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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Jan 20. 2020

23336km 회고록

정리의 장


폐에 달라붙은 타르처럼 뇌의 깊숙한 심연에 잠식한 한 마디. '포기하지 말자.' 


편의점에서 담배를 구입하려면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듯, 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은 합법적으로 막일을 뛰기 위해 꼭 필요한 증이다. 2015년. 18살에 민증이 딱 나오자마자 기초안전보건교육이수증을 취득했다. 이수증을 발급받자마자 인력소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탄광에서 시커먼 탄 가루를 얼굴에 뒤집어쓰면서 삽질을 하고, 모텔 파이프 철거현장에서 스파이더맨처럼 안전장비 없이 파이프를 타고 건물 5층 이상을 올라가서 파이프를 철거하고, 아파트 건축현장, 발전소 등 여러 작업장에서 노동을 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이른 저녁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끝마치고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여행은 어떻게 다닐지, 잠은 어떻게 잘 지, 건축비 모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웠다. 총 거리 23336km에 달하는 계획이었다. 23336km라는 키로수는 내가 원해서 의미 있게 지정한 키로수는 아니었다. 그저 전국에 모든 관광명소를 다녀오려고 내비게이션 파일을 17개의 파일로 분할하여 제작하고 거리를 합산해보니 23336km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해봐야 400km밖에 안 되는데, 2만 3천 km라니.. '무리한 계획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먼저 했어야 했지만 '어떻게 하면 2만 3천 km를 다녀올 수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뛰고 피가 철철 끓었다. 학교 건축 모금을 위해서는 우선 '아프리카에 학교 짓는 18살의 자전거 전국일주'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영상과 홍보 이미지를 만들었고, 페이스북 페이지 광고에 몇십만 원을 들여서 학교를 지을 거라는 계획과 홍보물들을 사람들에게 공유했다. 후원을 하면 자금이 어느 단체를 통해서 어떻게 사용될지, 후원을 하면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도 설명했고, 400만 원을 들여서 우체국 전자우편서비스를 이용해 전국 각지에 있는 1만 개의 교회에 후원요청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행자 명함도 팠다.


출발일자가 다가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다만 장거리 여행은 요령이 없어서 언젠가 필요하겠지 싶은 것들까지 모두 챙겼다. 냄비를 사이즈별로 챙기고, 고무줄도 한 움큼 챙겼다. 그것 외에도 사용하지 않는 지퍼백이나 입지도 않을 옷가지들, 잡다한 물건들 또한 잔뜩 챙겼다. 그렇다. 나의 체력에 대한 무한신뢰, 혹은 자만을 한 나머지 여행 중 무엇인가가 없어서 불편한 상황만을 고려하고, 나의 체력은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9개나 되는 가방들에 잡다한 짐들이 빈틈없이 들어찼고, 결국 짐 무게는 40kg을 넘겼다.


그렇게 2015년 7월 27일, 여행 출발 당일이 되었다. 1만 개의 교회에 보냈던 후원요청은 깜깜무소식이었고, 10원 한 장의 후원도 들어오지 않았다. 페이스북에도 반응이 어느 정도 있었으나 후원이 아닌 응원뿐이었다. 그렇게 폭염이 전 국토를 뒤덮은 날, 알거지로 집을 떠났다. 첫날부터 엉덩이에 맺힌 땀이 미끄럼틀을 타듯 떨어지는데 탈수 증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제대로 먹질 못하니 며칠 만에 탈진해서 물기가 쪽 빠진 반건조 오징어가 됐다. 어마어마한 짐 무게 때문에 페달을 굴리는 허벅지는 터질 것만 같았고, 브레이크를 잡을 때마다 과마모가 일어나서 타이어 스레드가 몇 달만에 내부 철사가 보일 정도로 닳아버렸다. 더 이상은 이 짐을 싣고 못 가겠단 생각에, 중간중간 필요 없는 짐들을 택배 포장해서 집으로 보내기 시작했고, 무거운 장비들은 가벼운 장비들로 대체하는 등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거듭하면서 나에게 맞는 장비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좌충우돌로 여행을 시작해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들을 많이 쌓았다. 포항 쪽에 있는 산에 아무런 장비 없이 산에 올랐다가 산 중턱에 딱 고립돼서 짐승처럼 산비탈에서 잠을 자면서 산모기한테 수백 방을 뜯기고 벌집이 된 채로 돌아온 일도 있었고, 배가 고파서 절에 가서 동냥을 했는데 여스님에게 라면을 얻어먹고 10만 원이나 되는 건축비를 후원받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여행 한 달 차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가기도 했다. 피시방에서 2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대사를 작성하고 뜯어고치는 걸 반복해서 KBS 한민족 네트워크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에 쫄딱 젖어서 생쥐꼴로 다니다가 교회에서 잠을 잔 일도 있었다. 그 날 저녁, 예배 후 광고시간에 의도치 않게 아프리카에 학교를 지을 청년으로 소개를 받았고, 몇 명의 신자들로부터 4만 원의 후원을 받았다. 여행 초반엔 짐 무게와 몸무게를 합하면 100kg이 넘었는데, 그 때문에 타이어가 자주 펑크 나서 펑크수리를 많이 한 것도 하나의 추억이다. 그 외에도 시장에서 산 고등어를 회 썰어 먹다가 식중독에 걸린 적도 있었고, 한라산에서 고라니, 사슴들과 뛰놀며 4박 5일간 비박을 한 적도 있었고, 수중에 있는 경비를 전부 지역아동센터에 전달하고 무전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고, 감자튀김을 해 먹으려다가 다리에 화상을 입어서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한 달 넘게 입원한 적도 있었고, 페이스북 팔로워를 직접 만나서 학교 건축비 모금을 하는 일도 있었다. 


겨울엔 장거리 자전거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서 뼛속까지 시린 날씨에 된통 당하기만 했다. 경험이 없어서 잠자리를 어떻게 세팅해야 하는지 몰랐고, 어떻게 옷의 레이어링을 구성해서 땀 배출과 체온조절을 해야 하는지, 눈이 왔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래서 매일 밤은 나에게 고통이자 학습의 시간이었다. 그저 R-value가 뛰어난 에어매트리스에 겨울용 침낭, 핫팩 두어 개면 충분했을 것을, 그걸 몰라서 텐트 문을 열어놓고 가스불을 켜놓고 잠을 자거나 유단포를 데워서 끌어안고 잤다. 바닥엔 뭘 깔아야 냉기를 차단할 수 있는지를 몰라서 가방이나 옷가지를 바닥에 널브러뜨려놓고 잤는데 그렇게 해도 냉기를 차단하지 못해서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옆으로 돌아누워서 잠을 잤거나, 밖에서 마른풀들을 잔뜩 뜯어와서 깔고 잤다.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 친 것이었다. 정말 춥고 긴 시간들이었고, 생존본능이 날짐승급으로 상승했으며, 결국 살아남았다. 


여행 중 해결해야 할 문제는 추위뿐이 아니었다. 경비 문제가 있었다. 여행을 다니다가 경비가 떨어졌을 땐 주로 그 지역의 고시원이나 원룸을 얻어서 생활했고 동네 인력소에서 막노동을 통해 경비를 마련했는데, 막일을 했던 이유는 단기간에 목돈을 마련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일 밭에 가서 과일을 따기도 하고, 건물 철거현장이나 아파트 건축현장, 청소현장, 조선소 등 많은 일자리에 투입되었고 힘겹게 돈을 모았다. 이렇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막일과 페달질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했다. 마치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끊임없이 페달질을 해야 하듯 말이다. 마치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시계처럼, 잠들기 싫은 밤과 일어나기 싫은 아침의 무한반복이었다. 하루가 머다 하고 바쁜 나날들이었고, 고단한 인생이었다. 그것 외에도 신경 쓸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날씨, 체력, 위생, 식단, 질병, 배설, 교통, 프로젝트, 정비 등.. 잘 가다가 뭐 하나라도 삐끗한다면 시간이 상당히 많이 지체됐다. 예를 들어 잘 가고 있었는데 휴대폰이 침수되어서 휴대폰을 고쳐야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라다던가, 식중독에 걸려서 하루 종일 변기통에 앉아있는 상황, 경비가 떨어져서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는 상황 말이다.


결국 100일 계획의 여행은 500일, 600일로 점점 늘어났고, SNS를 통해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던 사람들은 지쳤고, 팔로우를 취소했다. 수많은 요인들이 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2천만 원을 목표로 했던 건축비 모금은 2년이 지나도 절반이 채 모이지 못했다. 뭔가 바로 이룰 듯해 보였고 거창해 보였으나 결국엔 아무것도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 기금을 마련하는 것. 그걸 하나 이루는데 왜 이리 힘이 드는 건지, 뭔가 더 개선할 수 있는 방향도 떠오르지 않았고, 온기 없고 햇살 없는 어둠 속에서 쥐덫에 갇힌 것 같이 답답하기만 했다. 상황은 가면 갈수록 암울해졌다. 힘든 것, 추운 것, 찝찝한 것, 아픈 것, 피곤한 것. 모두 견딜 수 있었지만 17살부터 꿈꿔온 꿈을 20살이 넘도록 이루지 못한 무능력한 자화상을 생각하는 건 언젠가부터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되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아름다운 경치에 즐거워하면서도 밤이 되면 부정적인 생각이 뇌를 지배했고, 불면증과 조울증에 걸렸다. 아침까지도 잠이 안 오는 상황이라 수면유도제를 계속해서 복용했고, 약의 힘으로 겨우 잠에 드는 게 일상이 됐다. 군발성 두통이 생겼는데 주기적으로 누군가 뇌 주름을 꼬집는 것만 같은 통증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점점 볼품없어지는 내 모습은 날 초라하게 만들었고, 초라해진 난 나를 점점 더 볼품없는 모습으로 만들어갔다. 아 내가 정말 나락으로 떨어졌구나 생각이 든 때는 이 때다. 햄버거를 사 먹으러 한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을 때인데 주문할 때 말을 심하게 더듬으면서 식은땀을 흘렸고, 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에 공포감까지 들었던 순간이었다. 공황장애가 일시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잠시뿐일 거라 생각했던 그 현상은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반복되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말을 더듬었다. 어디서 어떻게 꼬였기에 내가 말을 못 할 정도로 위축된 건지, 문제의 본질은 뭔지 그제야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처음엔 힘이 들어도 참 즐겁다고 느꼈다. 드디어 준비한 것의 결과를 수확하는 시간이구나 생각하며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후원금을 모으려고 했고, 시ㆍ군 단위까지 빠짐없이 꼼꼼하게 여행을 다니며 예쁜 명소를 배경으로 후원자들의 이름을 하얀 종이에 적어서 사진을 찍고 SNS에 부지런히 업로드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여행, 모금 모두, 멀리서 보면 뭔가 좀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만큼 치밀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준비하지 못했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환상 속에서 눈이 먼 채로 달려오기만 했다. 현실적이지 못했다는 것, 그게 첫 번째 문제였다. 현실적이지 못한 계획으로 달리다 보니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그만 기력이 빠지고, 기력이 빠지니 우울해지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니 끝내 말을 더듬는 등의 증상까지 번진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각종 유혹과 늪에 쉽게 빠지는데, 자신의 삶이 한없이 보잘것없어 보이기에, 삶에 강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이 올바르게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특정 집단에 소속되거나 특정 어젠다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뭐라도 아는 체를 하기 위해 남들이 외치는 목소리 속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쉽게 가지는 것이다. 이는 공공의 이익과 선을 실천한다는 이른바 '집단'의 어젠다에 혹하여 그걸 널리 퍼뜨리는 과정 속에서, 마치 자신이 세상에 매우 위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은 것 같다는 위안을 얻기가 참 쉬운 방법이다. 환경운동가 툰베리처럼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 정돈되지 못한 상태에서 대의를 부르짖기 시작하면 결국 자신의 삶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집단 혹은 특정 사상을 위해 존재하는 부속품으로만 존재한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서워진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나로서 먼저 존재하지 못한다면 특정 사상으로선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 사실 여행을 떠나온 계기를 되짚어보면 17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분명한 꿈도 없었고, 가슴 뛰는 일도 없었다. 나이를 한 해씩 먹을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에 깊은 한숨뿐이었다. 그렇게 난 왜 사나?라는 기본적인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고,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오감을 만족시키며 얻는 동물적 쾌락보단 힘들더라도 '세상에 이롭고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딱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난 그 대의를 직접 실현시키고자 아프리카에 학교를 선물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첫 단추부터 참 잘못 끼웠다. 그 뒤로 누군가 꿈을 물어볼 때마다 어딘가 필요한 곳에 학교를 선물할 거하고 말을 하고 다녔다. 반복행위는 계속해서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인지 규정지었고, 점점 내가 뭔가 세상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18살의 나이에 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대의를 핑계 삼아 세상을 위해 이 한 몸 멋지게 불사르려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해서 규정해나가다 보니 일종의 세뇌 효과가 생겼다. 슈퍼맨 신드롬에 빠진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학교 짓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현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가장 가치 있었고 행복한 일이었지만, 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고, 나의 진정한 욕망은 무엇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 과연 학교를 짓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3년 가까이 방랑하는 것이 정말 맞는 일인지 알지 못했다. 삶의 의미와 자아를 찾고 정돈된 삶을 살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했어야 했는데, 어린 나이에 짧은 생각으로, 각종 국제사회문제의 앞잡이가 된 청소년들처럼 붕 뜬 꿈에 먼저 집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못 해서 식은땀을 흘리는 벙어리가 된 것이었다. 


허탈해진 나머지, 여행 도중이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알바나 막일로 건축비를 모으고 학교를 지을까?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프로젝트 이름부터 '아프리카에 학교 짓는 18살의 자전거 전국일주'였으니, 자전거에서 하차해서 중간에 돌아온다는 건 사람들에게도 나에게도 뒤가 구린 모양새여서 그렇게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여행의 방향성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우선 23336km가 다 찰 때까지 모금은 그대로 하되, 여행 중 최우선 과제를 모금으로 두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모자란 학교 건축비는 여행이 끝난 뒤에 막일을 뛰어서 채우기로 했다. 그리고 당장은 여행을 다니는 것, 그리고 멘탈을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 뒤로도 계속 여행을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라진 점이 생겼다고 한다라면 사람들이 팔로우를 취소해도, 관심을 갖지 않아도 그것으로 나 스스로를 평가하고 낮추지 않았고,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나 자신이 더 강력하고 힘 있게 느껴졌다. 훨씬 남성적으로 변했고, 무엇보다 당당해졌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결국 2015년 7월 27일에 출발한 여행, 23336km를 다 채우고 2017년 11월 1일이 되어서 828일 만에 무사히 집으로 복귀했다. 적어도 전국 여행과 학교 건축이라는 2가지의 목표 중 하나는 이룬 셈이었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 자신감이 더 생겼고, 변한 내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집을 쳐다보니 집은 여전했고, 엄마도, 아빠도, 동네도 여전했다. 시내에 나가보니 가게 몇 개가 망하고 몇 개가 생긴 정도였다. 다 똑같았다. 그렇게 긴 긴 세월을 보냈는데 여긴 변한 게 이렇게도 없다니.. 나는 2년 반이라는 세월이 아니라 25년을 보내고 온 것 같았는데. 참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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