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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Apr 12. 2019

블랙 하이스쿨

검정고시


배추벌레

생각해보면 나는 늘 한 마리의 배추벌레였다. 시간을 야금야금 까먹으며 살아왔다. 늘 붕어빵처럼 누군가 뒤집어줘서 멋진 사람으로 성장시켜주기만을 바랬다. 뭐 하나 진득하게 한 것도 없고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꿈도 계속 바뀌었다. 살면서 스스로 해낸 유일한 업적이라곤 과학의 날에 만든 허접한 물로켓이 전부였고 그 허접한 물로켓이 허공에 발사되기까진 무려 16년이란 기간이 소요되었다. 어떻게 보면 5840일.. 어떻게 보면 140160 시간. 나로호(KSLV-I) 연구기간보다 오랜 기간이었다. 물로켓이 발사된 이후로도 시간은 미친 듯이 증발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눈발 날리는 강원도에서 졸업을 앞둔 중학생이 되었다.


부모님은 한국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고등학교와 대학교 졸업이 몇 년씩이나 빠른 필리핀에 유학을 갔다 오지 않겠냐고 여쭤보셨다. 성적만 좋으면 한국에서 대학교에 입학할 나이쯤에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고민해보니 학교를 일찍 졸업할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색다른 해외 문화를 접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서 며칠 만에 출국을 결심했다. 그렇게 마닐라행 비행기에 몸뚱이를 실었고 몇 시간 만에 붕 날아가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보였던 풍경들은 흥미로운 볼거리들이었다. 처음 해외로 가보는 거였기에 공항 자판기에서 휴대폰 유심을 판매하는 것부터 가게에 진열된 필리핀 물건들, 향이 좋았던 길거리 음식, 까무잡잡한 필리핀 사람들, 도로 옆으로 늘어선 허름한 판잣집들, 바퀴 세 개 달린 교통수단인 트라이시클이라는 오토바이까지 모두 신기했다. 거리엔 요즘 나온 차는 없었다. 죄다 올드카들만 쌩쌩거리며 다녔고, 빈부격차가 심해서인지 번쩍번쩍한 슈퍼카들이 아주 가끔 보였다. 후줄근한 필리핀 거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30년 전쯤의 우리나라의 풍경 같아 보였다. 나는 차량 안에서 국제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똥그랗게 뜬 채로 유리 너머의 풍경을 신기하게 감상했다. 금세 학교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다음날 수업을 들으려고 하자 백지상태였던 머리에 블루스크린이 뜨면서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다. 


매주 주말엔 대형 쇼핑몰, 놀이동산, 승마체험, 무인도, 온천, 휴화산 등으로 체험학습을 가서 필리핀 현지 음식과 현지의 문화를 계속해서 접했다. 가끔 한국음식이 생각날 때는 코리안 스토어에서 한국 라면이나 김, 고추장, 과자 등 여러 먹거리들을 사 와 파티를 벌였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갈빗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시간이 남으면 학교 앞마당에 있는 전용 수영장과 축구장에서 공놀이와 물놀이를 즐겼다. 날이 갈수록 피부가 맥반석 계란처럼 노릇노릇하게 구워졌고, 정점에 달했을 땐 현지인들이 가끔 알 수 없는 말로 대화를 걸어오기까지 했다. 


필리핀 생활이 모두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기에는 며칠씩 비가 쏟아지면서 가끔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됐고, 어느 건물이던 상관없이 바퀴벌레가 자주 출몰해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주었다.(세스코 입사지원서에 '필리핀 경험'이라 적으면 합격할 것 같다.) 학교 바로 앞 마을에선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총성이 울려 퍼졌고(다행히 권총을 지닌 무장 경비가 24시간 지키고 있었다.), 필리핀 튜터들의 독특한 발음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되었다. 'water bottle'같은 것도 '와타 뽀틀~' 이렇게 읽으니 뭐..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였다.


며느리가 밥상 차려놓으면 맘에 들어하는 시어머니 하나 없듯, 조금 있다 보니 문제점들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필리핀은 엄연히 영어권 국가가 아니었다. 필리핀은 따갈로그라는 제1국어를 사용했고 거기에 약 200개의 고유어까지 겹쳐 그들끼리도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영어란 좀 배웠다 싶은 애들이나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리고 학원에선 미국 원어민 교사보다 야매 필리핀 교사들의 인건비가 저렴하니 필리핀 교사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한국 학생들은 야매 교사가 야매로 배워온 야매 영어를 주먹구구식 커리큘럼으로 전수받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영어 관련 어플을 몇 개 다운로드하여서 독학하는 것보다 못한 퀄리티에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 나머지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짐들을 캐리어에 주섬주섬 담아 학교 봉고차를 타고 마닐라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도로에서 10살쯤으로 추정되는 필리핀 애들이 웃통을 벗고 쌈박질하는 걸 봤는데 왜 이리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던지..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그래 니들은 계속 싸워라. 형은 한국으로 간다...


운명인가

잠시 과거로 돌아가서, 필리핀에 가기 전에 부모님과 기도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설교시간에 강단에서 간증하시던 분이 아프리카에 학교 짓는 일과 관리 운영을 하고 계시다면서 홍보를 하셨다. 학교까지 통학거리가 먼 학생들에겐 자전거를 사주어서 자전거로 통학을 하게 돕기도 한다고 하셨다. 운 좋게 말씀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서 자세히 들어보니 실습실, 교실, 교무실 등 총 5칸으로 구성된 소규모 학교 건축은 2000만 원이면 되고, 현재 학교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 같은 국가라고 했다. 


필리핀에서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그 사람을 만났던 일이 왜 이리도 계속해서 떠올랐는지, 시간을 낭비하는 삶이 이젠 지겨웠다. 나도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만남은 운명같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 단체 이름엔 '자전거'가 들어갔는데, 중3 때 개고생 하며 다녀온 '자전거'여행이 오버랩되면서 둘 사이의 공통분모로 느껴졌다. 이건 마치 소개팅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과 내가 똑같이 산소로 들숨을 쉬고 이산화탄소로 날숨을 쉰다는 것조차도 공통분모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논리였지만 어쨌건, 그 단체를 통해, 그리고 자전거 여행을 통해 모금을 해서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고심 끝에 400일 전국일주 프로젝트를 준비하기로 했다. 우선 계획은 막일로 여행경비를 마련하고,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면서 SNS를 통해 재미있는 여행 기록과 에티오피아 학교 건축 프로젝트 홍보를 업로드하고, 전국 각지에 생길 후원자들을 직접 만나고, 후원금을 온/오프라인으로 모금하여 에티오피아에 학교를 세울 기금을 조성하고, 마지막으로 그분이 몸담고 있는 NGO단체에 기금을 전달하여 학교를 선물해주는 것이 목표였다. 


작은 난관

나는 한국에 도착하면 곧바로 에티오피아에 학교 짓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께선 다시 학교를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학교에 가는 건 정말 끔찍이 싫었다. 꿈이 명확히 없었기 때문에 학교 공부엔 별 흥미가 생기질 않았고, 고등학교를 지금 들어간다면 1년을 꿇어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절대 안 갈 거라고 반대의사를 강력하게 표출했다. 그 말 한마디에 우리 집엔 (엄마+형) vs (나) 구도의 내전이 발발했다. 


"중졸이 어디 가서 밥이나 벌어먹고 살겠니? 앞으로 뭘 어떻게 하고 살 거니? 계획이라도 있니?"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노무현 대통령도 고졸인데 대통령 했습니다. 중졸이 살아가기엔 힘든 사회인 건 맞지만 졸업장을 따며 시간을 허비할 바엔 중졸로 앞길을 개척해나가면서 제가 관심 있는 분야가 생기면 그 길을 파고 저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러니까 뭘 해 먹고 살 거냐고, 지금 당장 할 거 있니? 학교라도 가. 뭘 하던 적어도 졸업장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게 없다고 해서 졸업장을 따기 위해 무작정 학교에 들어가 3년을 허비하며 공부를 하는 건 시간을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제 인생은 제가 책임져야 함을 잘 알고 있고, 부지런히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고 개척 해나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그 뒤로 "중학교만 나와서 뭐 해 먹고 살 거냐", "학교를 안 가면 내일부턴 뭐 할 거냐", "그러려면 학교나 가라" 등의 대사를 무한반복으로 청취하며 기-승-전-학교 스킬에 속수무책으로 세뇌당했고, 거기에다가 친형까지 엄마 편에 가세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졌다.... 하지만 죽어도 학교만큼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그만 좀 해요. 하면 되죠, 예? 그 대신 고등학교 졸업장 따면 내가 뭘 하든 내가 결정할 거예요. 그건 약속해요."

"그래 알겠어."


결국 끝까지 버티다가 고졸만 하면 노터치 하겠단 고졸 협정을 맺고 고졸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됐다.



참혹한 내전의 결과

협정을 맺긴 했으나... 왠지 모를 찜찜함에 기분이 묘했다.

왠지 모르게 하루아침에 패전국으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 

왠지 모르게 조선시대 천민으로 신분 하락한 듯한 느낌...... 

왠지 모르게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처럼... 

노예가 아닌데 노예처럼 얽매여버린 듯한 느낌...


순식간에 나에게 고졸 검정고시란, 듣도 보도 못한 시험에서 자유를 위한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버렸다. 공부를 하기 위해 첩첩산중 시골에 있는 집으로 셀프 유배를 가서 자취를 하면서 노트북으로 인강을 들으며 했는데, 누구의 터치도 안 받으며 산다는 점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3개월이란 시간이 흘렀고... 1년에 2번밖에 없는 고시 중 첫 일정인 4월 시험이 다가왔다. 사실 그다음 시험인 8월에 보려고 했는데 시험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한 번 보기 위해 한 번 쳐보자는 식으로 4월에 지원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운 좋게 86점이 나오는 바람에 18살 4월에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했다. 이제 진정한 자유시민의 신분이 된 것이었다. 부모님도, 형도 더 이상 내가 뭘 하던 신경 쓰지 않기로 했으니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었다.


학교 건축 계획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막노동으로 여행경비를 마련하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후원금이 들어오는 계좌는 따로 개설하여 2달 정도에 한 번씩 100%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했고, 그분이 몸담고 있는 NGO 측 관계자들과의 대화 끝에 NGO 측에 2000만 원의 기금을 조성해서 전달하면 단체 측에선 에티오피아에 5칸짜리 학교를 짓고 교육까지 담당해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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