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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Dec 28. 2019

한국의 갈라파고스에서.

푸른 하늘, 붉은 노을


굴업도[掘業島]

나름 등산가방 좀 메어 보고, 땅에 등산스틱 좀 찔러봤다는 국내 백패커들이라면 다 아는 '국내 백패킹 3대 성지'가 있다. 바로 간월재 / 비양도 / 굴업도가 그 주인공들이다. 혹자들은 간월재 대신 선자령을 넣어서 선자령 / 비양도 / 굴업도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백패커들끼리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몇 년째 교통정리가 안 되었기에 전자와 후자 중 어느 것이 진짜 3대 백패킹 성지 안에 포함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다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우기고 싶은 대로 우길뿐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굴업도는 3대 성지에 무조건 포함되는 곳이다. 그 이유인즉슨 굴업도의 경관을 본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순위 안에 집어넣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굴업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굴업리에 위치해있고, 덕적도 남서쪽에 위치해있는 섬인데, "지형이 오리가 수면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같이 생겼다"하여 굽힐 굴(屈) 자에 오리 압(鴨) 자로 '굴압도(屈鴨島)'라고 이름이 붙었다가 1914년에 굴업도로 이름이 최종적으로 지어진 섬이다. 굴업도는 섬의 일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고시되기도 했고, 파도와 소금기가 만들어낸 해안지형이 섬 전체에 걸쳐 병풍을 치고 있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 웅장함에 팬티가 촉촉이 젖어든다. 방목 중인 염소와 사슴을 비롯하여 천연기념물인 동물들까지 살고 있으니 한국의 갈라파고스라고 붙은 별명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백패커들에게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맑은 공기 탓에 별들이 잘 보여서 별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이곳에 가지 않고선 도무지 여행을 마무리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인천을 지나면서 인천항을 통해서 굴업도로 떠났다. 배편을 찾아보니 굴업도까지는 한 번에 들어가는 배가 없었다. 제일 빠른 항로가 인천항에서 덕적도를 경유하여 굴업도로 가는 항로였다. 그래서 새벽부터 부랴부랴 준비해서 아침 배에 몸을 싣고 덕적도를 경유해서 굴업도로 가는 배에 뛰어올랐다. 선미 갑판에 우두커니 서있으니 배와 부딪히며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던지, 햇빛이 녹아있는 바다의 모습은 어찌 그리도 눈부시던지, 바다내음은 왜 이리도 신선한 건지. 한참 동안 밖에서 서성이며 신선한 바다 냄새를 음미하다가 한참 뒤에야 선실로 들어갔다. 



앵무 앵무

선실엔 앵무새를 손에 올려놓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다. 앵무새가 귀여워서 말을 걸었더니 자신을 '섬 아주머니'로 소개한 그분은 들고 있는 앵무새가 40만 원짜리 앵무새이고, 시장에서 사 왔다고 했다. 허락을 받고 내 손가락에 잠시 걸터앉게 할 수 있었는데, 앵무새는 검지 손가락 위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몸을 위아래로 흔들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몸동작이 얼마나 앙증맞던지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주머니는 옆에서 섬 생활을 하다 보면 육지랑 사람이 그리워서 이런 걸로라도 달래는 거라며, 집에 닭도 있는데 그것도 외로워서 기르는 거라며 앵무새를 향해 사랑스러운 눈으로 하트 빔을 쏘면서 소심한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그래. 섬에 있으면 이런 걸로라도 외로움을 달래셔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다가 앵무새를 손에서 손으로 옮겨서 돌려드렸다. 앵무새는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다리를 쭉 뻗어 아주머니 손으로 올라탔고, 다시 리듬을 타며 즐거워했다.



진입

조금 있으면 섬에 도착하니 선실에서 나와서 갑판으로 이동하라는 안내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등산가방을 들쳐 메고 계단을 내려갔다. 가방에 달린 수통, 나이프 따위의 잡다한 액세서리들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두들 후다다 내려가서 배 앞머리에 몰렸다. 다들 빨리 내리고 싶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갑판 위에서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눴다. 나는 자물쇠로 묶어놓은 자전거를 풀어서 양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로 가만히 대기했다. 잠시 후, 저기 멀리 굴업도의 형체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우와~~" 다들 눈이 튀어나오도록 뜨고는 연신 환호성을 질러댔다. 람들은 설레는 마음을 토로했다. 섬에 도착하면 어디부터 갈지, 밤에 텐트를 쳐놓고 술파티를 할 때 어떤 음식을 누가 만들어 줄지 등, 신이 나서 방방 뛰며 이야기를 나눴다. 옆에서 듣다 보니 시장판에 온 것처럼 듣는 재미가 있었다. 배는 금세 항구에 접안했고, 섬에 도착한 사람들은 신이 난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배에서 내렸다. 굴업도 여행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은 우리가 타고 온 배에 탔고, 배는 곧바로 떠났다. 선박 뒤에 생긴 물보라도 금세 사라졌다. 



여유

항구엔 하얀 트럭 두 대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구에 도착한 사람들을 픽업해주려고 민박 사장님들이 포터를 끌고 나오신 것이었다. 궁금해서 여쭤보니 섬에 온 사람들이라면 민박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누구나 다 이용할 수 있고, 짐 같은 경우 필요에 따라 짐만 싣는 경운기가 따로 마중 나올 때도 있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일사불란하게 마을분들 차량을 얻어 타고 곧바로 마을로 진입했다. 난 트럭에 자전거를 실었다 내리기도 뭐하고 그럴 바엔 천천히 섬 구경을 하는 게 낫지 싶어서 따로 이동하기로 했다. 우선 트럭을 보내고 부두 주변 연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치킨이 왔을 때 박스 포장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냄새를 들이키며 마음의 준비를 하듯, 바다의 신선한 냄새를 콧소리가 나게 들이마셨다. 앉아서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다 보니 참 많은 것들이 보였다. 갈매기들이 먹이를 물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모습, 수제선에서 파도가 부서져 맥주 거품을 내는 모습, 모세의 기적처럼 기이하게 형성된 연육 사빈(聯陸沙濱)의 모습 등..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잠시 숨을 고른 후 항구에서 자전거로 10분쯤 걸려서 마을에 도착하니 빙 둘러친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었고, 마을 앞엔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세(地勢)가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접하여서 음과 양의 기운이 하나 되는, 배산임수 명당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것이었다. 굴업도 마을은 1920년대 초까지 마을과 앞바다에 민어 파시가 형성되면서 어부들 천여 명과 매춘부, 잡화상과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들 등, 총 4~5천 명이 모여들어서 불야성을 이뤘고, 잘 나가던 전성기 때엔 100가구 이상이 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에 민어 어장이 사라져서 시장이 붕괴되고, 1980년대부턴 일자리를 구하거나 자녀양육을 위해서 바다 건너 내륙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면서 인구수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급감했는데, 현재 남아있는 가구는 고작 열 가구 정도밖에 안 된다. 그마저도 극심한 고령화로 인해 노인인구비율이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다들 이 섬에서 어떻게 먹고 사시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들의 삶

이곳 주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일거리들을 수입원으로 삼는다. 첫 번째는 농업으로, 산비탈을 개간하여 3.1ha 면적의 다랭이밭에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토양이 세사토(細沙土)로 구성되어 있어서 주로 모래가 많아도 잘 자라는 땅콩이나 보리, 고구마를 재배한다. 야생 더덕을 캐서 수익원으로 삼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어업으로, 마을 앞바다에서 김이나 굴을 채취해서 판매하거나 굴업도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서 수익을 올린다. 세 번째는 목축업으로, 방목해서 기르는 흑염소가 약으로 좋다고 하여 섬에 흑염소를 풀어놓고 목축을 하여 수입원으로 삼는다. 네 번째는 민박이나 식당 혹은 매점인데, 이는 최근 들어 굴업도를 관광 목적으로 찾는 백패커들이 급증하면서 생긴 것으로, 전체 가구 열 가구 중 여섯 가구 정도가 민박과 식당, 매점을 운영하면서 꽤나 쏠쏠한 수익을 올린다. 백패커들은 숙식을 편하게 해결할 수 있으니 좋고, 주민들은 고된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가재까지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청년층이 사라지고 고령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마른하늘에 단비가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민박 같은 경우 정현 민박(032-819-2554), 고씨네 민박(032-832-2820), 이장 민박(032-832-7100), 장 할머니 민박(032-831-7833), 숙이네 펜션(010-3134-3848) 굴업도 민박(032-832-7100) 이 있는데, 숙박료는 주중/주말 구분 없이 5만 원이다. 식사비는 백반 기준 7~8천 원 선이고 마을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들과 굴업도 앞바다에서 건진 해산물들로 만든 음식들이 상에 올라온다. 맛도 훌륭하고, 구성 대비 매우 저렴하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숙박은 하지 않고 식사만 할 수도 있으니 여행객의 입장에선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단, 예약은 필수다.)


이렇게 작은 섬의 주민들이 숙박업으로도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된 이유는 두 가지쯤이 있다. 첫 번째로는 핵폐기장 건립 논란이다. 1994년, 정부는 핵폐기물 처리시설을 건립하기 위해 약 300개의 지역에 관리시설 터를 찾아다니며 후보지를 선정했다. 후보지는 10개로 추려지게 되었고, 그중 한 곳이 굴업도였다. 이후 많은 전문가들이 지형이나 지질, 인구밀도 등 굴업도의 여러 요소들을 고려했으나, 이곳만큼 인구가 없고 도심지에서 동떨어진 곳이 없어서 1995년에 핵폐기물 처리장 건립 예정지로 낙찰 및 고시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인천지역 사람들이 매우 극심하게 반대했고 그 여파로 정부 측에서 굴업도 지질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재조사 결과 활성단층을 새롭게 식별하면서 안전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정부는 1995년 11월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립을 완전히 취소해야 했다. 당시 굴업도는 이 논란으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톡톡히 받게 되었고, 이 섬이 어떤 섬인지 궁금해졌던 사람들은 배낭을 들쳐 매고 하나 둘 이 섬으로 여행을 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 논란은 cj그룹의 관광지 개발 문제다. 굴업도 땅의 98~99%를 소유하고 있는 CJ그룹 C&I레저산업은 2006년에 섬 전체에 오션파크를 조성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말이 좋아 조성이지 국내 유인도들 중 자연 그대로가 가장 보존이 잘 된 굴업도의 자연을 마구잡이로 훼손하여 골프장과 해양리조트 등을 갖춘 대규모 리조트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 섬은 한 차례 더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CJ 측은 감당하기 힘든 반대와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CJ: 이제 개발 좀 시작해볼까!

환경단체: 야 거기 희귀 동물 5종 살아서 안 됨ㅇㅇ

CJ: 아... 그래도 제가 인천시한테 이 땅 산 건데요..

캠핑족들: 우리가 텐트칠 자리도 없어지겠네? 절대 하지 마라~

CJ: 아뇨 이건 저희가 구입한 섬인ㄷ....

지나가던 국밥러: 야 멀쩡한 섬을 왜 깎냐? 그 돈으로 뜨끈~한 국밥 든든~하게 사 먹지

CJ: (부들부들..)


-3년 뒤 2009년-


굴업도: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굴업도가 대상 수상했어요 뿌우 ~~

CJ: ??? 뭐야 갑자기

굴업도: 꼭 지켜야 할 자연유산 환경부장관상도 받았어요 뿌우~~ 

CJ: ???????????? 아니 이건 또 왜 받았는데..

굴업도: 굴업도 부속섬인 토끼섬의 '해식 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되었어요 뿌우~~

환경단체: 이래도 개발을 하겠다고? 너어어어희는 진짜... 이건 좀 아니지 않냐?

CJ: 아니 진짜 제발 형님들 나한테 왜 그래....


이렇게 CJ의 야심 찼던 계획은 당시엔 사실상 무산되었고 지금은 몇 년째 보류 상태이다. 깊은 내막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 논란을 통해서 관광객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났고, 이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고 또 회자되어서 아직 안 와본 사람들에겐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갔다 와보자'라는 애타는 마음을 가지도록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굴업도 마을 앞엔..

굴업도 마을 앞엔 큰말 해수욕장이 길게 뻗어있었다. 주위에는 울창한 솔숲이 형성되어있고 샤워장, 화장실, 급수대 같은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응급환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헬기장까지 갖추었으니, 해수욕이나 캠핑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큰말해변은 수심이 매우 얕아서 간조 때 바닷물이 빠지면 엄청 먼 곳까지 걸어 나갈 수 있는데, 쭉 걸어보니 해수욕장의 모래가 너무 부드러워서 마치 밀가루를 꾹꾹 밟는 느낌이었다. 밀가루 같은 질감의 바다를 산책하면서 갈매기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갈매기들은 푸드덕 소리와 함께 소굴업도로 날아갔고, 그 아래 푸른 바다는 찬란한 햇빛으로 옷 입고 아름답게 철썩였다.



컵라면

마을 바로 옆, 굴업도 해변엔 매점이 있었다. 작은 컨테이너로 만든 매점인데 취급하는 품목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라면과 생수 2L짜리 한 병, 처음처럼 소주 1병을 구입했고, 배가 고팠던 나머지 사장님께 육개장 사발면을 하나 끓여달라고 부탁드렸다. 사장님은 싱긋 웃으시더니 곧바로 준비에 들어가셨다. 이 날, 햇살은 미친 듯이 뜨거웠다. 가뜩이나 뜨거운 뙤약볕에 자전거를 타고 와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기운이 쭉 빠져서 매점 앞 파라솔 의자에 털썩 앉았고, 테이블에 양 팔을 던지듯이 철퍼덕 엎드렸다. 고온다습한 날이라 그늘에 있어도 옷 안에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힘이 쭉 빠져서 팔을 옆으로 베고 엎드려서 회복자세를 취했고, 테이블에 뉘인 목 때문에 90도가 돌려진 시선으로 매점 안에서 분주하게 준비하시는 사장님의 모습을 지켜봤다. 사장님은 에어컨도 없는 컨테이너에서 열과 성의를 다해서 라면을 끓이고 계셨다. 뚜껑을 따는 절제된 손놀림, 수프를 흔들어서 뜯는 치밀함, 적당한 물 온도와 적절한 수위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잠시 뒤엔 라면을 끓이다가 더우셨는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셨고, 면이 다 익은 후엔 파라솔로 와서 서빙을 해주셨다. 사이드디쉬로 단무지를 제공해주셨고, 프랑스 집사 수준의 매너를 갖추신 채로 메뉴를 설명해주셨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이건 말레이시아산 팜유와, 독일산 감자전분으로 만든 면에 비프 양념 분말과 마늘 추출물 분말로 간을 한 육개장 컵라면이고, 사이드 메뉴는 안심하고 드실 수 있는 국내산 단무지 세 점입니다." 

"요시, 그럼 바로 한 젓갈. (후루룩.) 잠깐, 이 맛은 대체??"

"스미마세..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신 걸까나..?"

"아니. 와타시, 이렇게 맛있는 라면은 생전 처음이라."

"그렇게 호평을 해준다면... 기분 좋아서 퇴근해버렷~~"


키야!! 얼큰~한 국물에 40년 수타 면발 장인이 뽑아낸듯한 면발이탈리아 피클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국내산 단무지까지. 여긴 『진짜』였다. 매점 안에서 창문가로 팔을 걸치고 나를 지켜보시던 사장님께 컵라면 컵을 들며 눈인사로 감사의 인사를 표하자, 사장님은 영국 신사처럼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시며 답례를 하셨다. 



굴업도 정찰

허기도 달랬겠다, 이제 슬슬 섬을 둘러보고 싶었다. 시간이 그리 많진 않지만 길게 펼쳐진 목기미 해변과 몇 개의 험난한 언덕을 넘어야 오를 수 있는 연평산에 빠르게 들렸다가 정 반대편에 위치한 낭개머리로 이동하기로 했다. 굳이 주렁주렁 짐을 달고 이동할 필요는 없었기에, 사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자전거에 부착된 짐들을 매점에 맡긴 후 최소한의 짐으로 출발했다. 사장님은 조심히 다녀오라는 당부의 말씀과 함께 손을 흔들어주셨다. 항구 쪽으로 나가면서 쓰레기 처리장 쪽에서 왼쪽 숲길로 빠지니 숲길이 나왔고, 미처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 쭉 깔려 있었다. 자갈이 군데군데 튀어나와 있었고, 군데군데 잡초가 무성히 올라와있었다. 그 길을 통과하려다가 타이어가 울퉁불퉁한 자갈을 밟을 때마다 핸들이 꺾여서 마치 서커스 곡예사가 평균대 위에서 곡예를 하듯 핸들을 민감하게 꺾으면서 중심을 잡으며 갔다. 숲이 끝나는 지점엔 목기미 해변 남서쪽에 위치하여 '목기미 연못'이라 명명된 사구습지와 모래언덕이 있었는데, 그 옆엔 모래바닥에서 성인 남성 두 사람이 앉아서 흙 찡구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궁금해서 지나가면서 뭘 찍냐고 물어봤다. 알고 보니 그 남성들은 곤충과 지질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곤충 사진과 지질학 연구를 위해 온 것이었다. 취미로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한 분야에 몰두하는 열정이 굉장히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더 대화를 나누려고 질문으로 굴업도에 어떤 게 특별해서 오셨는지 궁금하다고 여쭤봤다. 그러자 살짝 체구가 있으신 한 분께서 손가락으로 사구습지와 사구를 가리키시면서 설명을 해주셨다. 


사구습지란 모래에 습지대가 형성된 것을 말하는데, 굴업도 사구습지의 경우 1년 중 6개월 이상은 물이 말라 있으나 우기에 내린 비가 고여서 습지대가 형성되고 미꾸리 같은 어류가 서식한단다. 그리고 사구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미귀신이 많이 보인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곳활성사구 지표생물인 개미귀신이 서식하는데, 그 개체수가 타 지역 대비 월등히 높아서 굴업도가 개미귀신의 국내 최대 서식지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다고 한다. 개미지옥이 어떤 녀석인지도 알 수 있었다. 개미지옥은 명주잠자리가 성체가 되기 전 유충 때를 이야기하는데, 모래사장에서 깔때기 모양으로 구멍을 파놓고 기다리다가 개미나 잡다한 곤충들이 미끄러져서 깔때기의 아랫부분으로 떨어지면 잡아먹는단다. 미끄러진 곤충이 아랫부분으로 내려가다가 탈출하려고 하면 어딜 가~ 하면서 모래를 촵촵 뿌려서 미끄러지게 하여 어떻게든 잡아먹는다고 하니 무서운 자식들이 아닐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기한 이야기들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리고 시작이 조금 지나자 이젠 괜히 방해하는 것 같아서 대화를 끝내고 홀연히 나의 길을 떠나기로 했다. 다만 모래사장은 나의 앞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어비를 잘 맞혀서 멋지게 출발하고 싶었지만 얼마 안 가서 페달이 모래 안에서 헛돌아서 그 남성분들 옆에서 모래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그분들이 분명 넘어지는 소리를 들으셨을 것이 확실했기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자전거를 손으로 질질 끌면서 걸어갔다.



목기미 해변 연육사빈

굴업도는 본섬인 동섬과 부속섬인 서섬 사이에 600m 길이의 목기미 해변이 섬과 섬을 연결해주고 있어서 한 개의 섬으로 친다. 이 이어주는 구간은 육지와 육지를 이어준다 하여 ‘연육 사빈(聯陸沙濱)’이라고도 불린다. 굴업도의 목기미 해변 연육사빈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섬 연육사빈이다. 이곳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최대가 되는 '사리'때가 되면 1시간가량 물에 잠기기도 한다. 이런 신비의 바닷길인 목기미 해변가를 건너오면서 보니 진품명품에 보내면 최소 50만 원은 받을 법한 골동품들과 기타 생활쓰레기가 즐비했다. 목기미 해변은 굴업도에서 유일하게 쓰레기가 쌓인 곳인데, 어선에서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부표와 어구부터 해서 어망, 통발, 비닐, 술병 따위의 생활쓰레기도 엄청 많았다. 심지어 커다란 냉장고도 버려져 있었다. 이건 일반적인 해변가에서 볼 수 있는 양이 아니고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쓰레기라서 의문이 들었다. 이 많은 쓰레기들은 왜 이렇게 방치된 것일까? 그리고 왜 아직까지 치우지 않고 있는 것일까? 섬의 환경적 요인을 살펴보니 이유를 어림잡아 추측해볼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굴업도는 인구가 매우 적은 섬이었다. 어업으로 한창 잘 나가던 예전엔 많이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기껏 해봐야 아까 매점이 위치한 큰 말 해변 쪽에 열 개 정도의 가구들만 살고 있을 뿐이었다. 쓰레기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을 때 하나 둘 버렸겠지만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나서 섬엔 노동인구가 사라졌고 그마저도 고령화로 인해 치울 여력이 안 되는 노인들만 남아있으니 쓰레기를 치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랜 세월 방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었다. 다행히 수협중앙회가 2018년도에 해양정화활동으로 인천시와 옹진군 관계자, 인천 녹색연합, 민간 봉사단체 등 12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봉사활동으로 굴업도 목기미 해변에 와서 쓰레기 수거작업을 진행했고, 덕분에 쓰레기는 깨끗하게 없어졌다고 하니 참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아마 애덤 스미스도 살아있었으면 깨끗해진 목기미 해변을 보며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박수를 쳤을 것이 분명하다.


목기미 해변 끝자락에 가니 전봇대 두 개가 최상층부까지 모래에 잠겨있었다. 이 전봇대들은 1998년도에 세워진 것들인데, 바람에 날린 모래가 매년 연육 사빈의 사구를 형성하는 과정 중에 전봇대를 2m밖에 남기지 않고 모두 덮어버린 것이었다. 전봇대 옆에 서보니 아래로 겹겹이 깔린 모래의 퇴적량이 어느 정도일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의 사구는 현재 진행형으로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아마 10년쯤 뒤에 굴업도를 다시 찾는다면 이 전봇대는 모래에 완전히 묻혀서 사라진 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허

전봇대 뒤로 가니 집터와 폐허 등의 사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목기미 해변에 나란히 세워진 전봇대로 전기를 공급받으며 살았을 주민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곱 가구로 오순도순 살았다고는 하나, 오랜 옛날이야기이고 더 이상 사람의 인기척은 없었다. 전기를 사용할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전깃줄도 모두 끊어진 상태였고, 휑한 바람만 들락거리는 창고는 비상시 캠퍼들의 임시 쉘터로 사용되는 용도 외엔 쓸모가 없어 보였다. 이 폐허들의 부가적인 기능이 한 가지 있다라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면 시체들이 이정표가 되듯 안내판이 턱없이 부족한 굴업도에 이 폐건물들이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이 폐건물들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좌측으로 가면 연평산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덕물산이 나오기에 참고점으로 활용하거나 누군가에게 설명하기에 좋다고 느꼈다.


*참고로 연평산과 덕물산, 이 두 산들은 이 섬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를 가진 산들이다. 덕물산은 138.5m이고, 연평 산은 128.4m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매우 낮은 산들이지만, 이 섬에선 넘버원, 넘버 투로 양대산맥을 이룬다.



연평산으로 가는 길에서

폐허를 지나서 MTB로 이동할 수 있는 오솔길이 나왔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그런지 오솔길이 중간중간 끊겨 있었고, 바닥엔 자갈과 가시나무 등의 위험요소들이 간간히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10분쯤 올랐을까, 뒤를 돌아보니 아까 지나온 연육사빈이 축소되어 보였다. 가까이서 봤을 땐 그냥 해변가였는데 조금 떨어져서 보니 섬을 연결해주는 그 모습이 어안이 벙벙하도록 아름다웠다. 주민분들의 말씀대로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한 10분쯤 더 가니 해안가에 형성된 굴업도의 명물, 코끼리바위를 볼 수 있었다. 이 바위는 코끼리바위라는 이름에 충실하게 코끼리 한 마리가 해변가에서 물을 빨아먹고 있는 모습처럼 생겼다. 예전에는 가운데 구멍이 작아서 ‘홍예문’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강한 파도와 소금 바람의 침식작용으로 가운데 구멍이 점점 커지면서 코끼리를 닮아버렸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끼리바위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코끼리바위에서 연평산 쪽으로 계속 가다가 숨이 차오를 때쯤, 또다시 뒤를 돌아보니 다랭이밭이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밭은 땅콩을 수확하기 위해서 오래전 산에 나무를 베고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것인데, 요즘엔 사용하지 않는지 풀로 뒤덮인 상태였다.



무아지경(無我之境)

뒤를 돌아볼 때마다 색다른 경치를 선사해준 연평산은 낙타의 등처럼 2~3개의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중 마지막 내리막이었던 돌계단은 경사가 매우 심해서 자전거를 끌고 갈 수 없었고, 자전거를 계단 시작하는 부분의 소사나무 군락지에 숨겨놓고 도보로 이동했다. 헛... 둘... 헛.... 둘.. 어느덧 무릎 관절이 빠개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고 계단을 다 내려오니 이젠 토쏠리는 마지막 오르막이 기다렸다. 하..... 마지막 20m는 수직 경사에 가까운 절벽이었다. 날이 더워서 목이 타고 쓰러질 것만 같은데 고작 해발 130미터의 산을 로프까지 타고 올라가야 한다니... 너무나도 만만하게 봐서인지 로프 길에선 정신적으로 힘이 들었다. 결국 낑낑대면서 로프를 잡고 오르기 시작하여 마지막 부분을 힘겹게 통과했고, 토탈 1시간 반 정도쯤만에 해발 130미터의 연평산에 올랐다. 정상에 서보니 예상치도 못했던 이국적인 풍경에 굉장히 놀랐다. 이곳은 정신이 한 곳에 빠져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경지를 가리키는 '무아지경'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어울리는 곳이었다. 혹자들은 이곳을 한국의 갈라파고스라고 부른다던데, 그 말 또한 굉장히 어울리는 곳이었다. 바람은 산등성이를 넘어서 지평선으로 잔잔히 흘렀고, 우직한 소사나무 숲의 나무들이 춤을 췄다. 사용하지 않는 닻이 몇 개 버려져있는 붉은 모래 해변부터 굴업도 너머로 보이는 덕적군도의 풍경까지.. 마치 영혼의 고향을 찾은 것마냥 포근하게 느껴졌다.

 


낭개머리로

해가 점점 지평선에 가까워짐을 느끼고는 서둘러 마을로 복귀했다. 이번엔 매점에 가서 자전거까지 맡기고 내일 찾아가기로 하고는, 아까 맡겼던 가방에서 캠핑에 필요한 짐들만 빼내어 개머리언덕을 향해 길을 떠났다. 매점 사장님은 다시 한번 즐거운 여행이 되라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큰 말 해변 오른쪽 끝엔 개머리 언덕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개머리 언덕은 굴업도에 온 사람이라면 꼭 가보는 언덕인데, 개의 주둥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게 큰 말 해변을 통해 개머리 언덕으로 올라가려고 했더니 입구 부분에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사유지이니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도 보였다. 이 아름다운 개머리 언덕으로 가는 길에 철망, 철문, 그리고 안내판이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 모든 것들은 굴업도 땅의 98.5%를 사들인 CJ가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것이었다. 지금은 CJ 측에서 개발을 보류하면서 시시비비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머리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에 관리인이 항시 배치되어서 개머리 언덕으로 오르려는 사람들을 불법침입자로 명명하고, 출입허가를 받기 위해선 카메라로 얼굴 사진을 찍고 종이에 이름을 적은 사람만이 출입이 허가되어 진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CJ는 그런 식으로라도 사람들에게 소유권을 강력히 인식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내가 갔을 당시엔 관리인도 없고, 관련된 논쟁도 없이 잠잠한 상태였다. 그래서 도보로 철망을 지나고 안내판을 지나서 개머리 언덕 능선에 도달했다. 능선에 올라서니 빼어난 자연경관에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CJ가 그런 액션을 취했던 것은 뭐라고 매도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정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무슨 강도처럼 우르르 몰려와서 굴업도를 강제로 빼앗은 것도 아니고,,, 인천시에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매입한 것이니 엄연히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섬을 부수던 태우던. 그것 또한 우리가 뭐라 할 바가 아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자 권리고, 같은 맥락으로 사람들이 개머리 언덕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들의 자유이자 권리행사이다. 더 냉정하게 따지고 본다면 개머리 초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누리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사유지를 무단으로 침입한 불법침입자가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이곳은 국내에 있는 수많은 유인도들 중에서 가장 환경보전이 잘 된 곳이다. 그리고 큰 말 해변과 소굴업도가 내려다보이는 개머리 언덕의 초원은 20년쯤 전에 굴업도 주민들이 소와 염소를 방목할 목적으로 나무를 베어내어 초지를 만든 것이다. 방목이 중단된 뒤로는 아름다운 들풀이나 들꽃이 여행객을 맞이하며 기쁨을 주는 기쁨의 언덕으로 구실을 하고 있다. 얼마나 예뻤으면 국내 모든 백패커들이 이곳을 '성지(sacred place)'라고 부를까. 그런데 이런 국내 최고의 경관을 훼손하면서 단순히 골프를 치는 곳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하.. 허탈한 웃음에 씀바귀를 입에 한 움큼 넣고 씹는 것 같은 씁쓸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된 걸 뭐 어쩌겠나 싶어서, 나중이라도 CJ에서 굴업도 개발 의사를 밝힌다면 그땐 이 아름다운 섬은 더 이상 내가 아는 섬이 아니게 될 게 뻔하기에,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몇 번이라도 더 다녀가며 아쉬움을 달래자며 생각을 마쳤다.



수크령 군락지

개머리 언덕 방향을 멀리서 봤을 땐 억새가 있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수크령 군락지였다. 수크령은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강아지풀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지만 사이즈는 훨씬 큰 녀석이다. 사람으로 치면 일반 남자와 최홍만의 차이라고나 할까. 수크령으로 뒤덮인 개머리 언덕에 나있는 좁은 오솔길을 쭉 걷다 보니 오솔길이 굉장히 좁아서 수크령이 몸을 투투 투 툭 하면서 치는 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크령들이 바람이 흔들리면서 내는 바람소리도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렇게 행복에 겨워서 언덕을 넘었는데 군락지 사이에서 텐트를 치고 조용히 낭만을 즐기고 있던 분들이 보였다. 다들 책을 읽거나 커피 따위의 차를 끓이며 여유를 보내고 계셨다. 굉장히 소중한 시간을 보내시는 중인 것 같아서, 방해가 되지 않게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지나갔다.


능선을 쭉 타고 넘어가다가 보니 뭔가가 수크령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은 정체불명의 존재는 주민들이 방목하여 키우는 꽃사슴들이었다. 굴업도에선 이처럼 흑염소나 사슴을 방목하여 키우기 때문에 접하기가 쉬웠다. 흑염소는 83년도에 울도에서 10마리를 사다가 방목한 것들인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체수가 많이 불어났고 20년 넘게 방목한 꽃사슴들은 이제 거의 200마리에 육박할 정도로 개체 수가 불어났다. 어여쁜 꽃사슴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니 놀랐는지 다들 저만치 도망을 갔다. 그리고 모가지만 쭉 뽑아 들고는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걔네도 그랬겠지만, 나 또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고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지 않아서 멀뚱멀뚱 사슴들을 쳐다봤다. 사슴과 나 사이의 어색한 침묵은 계속됐다. 나는 사슴들을 관찰했고, 사슴들은 나를 관찰했다. 마치 서로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씩을 달고 '거기 있는 넌 누구냐?'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사슴들은 내가 침묵을 깨고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자 모두 달아났다. 그 뒤에도 한 번 봤는데 우르르 뛰어다니다가 우당탕 넘어지는 애들도 있었고, 거리를 두고 날 빤히 쳐다보는 녀석들도 있었다. 완전 자기네들 세상이었다. 그렇게 사슴들과 함께 개머리 언덕을 거닐었다. 사슴들이 개머리 언덕에서 제 집인양 마음껏 뛰노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이곳의 진정한 주인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낭개머리 도착

개머리언덕 끝자락인 낭개머리에 도착했다. 정말 다행이다 싶었던 게, 낙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착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붉은 노을이 뒤덮인 바다를 볼 수 있었고, 땅거미가 내린 뒤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앞서 온 사람들은 먼저 텐트를 쳐놓고 의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고, 나도 잠 잘 곳을 물색해서 해먹을 치고 바위에 기대어 경치를 감상했다. 가만히 앉아서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수크령들 틈에서 일몰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굳이 술이나 음식으로 추억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동화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은 섬은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본연 그대로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먹 설치

낭개머리 절벽 바위에 해먹 스트랩을 매서 해먹을 설치했다. 절벽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굴러 떨어진다면 바로 저승 면접일 정도로 아찔했다. 하지만 이런 걸 또 어디 가서 경험해보리,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해먹에 누웠다. 매일 이런 잠자리에서 쉴 수만 있다면 물구나무를 서서 전국일주를 마무리할 수 있을 정도로 에너지가 부족함 없이 재충전되었다. 이곳은 분명 지친 영혼의 고향이었다.



맑은 공기를 폐가 터질 듯이 힘껏 들이마신다.

그리고는 땅거미가 내린 바다를 보며 소주를 병 째 들이켜고 자리에 눕는다.

이 섬을 떠나면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문득 다시 떠오를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오기로 한다.

이 날은 실현 가능했던 로망이자, 참으로 위대한 하루였다. 

잘 지내라, 사슴도, 흑염소도, 언덕에 핀 야생화도.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건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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