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이촌동 교회에서였다. 중고등학교 성가대 지휘자였던 그는 음악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었을까? 교회 음악회를 준비하느라 성가대 연습을 거의 매일 했다. 찬송가 외에 "별", "보리밭" 등 우리 가곡을 불렀다. 흑인 영가를 부를 땐 내가 솔로를 맡았다. “Swing Low, Sweet Chariot”, 마치 나와 그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했다. 지휘하는 그를 쳐다보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혼자 좋아했다. 공부만 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그 사람에게 주려고 고운 화선지를 사서, 윤동주의 ‘서시’를 쓰고 삽화를 정성껏 그려서 그걸 유리 틀에 넣었다. 손재주 없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가 무슨 맘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마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든 액자일 것이다. 그 사람 집에 용기를 내어 벨을 누르고 그 액자를 전했다. 문을 열어준 분은 그의 어머니였다. 성탄절 전야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귀갓길이면 공중전화로 매일 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전이 딸그락 소리를 내면 가슴이 콩콩 뛰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래도 공중전화기만 보면 지나치질 못하고 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기 위해서 늘 동전을 챙겼다.
어느 날 밤 드디어 그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내게
“집까지 바래다줄까?”
그의 제안에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무튼 우리 집 근처 계림극장 맞은 편 ‘계림제과점’에서 만났다. 그가 우유 한 병을 주문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을까? 짧은 시간으로 기억된다. 우윳값은 500원이었다. 계산하기 위해 그는 자기 옷을 다 뒤졌다. 여름이었기에 짧은 셔츠와 바지 주머니를 다 훝었다. 왠 주머니가 그리 많을까? 그 시간은 정말이지 길었다. 진땀이 났다. 돈이 있다면 대신 내주고 싶었지만 난 땡전 한 푼 없었다. 그 긴 시간 끝에 그가 간신히 돈을 찾았다. 마침내 제과점을 나왔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가난한 대학생의 현실에 나까지 간이 콩알만 해진 순간이었다.
밤 10시가 넘어서 을지로에서 장충동 우리 집까지 걸었다. 교복 차림의 나와 걷다가 그가 말했다.
“이 동네, 왜 이리 야하냐?”
어두운 골목마다 레몬 빛 가스등이 반짝였다. 여관이며 여인숙 간판이었다.
‘나그네가 쉬었다 가는 곳인데, 왜 야하다는 걸까?’
속으로만 생각했다. 무슨 말을 내가 하는지도 몰랐고, 내 말과 그의 말이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 밤이 꿈일지도 몰랐다.
그는 철없던 시절의 가엾은 여학생을 내치지 않고 가만히 품어주었다.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까지도 내 짝사랑은 이어졌는데, 나도 그도 그 이후는 관심이 멀어졌다.
훗날 유학을 다녀온 후 유명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그의 소식을 들었다. 여름이면 지휘하느라 팔을 들면 겨드랑이 쪽 실밥이 풀어져 그의 속살이 보였다. 가끔 생각난다. 그다음 해에도 꿰매지 않은 채로 여전히 해졌던 그의 셔츠가, 돈 오백 원이 없어 우윳값을 못 내고 쩔쩔매었던 젊은 날이, 또 골목의 나그네가 쉬어가는 줄만 알았던 레몬 빛 가스등 여관 간판이.