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강아지 없어
3년 동안 함께한 연애를 계속하고 싶어 크리스마스이브날 작고 반짝이는 반지를 조심스럽게 꺼내 든 오빠에게 냉큼 왼 손을 내어 주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포근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제 나는 꿈꾸던 가정을 시작했고 달콤한 신혼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무언가 부족하다. 소중하고 귀엽고 복슬복슬한 반려동물!
동물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오빠는 결혼 전에도 자주 함께 고양이 카페를 방문했다. 원래부터 민감하게 창조된 데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가는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아이들을 더 힘들 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저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한 적도 있다. 1년 넘게 만나고 나서야 나는 오빠가 사실은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빠는 털과 먼지에 민감한 알레르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 기억은 곧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 리스트로 분류되어 삭제되었다. 사람이 다 그렇지 않은가? 기억하고 싶은 것 만 기억하는 것 말이다.
결혼 생활이 초반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동반한 적응 단계에서 안정기로 접어들자 오랜 꿈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강아지? 고양이? 강아지와 고양이? 어떤 반려 동물이 좋을까? 오빠한테 물어봐야지.
"나는 아직은 동물을 키울 생각이 없는데?"
오빠의 대답은 나의 예상 답안에 없던 답변이었다. 하지만 짧고 담담한 말에 담긴 무게와 진심을 헤아리기에 내 염원은 너무 간절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반려 동물을 키우고 싶지 않을 수 있지?
비슷한 대화가 며칠, 몇 주 동안 반복되자 오빠는 지친 기색이 역력해졌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배려하는 마음에 결론을 흐려버리는 오빠의 대답은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을 지피는 좋은 연료가 되었다. 서로 마음이 상한 체로 돌아서게 되는 순간을 몇 번이나 겪고 나자 싸움을 피하기 위해 나는 대화에 끝을 애교 섞인 '나만 강아지 없어'로 장식하는 법을 터득했다.
나만 강아지가 없다. 과거에 읽은 블로그 글이 문득 떠올랐다. 글쓴이는 동물을 너무 귀여워하고 좋아하지만 키우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반려 동물과 10년 20년 행복하게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경솔하게 생명을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인간에게 '완벽함'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중대한 결정 전에는 반드시 가족 구성원 모두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뜻밖의 계기로 반려견을 가족으로 맞이한 후에도 느낀 거지만 가족 구성원 모두의 동의가 필요한 이유는 사실 매우 현실적인 부분이었다. 강아지의 등장으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