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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Apr 16. 2019

18살짜리 공사장 인부

혹시 사람 안 필요하세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사투

짧은 시간에 짭짤한 수입을 벌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컴퓨터 책상에 앉아서 턱을 손에 괸 채로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편의점이나 식당 알바로는 빠른 시간 내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쉬운 일자리를 찾으며 저임금을 받느니, 힘이 조금 더 들더라도 상대적으로 많이 벌 수 있는 곳에서 일하길 희망했다. 네이버 지도로 일할만한 곳을 검색해보며 추렸던 리스트엔 터널 발파업체, 공업소, 잔디 업체 등.. 모두 몸을 쓰는 곳들뿐이었다. 종이에 적힌 업체의 개수는 무려 60개나 되었고,  번호순으로 전화를 걸기로 했다. 일자리를 구한다고 이야기하고, 사람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삭선을 찍찍 긋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다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는데도 안 된다고 하면 또 다음 전화번호로 넘어가고, 그런 식으로 전화를 돌려서 어떻게 던 일자리를 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드디어 첫 번째 통화였다. 긴장한 나머지 통화연결도 안 됐는데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를 뭐라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웃음) 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짰는데 몇 개월간 바짝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네이버 지도로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전화를 드렸거든요.(헛기침) 삼척에 거주 중이고 나이는 18살인데 학교를 일찍 졸업해서 시간적인 여유가 됩니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을 사장님이 자유롭게 정하셔도 그대로 할 수 있어요. 일은 정말 야무지게 성실히 잘할 수 있습니다. 혹시 사람 안 필요하실까요?(웃음)"


심히 떨리는 목소리, 불안한 웃음, 더듬거리는 말주변과 기침 따위의 부적절한 추임새까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거의 반 기절 상태에서 전화를 했기에 도저히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전화를 받는 분들은 나의 제안에 굉장히 당황스러워하시거나, 버럭 화를 내셨다. 


"사람 필요할 땐 인력소에서 구해다 쓰면 되지 뭐하러 서로 불편하게 선생님한테 따로 전화하겠어요. 언제 사람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저는 거절할게요."

"저기.. 학생 바로 거절해서 미안한데, 일주일 전에 직원을 구했어요. 다른 집에 전화해보세요."

"저는 혼자 일 하기 때문에 사람 필요 없어요. 미안합니다."

"다 좋다 이거야. 그래도 적어도 군대는 갔다 와야 같이 일을 하지 이 사람아. 군대도 안 갔다 와서 어떻게 같이 일을 하겠나. 다음에 군대 갔다 오고 나서 전화하쇼. 끊습니다잉."


어떤 곳은 어린 나이 때문에, 어떤 곳은 사람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서 거절했다. 어떤 곳은 임금을 편의점 알바보다 낮게 주겠다고 해서 내가 거절한 곳도 있었다. 60곳 모두 내가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다만 그 전화 통화가 헛된 일은 아니었다. 통화를 하면서 낯선 사람과 말을 섞고 한 번 두 번 거절당하다 보니 내가 이런 거절을 당하면서도 계속 전화를 했다는 것에 대해 놀랐고,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삼척지역엔 전화할만한 곳에 전화를 다 돌렸으니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일자리를 구해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일자리를 계속 찾아봤고, 어쩌다 보니 울산 현대중공업의 한 하도급 업체와 연결되었다. 자신을 업체 관리자라고 밝힌 수화기 너머의 한 남성은 현대중공업 조선소 근무환경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입사에 필요한 준비물이나 절차, 숙소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그는 중간중간 그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일을 잘할 수 있겠냐며 물어봤는데 그럴 땐 내가 어떤 이유로 돈을 벌려고 하는지, 일을 하기에 앞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니 적어도 내가 의지박약인 사람들처럼 세 달 안엔 그만두진 않을 것 같다면서 좋아했다. 통화가 끝날 무렵, 수화기 너머로 서류 작성과 신체검사를 위해 울산으로 내려올 수 있겠냐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나 기쁘던지. 나는 다음 날 곧바로 울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조선소

부푼 기대를 품고 울산에 도착했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사무실 문을 여니 한 남자가 한쪽 책상에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렵게 찾아갔고 이제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들을 수 있었던 말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 남자는 통화를 할 때 내가 18살이라고 나 자신을 소개한 것을 18일에 만나자는 말로 잘못 알아듣고 이 날 부른 것이었고 했다. 혹시라도 나이 때문에 거절당할까 봐 진작에 18세라고 나이를 분명히 밝혔고, 어떻게 해야 18살이라는 말을 18일에 만나자는 말로 들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걸로 잘잘못을 따져서 감정 낭비와 시간낭비를 하면 힘이 모두 빠져버릴 것만 같아서 상황을 그 자체로 인정해버리고 서둘러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나이 때문에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잠시만요!"

"왜요?"

"나이 때문에 안 될 것 같긴 한데.. 이력서라도 넣어보는 게 어떨까요?"

"음.. 네. 그럼 이왕 울산 온 김에 넣어보죠 뭐."


결국 그를 따라서 7만 원으로 건강검진을 받았다. 거기에다가 왕복 차비 7만 원, 먹을 것에 대략 1만 원을 썼으니 고작 이력서를 제출하는데 무려 15만 원을 지출한 셈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채용 결과가 나오면 연락을 달라는 말과 함께 삼척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괜히 기다리는 기간에 다른 일자리를 구했다가 중간에 그만둬야 할까 봐 다른 일도 못 하고,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3주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남성에게 오는 연락은 한 통도 없었다. 결국 '언제 연락이 올까'하며 피가 마르게 기다리다가 먼저 전화를 해봤지만, 결국 들을 수 있는 말은 '나이 때문에 빠꾸를 먹었다, 미안하다'라는 말뿐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굵은 쇠꼬챙이에 심장이 쿡 하고 찔린 듯이 괴로웠다. 절망감에 휩싸였고, 더 이상 거절당할 힘이 없어서 휴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며칠 쉬다 보면 다시 힘을 얻겠지. 그 뒤로 며칠간은 침대에 누워서 환자처럼 잠만 잤다. 



인력소

며칠이 지나고, 일자리를 다시 알아보다가 '인력소 후기' 키워드의 글들을 발견하고 인력소는 뭐하는 곳일까, 가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글을 쭉 읽었다. '당일 지급', '원할 때 출근'이라는 말이 맘에 들어서 삼척에 있는 인력소들에 전화를 돌려봤다. 그렇게 나를 써줄 곳이 있는지 찾아봤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대부분 인력소 소장들은 "어린놈은 안 쓴다"면서 매몰차게 밖으로 내보내거나 똥이라도 밟았다는 식으로 전화를 서둘러 끊기 일쑤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전화했던 ㅇㅇ인력소에 오후 3시쯤인가 전화를 걸었을 때였다. 소장이 얼굴을 보자며 인력소로 한 번 와보라고 하길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생각하며 바로 인력소로 향했다. 집에서 20분쯤 걸어서 인력소에 도착하니 문이 잠겼다. '뭐지?' 하는 심정으로 소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네 ㅇㅇ인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까 전화드린 사람인데 사무실에 문이 잠겨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지금 현장이라, 한 3시 반이나 돼야 들어갈 것 같은데요. 기다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날씨가 쌀쌀했던 터라 사무실 앞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분명 3시 반에 온다고 했던 소장이었는데, 어째 연락 한 통 없이 4시 반이 돼도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문이 잠긴 인력소 앞에 가만히 기다리려니 소매 틈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춥기도 하고 혹여나 누가 알아볼까 봐 민망했지만, 일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기다렸다. 잠시 후 차 한 대가 인력소 앞에 서고 남자 한 명이 내렸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전화한 사람이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나를 가만히 노려봤다. 목소리와 매칭 되는 외모를 가진 것으로 보아 분명 소장이었다. 난 어려 보이지 않으려고 당당히 걸어가서 마치 무슨 신입사원 면접이라도 보는 듯이 자신감 있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전화드린 사람입니다."


백발의 걸걸한 목소리, 우람한 B형 뱃살의 소유자인 소장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굳게 잠긴 인력소 자물쇠를 따곤 인력소 안으로 휙 들어갔다. 들어오란 말도,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아무 말도 없는 소장을 따라 인력소에 들어가니 대기실처럼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소파와 의자가 았다. 내가 소장 옆에 서 있자 소장은 헛기침을 에헴에헴 하고 의자에 앉더니 그제야 저 멀리 있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굉장히 푹신해 보였고, 허리를 기댄다면 10분 안에 잠들 것 같은 소파였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불편하게 앉아서 각을 잡았다. 각이 칼각이어서 누군가 내 몸을 만진다면 스윽 베일 정도로 날카로웠다. 소장은 한참 동안 서류를 붙잡고 열심히 일 하는 척을 하다가, 종이를 소리 나게 넘기면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운을 뗐다.


"몇 살이야."

"18살입니다."

"민증은 있나?"

"아니요, 아직 없습니다."

"18살에 민증도 없다?"

"예 그렇습니다."

"내가 웬만하면 쓰려고 하겠는데, 넌 나이가 안돼서 안 돼. 누가 현장에서 니 같이 어린놈을 써주나. 민증도 안 나온 놈이 무슨 일을 한다고 여-까지 찾아와. 안 되니까 빨리 집에 가."


여전히 시선은 나를 피한 상태였다. 

 

"잠시만요, 민증도 안 나온 놈이요? 그럼 민증이 나오면 일을 시켜주신단 말씀이신가요?"

"일단 민증이 나와야 일을 주던가 말던가 하는데, 민증도 없으면 일 못하지."


내 나이 18살에 생일은 3월이었고, 주민등록증 발급시기는 만 17세다. 생일이 지난 시점이었기에 민증을 신청한 상황이었고 며칠 뒤면 민증이 나올 예정이었다. 이제 며칠 뒤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포스 넘치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럼 며칠 뒤에 뵙겠습니다!"


소장은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곧바로 다시 서류를 쳐다보며 무시했다. 유리문을 닫고 나와서 인력소 건물 바로 앞에서 높은 하늘을 우러러 바라봤는데 어찌나 푸르게 보이던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온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가득해 보였다. 지나다니는 차 소리도, 따르릉 자전거 소리도... 딱지치기를 하는데 "아 씨발 반칙 쓰지 마라"며 싸우던 초등학생들의 목소리도.. 모두.


'네가 민증 가져오라며 인마.. 가져오면 될 거 아냐. 가져갈 테니 딴 소리만 하지 마라..'


다시 인력소로

며칠 뒤 민증이 나왔다. 그리고 민증이 나온 다음 날 새벽, 인력소로 향했다. 인력소 앞에서 인부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소장이 도착했다. 소장이 열쇠로 문을 따는 순간 문틈에서 환한 빛이 세어 나오는 것처럼 빛나 보였다. 아직 돈이 수중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행복감에 젖어든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저 민증 나와서 왔습니다. 사장님이 민증 나오면 일 시켜준다고 하셔서 발급받아왔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 앉아서 기다려."


소장은 날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니 내 민증을 빼앗듯 손에서 낚아채갔다. 그리고 눈을 컴퓨터 쪽으로 피하면서 "신기한 놈이네.."라며 구시렁거렸다. 난 소장의 말에 따라 소파에 앉았고 인력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일거리를 받아가는지 눈이 동그래진 채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선 인력소의 주된 연령층인 중년의 남성들은 들어옴과 동시에 줄줄이 모여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갔다. 그리고 너덜너덜 걸래 짝된 작업화를 질질 끌고, 밖에 나가서 담배를 질겅질겅 씹듯이 입에 물고는 특정 정치인을 모함하거나 최근 구매한 물건에 대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다. 행복한 흡연 타임이 끝나면 앉아서 뉴스 시청도 했다. 마치 그게 그들의 유일한 낙인 듯이 행복해 보였다. 내 나이 또래도 한 두 명쯤 있었는데, 밀레니엄 시대답게 커피타임을 즐기면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소장에 의해 이름이 호명되는 사람들은 봉고차에 탑승한 뒤 노예처럼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아저씨는 ㅇㅇ아파트 건설현장에, 어떤 아저씨는 발전소 공사에. 대부분 건설 쪽으로 일을 배정받아갔다. 일부는 소방방재나 떡볶이집처럼 건설이 아닌 일에도 배정을 받았다. 물론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배정받고 자리를 떴을 때 가만히 앉아있어야 했다. 소장이 현장 배치 명단에 내 이름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력소엔 나와 소장만 남았다. 소장은 여전히 나에게 말 한마디를 건네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본인 사무실로 일을 하러 나온 사람이 있는데 일을 못 보내줬으면 미안하다, 오늘은 일이 없다 라는 식으로 말 한마디 해주면 괜찮다며 집으로 들어가서 쉴 텐데, 앉아서 기다리라 해놓고 일도 안 보내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또 기다리게 하는 건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속으로 참 갑갑한 양반이구나 생각하면서 먼저 운을 뗐다.


"저는 일이 없는 건가요?"

"너 건설업 기초안전교육도 안 받은 놈이 무슨 일을 해. 그건 기본인데, 몰랐나? 하고 싶으면 받고 오던지."


물론 그 날... 지켜본 바로는 이수증이 없는 사람도 현장 배치를 받았다. 나를 그냥 돌려보내려는 수작인지 뭐였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받으라니 받아야지. 그 날 바로 묵호역으로 가서 일용직이면 필수로 들어야 한다는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을 수료하고, 이수증을 받아서 그다음 날 또다시 인력소로 향했다. 다음 날, 감사히도 일을 할 수 있었다. 첫날 내가 팔려갈 곳은 한 공구리(시멘트) 작업장이었는데, 아저씨들을 따라가면 된다길래 같이 봉고차에 탑승했다. 이제 일을 하게 됐다며 행복해한 순간도 잠시, 차에 타자마자 함께 탄 인부들의 몸에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표현 불가능한 냄새가 훅 치고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 같았다. 냄새 때문에 속에서 자꾸 욱욱 올라오는데 토를 할 수도 없고.. 머리가 굉장히 어지럽고 몸에서 열이 나면서 쓰러질 것 같았다. 뱃멀미를 심하게 앓는 느낌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가 하나 빠진 아저씨가 처음 왔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렇다고 하니까 이 일이 남들에겐 무시받아도 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버는 직업이라는 말로 물꼬를 틀었다. 그러시냐고 하니 마치 10년간 누군가와 대화를 한 번도 못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뇌에 있는 모든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싯적엔 자기가 잘 나갔던 이야기,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던 이야기, 결국 막일판으로 빠졌지만 그래도 막노동이 정직한 일이라는 이야기 등..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기만 하니 듣는 입장에선 굉장히 거부감이 들었고, 입에서 나는 구취 때문에 좋은 표정으로 받아주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날숨과 함께 토가 절로 솟구쳐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열었으면 좋았으려만 안타깝게도 내 자리에선 창문을 열 수 없도록 못으로 창문을 고정해놔서 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 예;;;" 하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하.... 첫날부터 아주 곤욕이었다.



예?

현장에 도착해서 내 키보다 높이 쌓인 흙 포대를 보고 첫 번째로 놀랐다. 그리고 그걸 나 혼자 1시간 안에 정해진 위치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듣고 두 번 놀랐다. 작업반장이 "설렁설렁해~ 조금 더 걸려도 괜찮아~" 하는데 아무리 봐도 설렁설렁하면 끝낼 양이 아니었다. 그리고 막노동 첫날이라 긴장 백배였기에 쉬는 게 오히려 불편했다. 그래서 쉬지도 않고 끙끙거리면서 옮기기 시작했다. 1시간 반 뒤, 미친듯한 속도로 포대 옮기는 작업을 마치고 나니 삽으로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파내라는 지시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삽질이건, 잔심부름이건, 현장을 다니며 '이 그지 같은 건 모두 누가 해야 되는 거지?' 싶은 건 모두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몸을 쓰는 일이라서 엄청 고됐지만, 다행히도 이빨 빠진 아저씨가 두 시간 간격으로 "자~~ 담배 한 대 피고 합시다~~" 하면서 쉬자고 해서 가끔 쉴 수 있었다. 반장도 그럴 때마다 나에게도 좀 쉬었다오라고 했고, 본인도 에라 모르겠다 싶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나는 뭐하며 쉴까 하다가 밭 주변에서 땅을 파서 지렁이 끄집어내서 가지고 놀고, 밭 옆에 개 집이 있었는데 개집에 묶인 진돗개를 쓰다듬으면서 숨을 골랐다.


9만 원의 사나이

일이 끝나고, 현장에서 10만 원을 받아서 인력소로 돌아갔다. 전 날에 소장으로부터 수수료는 10%란 소릴 들어서 수수료로 만원을 공손히 건넸다. 그런데 소장은 세상 아니꼬운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야, 이게 기본이 안 되어있네. 현장 나가서 10만 원을 받았으면 일단 10만 원 현금을 나한테 다 주고, 내가 거기에서 만원을 떼고 9만 원을 너한테 다시 주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받아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하는 게 예의야. 알겠어?" 하는데 우선 그게 왜 '예의'인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직접 그렇게 하는 게 그렇게 불편하면 계좌로 보내라고 하면 되지,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서 남의 돈 수수료 받는 거면서 굳이 힘들게 일 끝낸 사람들을 또 불러가지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마치 하인 부리듯, 본인이 상전인 듯이 행동하는 게 장히 양심 없어 보이고 꼴 보기 싫었다. 적어도 아니꼬운 표정으로 이야기하지만 않았더라면, 고생했다고 한 마디라도 했었더라면 제가 몰랐네요,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하면서 맞춰줬을 텐데 말이다. 소장은 첫인상처럼 정말이지 싹수가 없었다. 정을 붙이려야 붙일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안전은 최우선

기분이 순간적으로 굉장히 불쾌했지만 수수료를 제외하고 9만 원을 수중에 넣고 나니 불쾌한 감정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루가 휙 지나갔는데 9만 원을 벌었다니, 너무나도 행복했다. 나는 곧바로 철물점으로 가서 번쩍번쩍 광이 나는 K2 안전화를 집어 들고 4만 5천 원을 지불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단 돈 몇만 원이 아쉬울 때였지만 그때도 사람 목숨 값에 비교해보면 이렇게 쌀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저렴하다고 느껴서 구입했다. 안전화는 일반 신발과는 다르게 밑창 고무가 두껍고 발가락 위쪽으로는 강철판이 들어가 있어서, 소형차량이 밟고 지나가도 발이 멀쩡할 정도로 튼튼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앞으로 그런 안전화를 신고 현장을 누빌 생각을 하니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이 날 저녁,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볍게만 느껴졌다.



기억에 남는 현장들.



시멘트 공장

시멘트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깔려있는 모습이다. 공장에서부터 산 쪽으로 끝이 어딘지도 모르게 이어져있는 이 벨트는 산 쪽에서 들어오는 광물을 공장까지 운반한다. 이 컨베이어 벨트는 다른 컨베이어 벨트와는 다르게 벨트 밑에서 고압으로 나오는 공기로 인해 벨트가 붕 뜬 상태로 적재물을 옮기는데,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 의문스럽지만 그렇다 보니 컨베이어 벨트 밑에 자갈이나 광물이 자꾸 껴서 그걸 제거해주는 작업이 꼭 필요했다. 우리가 투입된 이유 또한 벨트 밑에 깔린 돌이나 자갈 등을 제거해주기 위해서였다. 광물을 제거하기 위해선 도르래의 원리를 활용한 체인블록이란 장비가 필요했는데, 묵직한 강철 고리에 원하는 물체를 걸고, 도르래 원리로 체인을 쭉쭉 당기면 적은 힘으로도 아주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작업내용은 몇몇 인부들이 그 장비를 들고 멈춰있는 벨트 한 부분에 가서 벨트를 체인블록에 묶고 체인을 쭉쭉 당기면서 들어 올리면, 나머지 인부들이 그 틈에 있는 자갈과 흙을 삽과 손으로 퍼내는 작업이었다. 한여름 날씨였음에도 동굴 안은 굉장히 추웠고, 흙먼지는 엄청 많이 날리는데 먼지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먼지 구덩이에서 일을 했다. 3M 방진마스크를 썼는데도 일이 끝날 때쯤이 되면 목이 찢어질 듯이 아팠고 가래를 뱉으면 이상한 검은색 가래가 나오는 등.. 며칠 안 했는데 기관지가 순식간에 안 좋아졌다.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어떤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했을지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었다.



동해고속도로 건설현장

지금은 고속도로 인근 주민들의 불만 제기로 인해 근덕 IC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내가 일을 했을 당시엔 남삼척 IC라고 불렸다. 여기에서 일해보기 전까진 도로는 간단히 중장비로 쭉쭉 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을 해보니 생각보다 도로 하나를 설치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크게 놀랐다. 길 하나를 내기 위해서 터널을 뚫고, 다리를 설치하고, 터널 안쪽 땅이 고르지 않으니 땅을 다지고, 전기와 조명을 설치하고, 비상전화기를 설치하고, 형틀목수가 터널 입구 바닥에 틀을 만들어서 시멘트를 부어 굳히고, 비가 왔을 때 물이 흘러야 하니 주변으로 배수로를 설치하고, 터널 위에 산 쪽 경사가 쓸려내려 오면 안 되니 경사면을 정리하고.. 일주일 정도 아저씨들을 따라다니면서 굉장히 많은 작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한 국가의 모든 국민들이 사용하는 고속도로를 설치하는 일에 한몫을 했다니, 이렇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해고속도로가 완공하고 나서 가족들과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이용할 땐 이 도로를 다 내가 깔았다며 자랑하기까지 했다. 물론 0.00001%밖에 안 했지만, 마음속으론 그 수치를 뒤집어서 10000.0% 한 것만 같이 뿌듯했다.



삼척 LNG 발전소

이건 삼척 LNG 발전소 건설현장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돔 형식의 발전소가 지어지고 있을 당시, 발전소엔 도로도 제대로 깔리지 않았다. 팔려가듯 차에 실려간 거라서 작업 위치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해수로 발전소를 식혀주어야 해서 바닷물이 발전소로 들어가는 길을 짓는 거라는 말을 얼핏 들었다. 거기에서 철근공들과 함께 일을 했는데 아저씨들이 나이도 어린데 이런 곳에 왔냐며 마치 아버지처럼 잘 챙겨주셨다. 내가 했던 작업은 굵은 철근들을 도면에 맞게 쭉쭉 세우고, 굵은 철근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얇은 철사로 고정하는 작업이었다. 얇은 철사를 굵은 철근들의 교차지점에 한 바퀴 감아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갈고리로 휙휙 돌리면 얇은 철사가 결속됐는데, 밥도 맛이 없었고 햇볕도 따가웠지만 아저씨들과 신나게 떠들고, 일 열심히 잘한다고 칭찬도 받으면서 갈고리질을 하니 금세 퇴근시간이 됐다.



삼척시 방역작업

보건소 하청으로 시내 방역작업을 했을 때, 대포처럼 생긴 사진 속 장비를 들고 하수구 구멍에 방역을 했는데, 이 장비는 흔히 초등학교 때 쫓아가던 소독차량과는 달리, 차량으로 할 수 없는 하수구 방역을 위해 사용하는 장비였다. 이 장비엔 연료통과 약품통이 는데 약품통에 여러 개의 소독약품을 비율에 맞추어 희석해서 넣고 연료통에 연료를 넣은 뒤 시동을 걸면 분사량 조절기를 조절한 정도만큼 소독 연기가 발사되는 구조였다. 그리고 장비 한족에 어깨로 둘러메는 멜빵이 있어서 어깨에 둘러메고 여기저기를 쏘다녀야 했는데, 한쪽 하수구에 분사량을 최대로 해놓고 연기를 뿜으면 모기들이 꺄아아악 거리면서 죽는소리가 1차적으로 들렸고, 2차적으론 연결된 주변 하수구로도 연기가 퍼져서 다른 하수구 맨홀에서도 방역 연기가 세어 나왔다. 장비의 무게는 15kg 정도로, 굉장히 무거워서 소독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깨도 아프고, 소독약의 독성 때문에 술을 진탕 마신 것처럼 피곤하고 다음날에도 피곤이 안 풀렸다. 그리고 연기가 눈에 계속 들어가서 눈도 굉장히 따갑고 시력이 다음 날 아침까지 뿌얘서 눈이 며칠간이나 쾡했다. 물론 단점만 있지는 않았다. 집에 계시다가 밖으로 뛰쳐나오셔 선 우리 집 주변에 방역하러 와줘서 고맙고, 고생이 많다고 하시면서 건강음료나 아이스크림, 혹은 찐 감자같이 먹거리를 챙겨주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셨다. 일하느라 힘든데 그런 분들이 찾아와 주실 때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또 하루의 피로가 싹 가셔서 그분들껜 집이 어디냐고, 집 안쪽에 방역 필요한 곳이 없냐고 여쭈어보았고 창고나 하수관 등에 방역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을 때면 후다닥 함께 집으로 가서 집 주변으로 모기를 싹 박멸해드렸다. 말 몇 마디에 서로 천국을 누린 것이었다.   



소방방재

소방방재 일을 할 때, 노래방이나 고등학교, 빌딩에 설치된 화재경보기를 테스트하고, 지하실에서 펌프 테스트를 했는데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다. 여느 날처럼 출근한 어느 날, 한 소방방재 회사의 상무가 인력소에 와서 "민증 있는 사람으로 데려가겠습니다."라고 했고, 인력소 소장은 나를 보냈다. 상무와 함께 현장 사무실로 가니 상무는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한다며 신분증을 복사하게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신분증을 건네줬고, 복사기로 복사를 마쳤다. 그런데 상무가 종이에 복사된 신분증 사본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표정이 싹 변했다. 그리고 난데없이 반말을 툭 뱉었다. 


"뭐야, 너 18살이냐?"

"예 맞습니다."

"18살짜리가 왜 일을 하고 있어? 학교 안다녀?"

"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나이고, 고등학교는 일찍 졸업했습니다. 건설업 기초안전교육 이수증도 있습니다."

"부모동의서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

"지금까지 요구하는 곳이 없어서 챙겨 다니질 않았습니다. 필요하시면 오늘 저녁에 스캔해서 메일로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이 자식이.. 요즘 미성년자 이런 일시 켜주는 곳이 어딨어? 내가 그것 때문에 경찰서 몇 번이나 다녀온 줄 알아? 부모님이 이쪽으로 오셔야 오늘 일을 할 수 있겠구먼! 부모님한테 전화해서 이쪽으로 오라고 해!"


필요하다면 부모님 친필로 동의서를 보내주겠다고까지 했는데 난데없이 부모님을 당장 소환하라고 닦달하니 나로서는 속이 터지는 상황이었다. 옥신각신 할 바에야 인력소로 돌아가서 다른 일을 배정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괜히 옥신각신하다가 하루 일당을 못 받게 될 수도 있고 일을 하더라도 부모님이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하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부모동의서 필요하시면 저녁에 바로 보내드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아랫사람 대하듯이 말 툭툭 뱉으시고 시간만 끄실 거라면 둘 다 손해니까 빨리 결정해서 인력소로 태워주시던, 같이 일하시던 하시죠."

"어쭈, 이 놈 봐라? 너 내가 니랑 말씨름할 나이로 보이냐?"

"전 다른 곳에선 아무런 문제 없이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고, 안 쓰실 거면 뭐하러 이런 시간을 허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빨리 사무실로 태워주셔야 제가 다른 일을 하던가 하죠. 상무님도 편하실 거고요."


대충 이런 식의 기분 나쁜 대화가 오고 갔고, 저녁때는 사장과 상무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며, 딱 본인들 회사에 제격이라며 "제발 좀 우리 센터에서 일해줘. 사람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라고 한 10번은 사정사정하면서 옻닭과 옻술을 사줬다. 낮에는 미성년자라고 있는 욕 없는 욕 다하더니, 저녁에는 미성년자에게 비싼 술을 친히 따라주며 살살 꼬드기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무튼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같이 일을 하게 됐고, 나중에 소방방재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다고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쪽에서 제시한 급여는 하루 8만 원, 급전이 필요한 나에겐 조금 부족하다 싶어서 거절했고 그다음부턴 서로 연락이 없었다.



사망할 뻔했던 현장 이야기

인력소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건물 리모델링 현장 철거작업을 꼽고 싶다. 무더운 더위속 어느 날, 현장엔 아시바(파이프)가 비계(발판)와 함께 건물 외벽에 설치되어 있었고, 나포함 10명의 인부가 투입되었다. 이 날의 작업은 리모델링을 마친 건물의 천막과 비계, 파이프를 털어내는 것이었다. 


작업 시작 전, 인부들이 건물 밑에 모여서 담배를 태웠다. 나는 빵과 우유로 아침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잠시 후 건물 밑에서 위를 쳐다보며 이 날의 작업량을 가늠하던 인부들의 담뱃불이 하나 둘 꺼지더니 저 멀리서 어서 올라가 천막부터 걷으라는 작업반장의 지시가 들렸다. 그런데 가만 보니 안전장비를 착용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인부들은 하나 둘 맨몸으로 파이프 사이에 물려있는 클램프를 아슬아슬하게 밟아가며 올라가고 있었다. 무려 7층 높이를 장비 없이, 쇠파이프를 타고 자그마한 클램프를 밟으며 올라간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자연스레 머리가 터져서 사망할 수 있는 높이였다. 떨어질 때 바닥까지 가는 시간도 오래 걸려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회개기도를 할 시간이 있을 정도였다. 고소공포증이 없었음에도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인부들을 뒤로하고 작업반장에게 가서 고소작업엔 법적으로 안전고리가 달린 안전벨트를 지급해주어야 하는데 왜 그냥 올려 보내냐고, 사람들 이러다가 죽으면 누가 책임지냐고 불만을 제기하며 벨트를 지급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작업반장은 콧방귀를 뀌면서 어디 인력소에서 나왔냐며, 소장에게 전화를 하겠다며 일종의 협박을 했고, 일이 하기 싫으면 집으로 돌아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올라간 인부들은 빨리 올라오라고, 너 때문에 작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며 아우성이었다.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그 날 안전벨트를 착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바로 사진을 찍고 고용노동부에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하루 일당도 못 받고 인력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갈까 봐 가질 못했다. 어떻게 던 여행 경비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7층 높이를 맨몸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클램프들을 밟아가며, 안전망도 없고 팔을 뻗을 곳도 없는 난간을 붙잡고 한 층씩 올랐다. 파이프를 잡은 손은 덜덜 떨렸고, 새벽이슬에 젖은 장갑이 너무 미끄러워서 한쪽 파이프를 손에서 놓고 다른 파이프를 잡을 때마다 밑으로 떨어질까 봐 팔 전체를 부들부들 떨며 팔에 힘이 풀리지 않길 기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든 파이프들이 출렁출렁거렸다. 발을 한 번이라도 잘못 헛디디거나 손에 힘이 풀린다면 내 사진엔 검은색 사선의 테이프가 두 개 발라질 게 분명했다. 이러다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100번은 더 고민했다.



그렇게 올라가선 폭 50cm의 발판 위에서 서커스단처럼 양팔로 균형을 잡아가며 일했다. 우선 비계에 설치된 천막을 제거하기 위해 천막 설치용으로 결속해놓은 결속선들을 절단기로 끊어서 천막을 걷었다. 그다음 비계공들이 파이프가 설치된 최상층부부터 발판과 비계를 해체해서 밑에 층으로 전달해주면, 밑층에서 파이프를 받은 사람은 또 밑층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식으로 한층씩 내렸다. 파이프는 1m, 2m, 3m, 4m, 6m로 구성되어 있었고, 발판은 한 판에 16kg였다. 100개까진 괜찮았는데 그 뒤로는 욕이 나올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3m짜리 파이프는 굉장히 애매했다. 두 층의 사람들이 잡고 밑으로 넘기기엔 길이가 애매하게 모자라서 놓칠 수 있었고, 한 층의 사람이 잡고 밑층으로 내려주기엔 파이프가 무거웠다. 또 16kg짜리 발판은 굉장히 무거웠다. 발판을 밑으로 내릴 때는 "발판!"이라고 소리를 질러야 했고, 기마자세로 받아야 했고, 어정쩡한 자세로 밑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해주어야 했다. 더군다나 수백 개의 파이프들과 발판들은 모두 이슬에 젖은 상태였기에, 파이프와 발판을 손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훨씬 더 많은 힘을 쓰면서 작업해야 했다. 그렇게 파이프와 발판이 1층에 도착하면 밑에 있던 인부들이 파이프와 발판을 트럭에 차곡차곡 적재했다.


사건의 시작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서인 건지 작업반장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고, 인부들은 숨 쉴 틈 없이 일했다. 그렇게 하루 만에 못 끝낼 파이프들과 발판들이 순식간에 내려가고 있었다. 너무 서둘렀던 나머지, 끝내 대형사고가 났다. 사고를 낸 사람은 위층에 있던 25살 형이었다. 난 그 형 밑층에서 파이프를 내 밑층으로 전달하고 있었는데, 그 형은 하도 파이프가 빨리 내려오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내가 자신의 파이프를 잡은 것으로 오인했고, 위층에서 파이프를 잡은 손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파이프는 텅 텅 텅 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직 철거되지 않은 파이프들과 부딪히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6층쯤에서 떨어진 그 파이프는 2층 높이 밑쯤에서 일하던 인부의 헬멧에 직격으로 떨어졌다. 그 인부는 비명과 함께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순간 현장은 얼음장으로 변했다. 인력소 소장은 오랜만에 현장을 구경한답시고 커피를 한 잔 하러 현장에 왔다가 그 장면을 봤다. 현장은 심각하게 경직됐다. 고통을 호소하던 인부는 한동안 아무 소리 없이 고개를 싸잡고 있다가 끝내 담배를 입에 물었다. 6층에서 떨어진 파이프를 맞으면 어떻게 맞아도 최소 목이 부러질 것 같아 보였는데 빗겨맞은 것도 아니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파이프를 머리에 맞고도 살아있다니.. 그 인부가 담배를 모두 태우는 1분 정도의 시간 동안 현장에는 깊은 적막이 흘렀다. 짧은 적막 뒤, 파이프 맞은 인부가 작업을 다시 시작하자고 했지만 이미 얼음장이 되어버린 현장의 분위기를 깨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인부가 적막을 깨고 소리쳤다. 


"조심히 좀 안 해? 씨발 이러다가 사람 다 뒤지겠네!" 


그러자 꼭대기층에서 비계공이 말했다. 


"아 지금 뭐해? 일 안 할 거야? 빨리 다시 작업 시작해!"


이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그지 같은 날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길 왜 올라왔을까, 그냥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고 인력소 사장이 뭐라고 하면 다른 인력소로 갈아탈 걸.' 하는 생각을 수억 번도 넘게 했다.



작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 나는 1층으로 팔려나갔고, 클램프들을 모두 주워서 한 곳에 쌓았다. 16kg짜리 발판 약 100장을 트럭에 차곡차곡 쌓았고, 여러 종류의 파이프들을 모두 트럭에 실었다. 위험천만하게 진행되던 작업은 해가 저물 어감에 따라 더 빠르게 진행됐다. 그리고 결국, 그 많던 파이프와 발판을 하루 만에 다 털었고 정리까지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서 서러움에 이불에 얼굴 파묻고 엉엉 울었다. 내 목숨 값이 고작 10만 원이라니, 10만 원을 벌려고 이렇게 피땀을 흘려야 하다니. 눈물밖에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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