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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미 Apr 02. 2023

어머님의 주름

  

  어머님!

  제가 어머님을 처음 뵌 날 기억하세요? 그날은 결혼 전 남편이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이사한 날이었지요. 안방에 앉아 계신 어머님이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몇 가닥 새겨져 있었습니다. 일어서면 힘이 드시는지, 자연스레 인상을 쓰는데 그 바람에 이마에 주름 몇 개가 더 자리를 잡았었지요.


어머님은 그때 혹시 아셨나요? 다섯 자매 중 가장 기대가 높았던 맏딸이 가난한 동료 교사와 결혼한다고 하니, 우리 집은 초상집 분위기였어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와 인사를 드리자, 어머님은 제게 순금 쌍가락지를 주셨지요. 그 당시 흑산도 시댁은 형편이 매우 어려웠던 걸로 알고 있어요. 아버님 동생이 아버님의 이름으로 융자를 받아 새 배를 만들었다지요? 그것 때문에 아버님은 어장사업을 확장도 하지 못하고, 국가 혜택도 전혀 받을 수 없었고요. 어려운 살림에 제게 가락지만이라도 해주고 싶으셨나 봐요. 마른 생선이나, 미역을 팔아 한 푼, 두 푼 모은 꼬깃꼬깃한 돈을 하나하나 펴서 전대에 넣었을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산후휴가로 몸조리하는 동안, 어머님과 많은 이야기 나눈 것 기억하시지요? 만주에서 압록강을 몰래 건널 때의 이야기는 압권이었지요. 그 무렵 남편이 태어나, 아기를 업고 강을 건널 때 행여 울까 두려워 입속에 솜을 넣어 입막음하고 압록강을 몰래 건넜다고 하셨습니다. 걸리면 총살당하거나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지요? 그런데 그때까지 어머님이 아버님의 둘째 아내인 것을,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너무 아픈 상처여서일까요? 훗날에서야 남편에게서 어머님의 사연을 듣게 되었어요. 어머님은 일본에서 아버님과 결혼하실 때, 아버님이 유부남인 줄 전혀 모르셨다고. 흑산도에 가보니 본처와 아이들이 있었고, 망설이던 어머님은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혀 흑산도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어요.    

  

  여름 방학에 흑산도 시댁으로 휴가를 갔었지요. 저녁에 어머님이 부엌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어머님은 도마 위에서 전복을 썰어서 제 입에 넣어주셨지요.

  “아가, 이건 귀한 전복이여. 아기 낳고, 키우느라 힘들었으니 영양 보충을 해야지.”

  몰래 제게만 전복을 썰어주셨어요. 살이 오동통한 전복을 씹는데, 어머님의 사랑이 느껴져 울컥했어요. 어머님은 우리 부부에게 안방을 내주고, 깨끗이 세탁된 요와 이불을 깔아 주셨습니다. 빳빳하게 다려진 이불이 엄마 닭의 품속인 양 포근했습니다.      


  딸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까지 어머님은 서울 우리 집에 계셨어요. 어머님이 아이를 봐주신 덕분에 편하게 교직 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퇴근하면 어머님은 집안일도 아이 돌보는 일도 전혀 하시지 않았지요. 저녁 설거지, 청소와 아이 돌보는 일까지 하다 보면 옷 갈아입을 시간조차 없이 바빴어요. 싱크대에 잔뜩 고춧가루가 묻어있었고, 낮에 드신 그릇이 제대로 설거지가 되지 않아 다시 닦고, 설거지했습니다. 그때 제가 혼자 속을 끓이며 어머님을 많이 원망했던 일 혹시 눈치채셨어요? 나중에 어머님이 팔을 다쳐서 신경이 끊어져 팔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단 걸 남편에게 들었어요. 팔을 굽힐 수 없으니, 아이를 장시간 봐줄 수도, 설거지를 깔끔하게 할 수도 없었던 거였지요. 자전거 사고로 팔을 다쳤으나 그 당시에 치료비가 없어, 팔을 고치지 못해 소위 ‘뻐둥 팔’로 살 수밖에 없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남편이 어머님의 속 사정을 미리 말해주었다면 그리 섭섭하진 않았을 겁니다.     


  어머님의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충청도의 농가주택에 어머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주말이면 자주 어머님을 뵈러 갔지요. 큰 고무통에 어머님의 몸을 처음 씻겨 드린 날 기억하실지요? 아래를 씻겨 드리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궁이 빠져서 몸 안에 있을 신체 부분이 바깥으로 덜렁덜렁 나와 있었습니다. 떠돌이 행상으로 열두 개 마을 고개마다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녔던 탓이었을까요? 씻겨 드리면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았더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었습니다. 망설이다가 남편에게 알렸어요. 그때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어머님께 크게 화를 냈지요.

  “왜 말씀하지 않고 그 고생하며 지내셨어요? 나를 불효자로 만들었네요.”

  남편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자기 몸이 그렇게 아프고 불편해도 내색 한번 하지 않았던 어머님! 그렇게까지 되도록 왜 참으셨어요?     


  지난 12월 어머님의 기일에 남편이 제게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님이 장사를 나가지 않고 누워 계셨어. 배가 부어오르고 얼굴이 창백하셨어. 무조건 어머님을 모시고 한의원에 갔지. 진맥을 보더니, 과로와 영양실조로 이렇게 되었다고 하시더군. 약을 지어서 먹어야 한다는 말씀에 내가 억장이 무너졌어. 한의사에게 울면서 사정했지.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어머님이 낫겠냐고. 유달산을 뒤지면 큰 개구리가 있으니 그걸 다려서 잡수면 좀 나아질 거라고 하셨어. 그 길로 나가서 내가 개발한 대나무로 만든 고무줄총으로 개구리를 잡기 시작했어. 한 달을 달여 잡숫게 했는데, 아주 좋아졌지. 그래서 다시 장사를 나가게 되었어.”

  그 일을 회상하며 남편도 울고, 저도 눈물을 쏟았습니다.     


  얼마 전 어깨가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옆 침대에서 할머니가 아파죽겠다고 소리를 지르십니다. 평생 아프다는 말씀 한 번 못 하신 어머님이 떠올랐어요. ‘뻐둥 팔’이 되어 치료받지 못하였어도, 밑이 다 빠져서 몇십여 년을 그렇게 사셨어도 자식들에게 티를 내지 않았던 어머님, 첩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식들 교육을 위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보따리 행상을 나섰던 어머님, 글을 몰라 외상을 주며 장부에 적지 않고도 용케 셈을 다 하셨던 어머님! 생선 팔아 모은 돈을 전대에 꼭꼭 숨겨 내게 쌍가락지를 마련해 주신 그 어머님이 생각났습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 어머님을 만난다면 어머님처럼 자식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어머님. 울음을 참았더니 목울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와요.     


  알고 계시지요? 어머님? 어머님이 계시는 포천 산소에 자주 가요. 푸른 하늘이 삽시간에 흰 구름을 초대했네요. 어머님의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고통과 싸웠을 어머님을 그려봅니다. 어머님!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네요. 제가 어머님 나이가 되어가니, 이제야 어머님의 주름이 화상 입은 듯 제게 쓰리게 다가와요.

 

  “아야! 암시랑토 안혀! 뭐시 그리 대단혀다고 울고 그래 쌌냐? 우리 아가들 잘되면 난 그걸로 좋다니께? ”

  어머님의 주름이 활짝 펴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식 향한 희생으로 긴 세월을 견뎌냈던 그 주름. 겹겹이 사랑으로 포개진 그 주름이, 햇빛 쨍한 날 바지랑대에 걸린 하얀 홑이불처럼, 하나씩 하나씩 환하게 펴지며 웃고 계셨어요. 어머님! 이젠 제가 그 사랑을 심어갈 차례입니다.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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