어서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렸다. 자전거만 하루 종일 타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은 정말 하루 종일 멍한 상태로 자전거만 타며 하루를 보냈다.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도 없이, 귀에 이어폰을 끼워 넣고 노래만 들으면서 앞만 보고 달렸다. 10분간 쉬지 않고 자전거를 타기는 정말 힘든데, 하루 10시간씩 타면 어느 순간부터 데드 포인트를 넘겨서 정신적으로 멍한 상태, 즉 러너스 하이 상태로 페달을 젓게 되면서 금세 저녁시간이 됐다.
하루 일정이 거의 다 마무리가 되고 땅거미가 질 즈음엔 그 날의 잠자리를 물색했다. 잠자리는 보통 한적한 정자나 벤치, 혹은 공터나 주차장이었다. 텐트를 사용했으면 잠자리가 정말 편했겠지만 일전에 중학교 때 자전거 여행을 다니면서 텐트가 부러진 경험이 있어서 '텐트는 튼튼하지 않고, 무겁고, 부피가 커서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거구나.'라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게 됐고, 결국 초경량화와 내구성을 핑계로 텐트를 챙기지 않았다. 텐트가 없었기에 타프나 발포 방석 등의 물건들로 나름대로의 집을 만들어야 했는데, 풀벌레, 모기, 개미 등이 게릴라 작전을 펼쳐서 온몸이 벌집이 됐고, 등이 배겼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매일 밤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잠자리를 해결하다 보니 뭐든 어설펐다. 비, 모기, 햇빛 어느 것도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 씻는 것도 화장실이나 음수대에서 어설프게 씻어야 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항상 몰골이 수척했다.
이렇게 지내다가 이건 정말 사람 사는 게 아니다 싶을 땐 교회나 노인정에 가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을 드려서 좋은 환경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세탁기로 빨래를 하고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 곳에서 잠을 청한다는 게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건지 몸소 느꼈다. 잘 먹고, 잘 씻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바람이 솔솔 부니 하품이 나왔고, 일상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꿈나라의 요정이 재빠르게 찾아와 꿈나라로 데려갔다.
달팽이 생활
달팽이가 자기 집을 등에 지고 가는 것처럼, 매일 이동하느라 잠자리가 매일 바뀌었다. 장소는 교회가 되기도 했고, 바닷가 옆 정자가 되기도 했고, 노인정이 되기도 했고, 맨 땅이 되기도 했다. 발을 뻗고 머리만 뉘일 수 있다면 어디던 내 집이었다. 구성요소는 타프와 얇은 매트리스, 모기장 침낭, 무거운 침낭이 전부였다. 무게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채로 준비한 것들이라 상당히 무거웠다. 캠핑의 기본도 모르고 쓸데없는 장비만 잔뜩 챙겨 와서 몸으로 지불해야 할 수업료가 컸다.
첫 번째로, 무게를 줄인다고 타프 팩(peg)을 안 챙겨 와서 땅바닥에 타프 끈을 고정할 수 없었고, 대강 묶을 수 있는 곳에 묶어서 설치하다 보니 항상 타프가 헐렁하게 설치됐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500 RPM로 떨리는 타프 소리에 잠을 설쳤다. 글로는 상상이 안 가겠지만 진짜 새벽 3시에 푸더 더더더 덕 파드드득 뿌더더덕 찌지 지지 지직 하면서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는데, 새벽에 해가 안 뜬 상태에서 들으면 무서워서 가히 오줌을 바지에 촉촉이 적실 정도였다. 타프는 빳빳하게 쳐야 소리가 안 난단 걸 이때 깨달았다. 두 번째로, 맨 땅에 발포매트 한 장을 깔고 자려니 등이 배겨서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에어매트를 인터넷으로 구입하고, 부모님이 집에서 택배를 받으신 후 그걸 내 위치와 가까운 택배영업소로 출고 택배를 보내주셔서 사용했다. 세 번째로, 비비색처럼 뒤집어쓰는 버그 넷이라는 제품이 있었는데 침낭형 모기장이었다. 모기를 아주 잘 막아준 다고 하여 '다른 건 몰라도 모기는 잘 막겠지'했지만 하나도 막아주지 못했고 오히려 땅에서 기어올라온 개미한테까지 물리는 참사가 벌어졌다.
즐거운 식사시간
식사자리는 딱히 정해진 게 없었다. 정자에서 먹기도 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버스정류장이나 길바닥에 앉아서 먹었다. 식당에서 매일 끼니를 해결했으면 영양적으로도 균형 지고 만족스럽게 먹으면서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을 텐데, 가끔 식당에 몇 번 가긴 했지만 비용 탓에 대체적으로 마트를 이용했고 하루 세 끼를 두 끼로 줄여서 식비를 절약하기도 했다. 매일 에너지바나 초코파이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마른 오징어에서 물을 짜내듯 힘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다니다가 반찬이 먹고 싶을 때가 중간중간 찾아왔다. 그럴 땐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조금씩 사다가 먹었다. 반찬과 함께 먹는 밥은 보통 햇반을 편의점에서 데워서 먹었는데, 햇반을 데우기 귀찮을 땐 한적한 식당에 가서 사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밥 한 공기를 천 원에 구입해서 먹었다. 식당에서 밥을 살 때는 천 원을 드리고 반찬 통에 한 공기를 받아왔는데 가끔 반찬통을 건네면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보시면서 돈을 안 받겠다며 그냥 가져가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렇게 주변 공원이나 공터에서 반찬에다가 따끈한 밥을 먹을 때면 밥이 왜 이리도 맛있고 소중하게 느껴졌던지, 집에 돌아간다면 김치에 맨밥을 먹어도 행복하게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맨 오른쪽 사진. 노인정 할머니들에게 먹을 것좀 얻어먹을 수 있겠냐고 부탁드렸는데 한 할머니께서 따라오라고 하셔서 할머니 집에서 감자를 얻어먹으며 촬영한 사진이다. 그 날 감자와 물김치, 된장밖에 먹지 않았는데 감자 맛에 취해버렸다. 속이 아주 든든하고 따끈한 것이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날, 감자를 먹으면서 감자처럼 맛있는 음식을 싸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나 고민을 하던 중 계란이 딱 떠올랐다. 그래서 앞으로 며칠간은 돈 좀 아껴볼까 생각을 하고 계란을 한 판 사서 뜨거운 물에 삶았다. 그걸 챙겨서 이동 중에 하나씩 까먹으며 다녔는데 며칠을 반복하니 어느 순간부턴 입에서 닭똥냄새가 강하게 났고 배탈이 나서 더 이상 계란을 삶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계란이 먹고 싶을 땐 훈제계란을 구입해서 먹었다. 그 뒤로 계란 삶은 것에 영감을 얻어서 저렴한 식단을 계속해서 연구하며 다녔다.
식사 관련해서 참 감사한 것은, 넉넉하진 않았음에도 투정보단 감사했던 순간들이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행복은 없어지고 난 뒤에야 그 가치를 깨닫는다고 하던데, 먹을 것으로 감사함을 느끼게 되자 감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여행의 전반적인 생활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이 생겼다. 그 감사함의 에너지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배고프게 다닌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배움이자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